
Not cool at all
용준형x이기광
by. 공반 (@hk_loveuniverse)

<또 다시 이별, 하지만 넌 왜 슬프지 않아?>
G-side
"야, 이렇게 더러운데 그냥 쓰느까 병이 나는 거야. 쉬는 날 해준다니까 왜 그냥 쓰고 그래."
"더운데 그럼 어떡해."
"바빠서 집에 잘 있지도 않으면서 그걸 못 참냐."
"..."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을에 헤어질 걸 그랬다. 아무리 쿨하게 좋은 친구이자 직장동료 사이로 남기로 했다지만, 이건 아니지. 어떻게 헤어진지 일주일도 안된 전애인 집에서 에어컨 필터 청소를 해주고 앉아있을 수 있냐고.. 쿨해도 너무 쿨하다. 그게 아무리 지난 4년 동안 여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제가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해주던 일이지만, 그건 애인일 때 얘기고, 지금은 단지 친구일 뿐인 우리 사이에서 준형에게 이런 각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인상좀 피시지? 그러다 주름 생긴다."
"남이사."
여태껏 저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청소를 하는데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던 준형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살피며 뜬금없이 한소리를 했고, 기습적인 관심에 내심 놀란 난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짧게 맞받아치는 일차원적인 하급 방어기술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정작 먼저 화두를 던진 준형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시선을 에어컨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작업에 몰두했지만, 괜히 나 혼자 뭘 잘못한 사람처럼 그의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 흔들릴 정도로 크게 동요했다가, 다행히 금방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우린 헤어진 사이가 분명히 맞는데 너무 달라진 게 없어서, 너무 예전처럼 똑같이 저를 대하는 준형을 보고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곧 필터 청소를 완벽히 끝내고 모든 부품을 다 제자리에 돌려 놓은 준형이 탈취제까지 꼼꼼히 뿌려 깔끔하게 작업을 마무리했고, 방금 사용한 공구들을 도로 상자 안에 차근차근 보기좋게 집어넣으면서 또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겠는데, 그런 생각 하지마."
"..."
이번엔 날 쳐다보지 않고 말해서 좀 전보다 덜 놀랐지만, 아까보다 다소 진지해지고 낮아진 준형의 목소리에 내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난 니가 그러겠다고 해서 헤어지는 거 합의한 거다."
"..."
"전처럼 변하는 거 없이 잘 지내겠다고 그랬잖아."
"..."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내가 해줬던 것들 그대로 하게 내버려 둬."
"..."
"대신 나도 니가 나한테 해줬던 것들 계속 받아낼테니까."
"..."
'미친놈, 누가 해준데?'라고 반사적으로 그에 거스르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간신히 잘 참았다. 그도 그럴 게 가만 생각해 보면 난 별로 준형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친구일 때나 연인일 때나 작은 선물부터 이런 노동력이 필요한 잡다한 집안일까지 늘 준형이 해주는 걸 당연시 여기고 받기만 했을 뿐, 쪽팔리게도 그에게 무언가를 딱히 해준 기억이 없다. 심지어 준형은 날 위해 발매하지 않을 곡들도 몇개씩 써서 선물해줬었는데, 난 그를 위해 단 한곡도 써 본적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난 뭐가 이렇게 당당한 걸까.. 왜 우리의 이별 앞에서 죄인은 내가 아닌 네가 되어버린 것 같은 잘못된 기분일까?
"난 솔직히 사귈때도 너한테 해준 게 없었는데.."
"..."
"지금에 와서 나한테 뭘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준형의 정수리를 내려보면서 기어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정말 이런식의 대화는 피하고 싶었는데, 친구 사이로 겉을 잘 포장해서 더 이상 서로 깊숙이 묻어둔 감정을 들춰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너무 쉽게 애인이었던 이전의 지나간 관계로 돌아가, 이미 늦어버렸고 아무 소용도 없는 쓸데없는 얘기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에 결국 동참해 버렸다. 이미 후회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보면서, 준형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가만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이마를 살며시 기대었다.
"해준 게 없긴 왜 없어.. 얼마나 많은데.."
"..."
"내가 힘들때마다 이렇게 어깨도 빌려주고.."
"..."
"불면증에 시달려서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있으면 옆에서 내가 잠들때까지 등을 토닥여주고.."
"..."
"내가 바보같은 일로 울고불고 내 성질을 못 이겨 난리치고 있으면.. 그냥 아무말 없이 내가 분이 풀릴 때까지 다 받아주고.."
"..."
"정말 너한테 받은 게 많아 난.."
"..."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이 그 일을 모두 같이한 듣는 사람을 매우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바로 귀밑에서 조용조용 말하는 준형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많이 지쳐있는 것처럼 들려서, 그의 말을 도중에 끊거나 별다르게 토를 달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준형과 함께하면서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절실히 내 어깨가 필요해 보였다.
"밥 먹고 갈래?"
"그럼 안 주려고 그랬어?"
내 어깨에서 이마를 떼고 고개를 들어 장난스럽게 서운한 표정을 짓는데, 그런다고 해서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완전히 가려지는 건 아니라서 괜히 보는 사람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마 내 표정도 준형에게 전부 읽히고 있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난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너 이렇게 일찍 잘 안 먹잖아."
"그래도 니가 차려주는 건 먹어."
"..알았어. 그럼 다 되면 부를테니까 티비라도 보고 있던지."
"응."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소파로 가서 늘 앉던 자리에 거리낌 없이 털썩 주저앉은 준형은 거의 드러눕다시피 몸을 길게 등받이에 기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옆에 놓여 있던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고, 난 또 지겹게도 많이 봐 온 익숙한 장면에 이젠 정말 우리가 헤어진 게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여서 얼른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도망치듯 서둘러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몰라도 이번에 특히 더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이번이 세 번째로 겪는 미련한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인데, 앞에 두 번은 그래도 둘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주변에서 불편해 하고 신경쓸 정도로 서로 이별을 대하는 자세가 눈에 띄게 격하고 드라마틱해서 못 봐줄 정도로 유치하게 헤어진 티를 엄청 내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정말 너무 달라진 게 없는 우리의 관계성에 얼마 전 준형에게 이별을 종용한 장본인인 내가 그 사실이 헷갈릴 정도로 이별로 인한 상실감이 상당히 결여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 상황이 이기적이게도 준형에게 섭섭한 기분이 들게 만들어서 더 내 감정을 혼란스럽게 했다. 더 이상 우리의 이별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이 많이 약해지고 흐려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바보 같고 염치없게도 가슴이 아프다.
이런저런 한심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아직 쌀 밖에 씻지 못해서, 이러다 아침을 점심에 먹겠다는 위기감에 억지로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얼른 물을 붓고 취사 버튼을 눌러 밥을 짓기 시작했다.
<첫 실연과 사고 같은 첫 키스>
Y-side
이전까지 여자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야 별로 진지한 관계로 발전해 깊게 사귄 여자도 없었고, 또 자랑은 아니지만 늘 먼저 질려서 헤어졌기 때문에 실연으로 제대로 아파 본 건 데뷔 후 처음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였다. 이별 후 거의 한달을 넘게 계속 술만 마시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는데, 그 날도 요새 계속 날 상대해주느라 고생인 홍기와 둘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완전 개떡이 돼서 민폐를 끼치고 있었고, 홍기는 웬만하면 자기 선에서 해결을 하려고 했지만 위로주를 사주면서 적당히 빼면서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여서 홍기 역시 꽤 취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대리를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리도 탑승자가 어느 정도 의식이 있어야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뭐 특별한 건 없어도 어디에서나 책잡히기 쉬운 연예인이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 홍기는 자기가 같이 한 차를 타고 가서 날 집에 데려다주고 가겠다고 했지만, 난 혀가 꼬여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주제에 절대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 없다며 따로따로 가겠다고 똥고집을 부려서 홍기를 더 곤란하게 하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날 설득하려고 시도하던 그는 테이블에 엎어져서 싫다고 고개만 계속 절레절레 흔드는 내게 결국 백기를 들었고, 차선책으로 내 핸드폰에서 매니저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는데, 지금이 활동기도 아니고 워낙 늦은 시간이라 자고 있는 건지 몇 번을 해 봐도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깐 고민에 빠진 홍기는 잠시 뒤에 다시 연락처를 뒤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응, 준형아, 무슨 일이야?」
"어, 기광아, 나 홍기."
「어? 준형이 무슨 일 있어? 왜 이걸로 전화 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얘가 나한테 신세지기 싫다고 혼자 대리를 타고 집에 간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혼자 보내기에는 너무 많이 취해서.."
「아..」
"매니저형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그래서 얘 주변에 내가 부탁할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
「어,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소 찍어주고.」
"오케이."
평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멤버들 중에선 약간 알고 지내던 기광에게 연락을 했나 보다 싶었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전화기 너머에서 걱정스러워하는 기광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냥 자기랑 같이 가면 되지 굳이 집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야 속이 시원하냐며, 엎드려 누워 있는 내 머리 위로 구박하는 홍기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니가 진짜 요즘 고생이 많다. 빨리 들어가서 푹 쉬어."
"어,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나중에 저놈 빼고 술 한잔 같이하자."
"응, 그러자. 잘 가~"
언제 술집에서 나와 벌써 차 안에 들어와 있었던 건지, 기광의 차 뒷좌석에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난, 밖에서 들리는 아는 목소리에 눈이 떠져서 약간 잠이 덜 깬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창 밖으로 홍기의 애마인 파란색 마세라티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고, 그 뒤로 손을 흔들어 그를 끝까지 배웅하고 있는 기광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큰 도로로 빠져나간 그 차가 어느 정도 시야에서 멀어지자, 기광은 이쪽으로 몸을 돌려 주차되어 있는 제 차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 깼어?"
"응.."
운전석에 문을 열고 들어와 앉은 기광이 뒤로 고개를 돌려, 멍하니 앉아 있는 날 보고 셀쭉하게 웃는다.
"일어나려면 아까 일어나지, 홍기랑 둘이 너 들쳐 메고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미안."
"나한테 미안할 건 없고, 홍기한테 미안한 거 알면 이제 그만 좀 마셔."
"..."
"기분은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오래 그러지 마. 니 속만 버린다."
"..."
내가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힘없이 끄덕이니까, 기광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고 앞을 보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움직이는 차 안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피곤이 한 순간에 몰려와 무거워진 내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 앉아서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G-side
또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준형을 보고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쉰 뒤 그의 오른팔을 한쪽 어깨에 둘러 메고 허리를 끌어당겨 거의 안다시피해서, 그를 끌고 겨우겨우 그의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나보다 덩치 큰 놈을 들쳐 메고 옮기려니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말 힘들게 낑낑대며 침대까지 끌고 와서 그 위에 준형을 던져 놓고,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화장실로 들어가서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렇게 잠깐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준형이 입고 있는 두꺼운 겉옷과 양말 정도만 벗겨 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고, 끝으로 그의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 다음, 잘 자고 있는 걸 확인한 뒤 방에 불을 끄고 현관으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으웩-"
갑자기 방에서 뛰쳐나온 준형이 화장실로 직행했고 안에서 꿰엑꿰엑 대며 거의 죽을 것처럼 괴롭게 게워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 봐도 뻔히 그려지는 그림에 저러고 있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어서, 다시 발걸음을 돌려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한병 꺼내 그가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 후우... 하.. 후우..."
이제 거의 다 게워냈는지 변기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는 준형에게 다가가 물병을 건네주고 변기 물을 내렸다.
"입좀 헹구고 마셔. 그냥 마시면 시다."
"..."
그래도 말은 알아듣겠는지 시키는대로 먼저 마실 물을 한 모금 입에 넣어서 입 안을 헹궈 변기에 뱉어낸 준형이, 목이 말랐는지 급하게 병에 남은 물을 꿀꺽꿀꺽 전부 다 들이켜 마셨다.
"일어날 수 있겠어? 방에 들어가서 자. 바닥 찬데 계속 앉아 있으면 안 좋아."
"..."
옆에 휴지를 몇 장 끊어서 준형의 입가를 닦아주고 변기 안에 버린 뒤, 그의 허리를 잡아 조심히 일으켜 세워서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도 아까보다 의식이 좀 돌아와서인지 비틀대면서도 자기 발로 걸으려 하고 있어서, 그를 방 안으로 데려가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시 불을 켜고 들어간 그의 방에 꽤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그가 늘 자랑하던 커다란 침대에 준형을 조심히 뉘어놓고, 얼굴이 좀 붉어 보여 혹시나 해서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봤다. 뜨겁다. 불덩이 수준으로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냥 두면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일단 아까처럼 그가 편한 자세로 누울 수 있게 자세를 조금 고쳐주고 이불을 덮어준 뒤, 화장실로 가 수납장에서 쓸만 한 수건을 두 개 꺼내서 주방으로 가져가 하나는 물을 흠뻑 적신 뒤 꽉 짜내서 나중에 쓸 수 있게 냉동실에 얼려 놓고, 다른 하나는 큰 대접에 얼음물을 담아 같이 들고서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참을 차가운 수건을 준형의 이마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옆에서 간호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불쑥 느껴지는 내 머리 위를 더듬는 손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엎드려 있는 곳이 준형의 침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날 만지고 있는 게 준형이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와 있는 그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뒤로 빼고 피하려고 하다가, 준형이 뒷목을 잡아끄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야, 왜 이래? 아직도 술이 덜 깼어?"
"..미안해. ✖✖야 내가 잘못했어.. 진짜 미안해..."
"..."
"제발.. 가지 마... 나 버리지 마.."
운다. 이 바보가.. 여자 때문에 운다. 뭔가 힘이 탁 풀려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준형이 끌어당기는대로 딸려가서, 내 얼굴로 곧장 들이대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받아줬다. 그의 입술까지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짜고, 입 안에 술냄새가 지독한 최악의 키스였다. 하지만 내 입술을 머금고 있는 그의 입 안에 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느껴져서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키스이기도 했다. 제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며, 최선을 다해 저의 사랑을 전하려고 하는 키스가 애절했다. 그 마음이 너무 잘 전달되서, 준형을 짝사랑하면서 몇 년째 친구라는 자리에서 그저 그를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내 초라한 마음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었다.
Y-side
"아으.."
눈을 뜨자마자 숙취로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멀리서 달그락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부엌 쪽으로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어기적어기적 힘겹게 걸어 나갔다.
"어? 일어났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나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미안하다 정말."
"됐어, 미안하기는.. 술이나 좀 작작 마시고 다녀. 너 때문에 맨날 집에 늦게 들어가는 홍기는 무슨 죄냐?"
"응.. 그래야지."
필름이 중간중간 끊겨서 기억이 뒤죽박죽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기광이 자신을 데리러 온 건 명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잔뜩 취해서 토까지 해대고, 오밤중에 여자 때문에 있는 청승 없는 청승 다 떨고 있으니까 불쌍해서 혼자 두고 가지 못한 거겠지. 그것도 모자라서, 냉장고에 재료도 별 거 없었을텐데, 아침부터 나 먹으라고 국 같은 걸 끓이고 있는 마음씨 착한 기광에게 감동해서, 음식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그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가 그의 어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기댔다.
"너 왜 그렇게 놀래? 뒤에 서 있는 거 봤으면서.."
"아닌데, 안 놀랐는데?"
아니, 분명히 놀랐다. 흠칫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지, 또 그게 무슨 큰 일이라고 안 놀랐다고 강하게 우기는 기광을 보니까 더 수상해졌다. 어젯밤에 뭔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내가 어제 너한테 뭐 실수한 거 있냐?"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뭐 있는데 이거.. 빨리 말 안 해?"
"..."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추궁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기광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인다. 얘가 갑자기 도대체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숙여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굳이 고개까지 옆으로 꺾어가며 각도를 맞춰 빤히 들여다보는데, 기광이 초조한 듯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시는 걸 보았고, 그 순간 그 붉고 도톰한 입술을 훔쳤던 혀의 감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어젯밤 침실에서 추하게 울면서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기광에게 저질렀던 만행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눈 앞에 선명해졌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장면에 할 말을 잃고,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절로 떡 벌어진 입을 인지하고 그 입을 두 손으로 가리는 것이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야.. 설마, 아니지? 꿈이지?"
"..."
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믿고 싶지 않아서 일단 현실을 부정해 보았다. 하지만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기광의 얼굴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내 얼빠진 표정을 보고 위로라도 해줄 심산인지, 기광은 이제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내 등을 툭툭 치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 실연 당한 걸 다행으로 알아라. 아니였음 나한테 맞아 뒤졌어."
"아니, 차라리 그냥 패줘.. 실컷 두들겨 패라 그냥.. 그게 나을 것 같아."
주먹을 들어올리며 위협하는 척 장난스럽게 무서운 표정을 짓는 기광을 보고 진짜 면목이 없어서, 차라리 때려달라고 머리를 수그리며 그의 주먹에 갖다 대니까, 기광은 내 머리를 밀어내고 서랍장에서 오븐장갑을 꺼내 다 된 국을 식탁으로 옮겼다.
"됐고, 밥이나 먹어."
"아, 진짜 내가 또 그렇게 개가 되게 술을 마시면 니 아들 한다, 니 아들."
"됐네요. 너 같은 아들 필요 없거든?"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아 진짜 쪽팔려.."
내가 자괴감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잠시 아무 소용도 없는 신세한탄을 하는 동안, 기광이 혼자 냉장고에서 몇개 없는 밑반찬을 척척 꺼내고 밥도 후딱 두 그릇을 퍼서 올려서 금방 식탁을 차렸고, 그 곳에 우린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조금 뒤숭숭한 기분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딸그락-』
"?"
기광이 괜찮다고 했지만, 괜히 주눅이 들어서 평소처럼 떠들지 못하고 조용히 국만 떠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또 다른 강렬한 기억이 머리를 강타해서 아까보다 더 벙찐 얼굴로 일시정지가 되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로 떨어뜨렸다. 무슨 영문인지 알리가 없는 기광은 날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난 그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들켜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잘 때 그가 옆에서 혼자 한 고백을 내가 들어버렸다는 걸.
- 준형아, 많이 아파?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이상하다.. 열은 이제 없는 거 같은데 왜 그러지.. 아프면 안 되는데...
자꾸 반복해서 내 이마를 짚어 보는 그의 손이 오히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잠결에 들려오는 조근조근 속삭이는 기광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듣기 좋았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금방 잠이 들진 않았다. 그가 얼음물에 적셔 내 얼굴을 식혀주는 차가운 수건이 기분을 좋게 했고, 평소 대화할 때랑 뭔가 다른 톤의 나긋한 말투가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 바보야 아프지 마.. 니가 아프면 내가 미안하잖아.. 근데 난 정말 니가 이정도로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진짜 몰랐어.
술은 내가 마셨는데 어째 취하기는 같이 취해버린 것 같다. 날 붙잡고 감정을 듬뿍 담아서 넋두리처럼 말을 쏟아내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알았다면 저주하지 않았을 거야.. 빨리 헤어지라고.. 둘이 평생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랐을 거야. 미안해 정말.. 난 속도 없이 걔랑 헤어졌다는 소식 듣고 남몰래 기뻐했었는데.. 친구라면서 정말 못됐다, 그지?
수건으로 계속 내 얼굴을 닦아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어둡게 잠겨 들어갔다. 흐릿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도 이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그가 하는 말의 맥락이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서 조금도 동요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 편하게 잠들어 있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 정신이 붕 떠서 그가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지금 기광이 말을 하고 있는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술기운을 빌려 의도적으로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 좋아하니까... 내가 너 많이 좋아해, 준형아.. 알아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끝까지 힘없이 읊조리는 목소리로 고백해오는 기광의 아픈 마음을 느끼면서, 애써 그를 외면한 채 도망치듯 다시 깊게 잠이 들었다.
"야, 왜 그래? 또 속이 안 좋아?"
"..."
갑자기 밥 먹다 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날 보고 걱정스레 묻는 그의 말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 아까부터 메슥거려서 죽겠다. 잠깐만.."
죽어도 아는 척은 할 수 없어서,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 배가 아픈 척을 하면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서 있었다.
좋아한다고? 이기광이.. 날 좋아해?
<At Last>
Y-side
실연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돼 있었던 음반작업이 시작됐고, 작업을 하면서 녹음실에서 가장 자주 부딪칠 수 밖에 없는 태주를 비롯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내 눈치를 엄청 보는 게 느껴졌지만, 정작 나의 상태는 아무렇지 않음이었다. 요 근래 한달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눈을 뜨면 마시고 그러다 술에 취해 잠들고 이 두가지 행위만 반복하면서 완전 구제불능 폐인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때 잠결에 기광이 내게 하는 혼자만의 고백을 몰래 엿들은 그 날 이후로 신기하게도 실연의 아픔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젠 밤마다 술을 찾지도 않고, 마시더라도 적당히 마시다 끝내는 게 가능해졌다. 인사불성이 되서 꼬장을 부리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침대에 누워만 있지도 않는다. 다시 운동도 하고 곡도 쓰면서 정상적인 생활패턴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이런 게 바로 충격요법이라는 건가 보다. 실연보다 더한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니까, 인간 역시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물일 뿐이라고, 이젠 정말 전 여자친구에 대한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하자."
하지만 대신에 내 마음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새로운 대상이 생겼다.
쉬고 하자는 내 말에 헤드폰을 벗어두고 녹음실 부스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 멤버, 이기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지금 녹음하고 있는 곡에 그의 파트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면서, 같이 담배를 피우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사 중 특정 단어를 언급하면서 그 부분을 반키정도 올려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지금도 충분히 높다며 못 하겠다고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본다. 어차피 시키는대로 해줄 거면서 꼭 이렇게 한번 튕겨보는 기광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벌써부터 뜨거운 태양 아래 햇살을 피해 그늘진 곳을 찾아서, 옥상 한쪽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우리는 각자 담배를 빼어 물었다.
"니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야?"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곡 쓰는데 참고할 수도 있잖아."
난간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건물 밖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차의 움직임을 망연하게 응시하면서 말 없이 담배를 태우다, 문득 옆을 돌아보고 갑자기 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곡 핑계를 대며 대충 넘어갔지만, 사실 난 기광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날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잘 믿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상대가 같은 남자라는 것은 둘째치고, 적지않은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살기도 했고 또 진짜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로서 서로 볼꼴 못 볼꼴 다 본 마당에 어떻게 그런 감정이 생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으음.. 담배같은 사람?"
"아, 그게 뭐야.. 대충 말하지 말고 잘 좀 생각해 봐."
"아니, 진짜로.. 담배처럼 해롭지만 끊을 수 없는 사람."
"..."
"한번 알게 되면 심하게 중독되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그런 치명적인 사람."
자기가 피우고 있는 담배를 들어 올려 보이며 애정 넘치는 표정으로 그에 대해 시적으로 묘사하는 기광의 모습은 진정한 애연가로 보이기 충분했다.
"그게 무슨 이상형이냐, 그냥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담배같다는 거지."
"응, 그러네.. 너무 오래 한 사람만 좋아하다 보니까 그냥 그 사람이 이상형이 돼버렸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난 왜 처음 듣냐? 애들도 알아?"
"아니,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
앞에 먼 허공에 시선을 두고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면서 그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이쯤되니까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생각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대화를 멈추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아서, 일단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 사람 좋아하면 안 힘들어?"
"가끔.. 너무 힘들 때도 있지. 연기처럼 내 옆에 그 실체가 없으니까.. 바라만 보고 있다 보면, 언제든지 멀리 훅 날아가버리기도 하니까.."
"..."
"그래서 관두려고도 해봤는데.. 이미 너무 오래 그 사람만 봐서 어떻게 그만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그의 옆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런데 계속 좋아하길 잘한 것 같아."
"..왜?"
"이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행복해도 괜찮을 것 같아. 전에는 솔직히 그렇게 쿨하지 못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
"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같이 좋아해줘야 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
"뭐, 만년 짝사랑만 하고 있는 내가 뭘 알겠냐만은.. 설사 그 사람이 내 손에 영영 닿지 않아도.."
"..."
"이제는 정말 보고만 있어도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입에서 떼고 입술을 오므려 후우- 하고 연기를 내뱉고 난 뒤 날 보고 살포시 웃는데, 순간 예상치 못한 심장의 두근거림에 혼자 놀라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름 수습을 한다고 재빨리 발로 담배를 비벼 끄긴 했지만, 당황한 티가 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서 힐끔 시선만 돌려 기광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장초를 왜 버리냐? 아깝게.."
"그냥.. 오늘따라 별로 맛이 없다."
"별일이네.. 맨날 입에 달고 살면서."
"넌 마저 피우고 와.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
"어."
내 발에 짓이겨진 불 꺼진 담배꽁초를 주워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장했다. 옥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얼른 문을 닫고 문가에 기대어 서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저 모든 말들이 날 향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그날 밤 내가 술에 취해 비몽사몽인 상태로 그의 입술을 덮쳤던 기억까지 되살아나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일단 순발력 좋게 피신을 해서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앞으로 기광을 볼때마다 너무 의식하게 될까봐 걱정이 됐다. 이러다가 내가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걸 그가 눈치 채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기광은 일부러 내게서 거리를 두려고 할 텐데, 그건 정말 싫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와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Y-side
그 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여름이 코 앞까지 다가온 지금, 이번 앨범의 모든 녹음은 끝났고 믹싱과 마스터링 작업만 남겨 둔 상태였다. 그동안 녹음실에서 당연스럽게 기광을 자주 보면서, 예전엔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그의 호의들이 하나하나 다 의미있게 다가와서 괜히 혼자 마음을 졸이고 싱숭생숭한 기분에 아슬아슬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내 마음의 방향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얼마 전에 기광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 날은 기광이 마지막으로 제 파트의 녹음을 끝내고 녹음실 정리까지 같이 도와주고, 스탶들과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갔었을 때였다. 난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반주를 하면서 밥을 먹고 있었고, 기광은 식사 후에 운전해서 날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술은 마시지 않고 밥만 먹고 있었다.
"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내일도 넌 마무리 작업 하러 녹음실 나가야 한다며, 적당히 해."
"오후부터니까 괜찮아."
"그래도 적당히 마셔."
"알았어."
맞은편에 앉아서 고기를 집어 먹으면서 잔소리를 하는 기광에게 말로는 그러겠다고 하면서 또 한 잔을 목 뒤로 넘기니까, 그가 살짝 인상을 쓰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기광은 벌써부터 몸 관리를 시작해서 밥도 조금만 먹고,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다른 스탶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곧 식사가 끝나고 모두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했고, 기광의 말을 듣지 않고 꽤 마신 덕에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아진 난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의자를 뒤로 최대한 젖히고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서, 옆으로 돌아누워 운전을 하고 있는 기광을 보고 바보처럼 계속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기광아.."
"왜?"
"너 진짜 예쁜 거 같아."
"..취했으면 잠이나 자라."
기광이 흘끗 내쪽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앞을 보고 운전을 하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닌데, 나 안 취했는데?"
"어, 그래."
"진짜야.. 나 정신 말짱해."
"네에, 네에."
"..."
기광이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단정한 옆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바로 흠칫 놀라 고개를 반대쪽으로 빼며 내 손길을 거부했지만, 안타깝게도 운전대에 양 손이 묶여 있는 기광은 내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순순히 얼굴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야, 왜 이래.. 운전하는데 위험하게, 손 치워."
"진짜 예뻐.. 여자보다 더 예뻐."
"..."
처음엔 한 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열심히 쳐내며 자기 얼굴을 못 만지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내가 힘이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 손을 단단히 움켜잡으니까 표정이 굳더니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았고, 조금 있다가 그의 손을 놔주고 다시 그의 얼굴을 매만지려고 하는 내 손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진짜 이 입술은.. 세계 최고로 섹시해."
"..."
볼 쪽을 살살 만지고 있던 손을 내려, 이번엔 빨갛고 도톰한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여전히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앞만 보고 운전 중인 기광이었지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느라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출렁이는 모습이 신경은 온통 내 손끝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난 계속해서 기광의 아랫입술을 살짝 스치듯 좌우로 느리게 만지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부드럽다.. 말랑말랑 젤리같아."
"..."
"다시 키스해보고 싶다.. 그때 꽤 좋았었던 것 같은데..."
"야!"
때마침 신호정지에 걸려있길 망정이지, 아니였으면 엄청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화를 내며 내 손을 확 쳐낸 기광이 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넌 이게 재밌어? 내 맘 알면서 날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냐고? 어?"
"아니, 난.."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너.. 내가 아무리 병신 호구같이 말도 안되는 짝사랑에 몇 년씩이나 목을 매고 있다지만, 너한테 이런 취급 받을 이유없어."
"..."
"너, 내가 얼마나.. 니 옆에 있으면서 좋아하는 티 내지 않으려고, 너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니가 알기나 해?"
"..."
"날 병신취급 하는 건 괜찮은데, 진짜 내 마음까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줘. 부탁이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는데도 우리 차가 출발을 하지 않자 뒤에서 빵빵 크락션을 울려대고 난리가 났고, 방금 전까지 하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흥분해서 화를 내던 기광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더니, 금방 한결 차분해진 낯빛으로 다시 핸들을 잡고 엑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난 조금 억울한 마음에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고 몸을 구긴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난 솔직히 기광의 마음을 가볍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를 갖고 놀려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그런 변명을 하기에는 내가 좀 무례하고 오해를 살만하게 행동을 했다는 사실과 눈동자까지 얼어버린 것처럼 차갑게 식어 버린 그의 표정 때문에,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날 집 앞에 내려준 기광은, 어떻게 붙잡을 틈도 없이 서둘러 차를 몰고 내 눈 앞에서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G-side
그 사건이 일어난 뒤로 난 필사적으로 준형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녹음작업은 모두 끝났다고 해도, 컴백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콘셉트 회의니 뭐니 멤버들끼리 같이 처리해야할 일들이 잔뜩 밀려 있었는데, 준형이 회사에 나온 날은 요섭이나 두준에게 미리 알아봐서 정말 말도 안되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도 계속 지연되고, 갑자기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날 준형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물론이고 우리 이번 앨범 담당 직원들까지 모두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도 내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년간의 짝사랑 상대였지만 늘 가까운 곳에 있어서 보려고 하면 언제든 금방 볼 수 있었던 준형이 너무 보고 싶다가도, 그 때 차 안에서 내 입술을 만지며 가볍게 다시 키스해보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진짜 보기 싫어지는 이율배반적인 내 감정이 날 혼란스럽게 하고 정말 힘들게 했다.
오늘은 준형이 마스터링 작업 때문에 녹음실에 가 있다는 정보를 요섭에게서 입수하고, 이미 다른 애들이 어제 회의한 내용을 확인하러 회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
완전 방심한 상태에서 준형을 맞닥뜨리니까,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장 몸을 돌려 뛰쳐나가고 싶은데,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에게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녹음실에 있다던 준형이 어찌된 일인지 사무실 앞에서 저를 딱 기다리고 있었고, 짜증이 날 정도로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짝사랑의 주인공은, 그를 발견하고 놀라서 사무실 옆 복도에 가만히 서 있는 날 보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변에 있던 회사 사람들 몇몇이 이쪽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그런 주위 시선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준형이 망설임 없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손목을 세게 잡아당기며 조금의 배려심도 없이 그대로 날 회사 밖으로 끌고 나왔다.
무서운 놈. 치밀하기도 하지, 내가 지 차를 보고 도망갈까봐 일부러 멀리 주차를 해놓은 건지, 회사에서 나와 그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한참을 걸어서 유료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기 차까지 날 끌고 가서 조수석에 거의 구겨 넣듯이 밀어 넣고는, 밖에서 허리를 숙여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민 준형이 앉아 있는 날 향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아예 안 볼 생각이면 도망치던가."
"..."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탕! 소리 나게 차 문을 세게 닫은 준형이 빠른 걸음으로 차 앞쪽을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그의 살벌한 협박에 쫄은 건 아니었고, 단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일단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나 듣고 나서 지랄을 할 셈이었다. 지금 왜 네가 화를 내고 있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혈투극을 벌일 수는 없으니, 우선 핸드폰을 꺼내 날 배신한 게 분명한 요섭에게 분노의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요섭이한테 따질 거 없어.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니까."
"..."
눈치도 빠르지, 바로 내 행동에 딴지를 거는 준형이 얄미워서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요섭에게 따지는 건 관두기로 했다. 애초에 내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에 지장을 주고 있는 건 나였고, 그런 나한테 요섭을 탓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건데? 활동 시작해도 이럴거야? 나 있으면 무대 안 서려고?"
"..."
나를 꾸짖는 준형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내 앞에서 너무 당당하기만 한 그의 태도에 나 역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넌 뭐가 그렇게 잘났어? 넌 나한테 조금도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없지?"
"내가 왜 미안해 해야 하는데?"
"..됐다. 말을 말자."
냉랭할 정도로 차가운 그의 반응이 너무 야속해서,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거칠게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워 버린 준형이 안전벨트를 풀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날 진지하게 바라봤다.
"아니, 난 지금 말해야겠어. 난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왜냐면 잘못한 게 없으니까. 니가 내 말도 안 들어보고 그냥 니 멋대로 날 개새끼로 만든 거잖아."
"..."
"그래, 술 취해서 가벼워 보이게 추근거린 건 내가 잘못했다고 치자. 근데 그게 왜 네 마음을 우습게 여기고 널 갖고 논다는 식으로 연결되는 건데?"
"..."
"나 한참 전에 알았어. 니가 나 좋아하는 거."
"..."
"그때 나 술 엄청 마신 날, 니가 나 집에 데려다주고 우리집에서 자고 간 날, 잠결에 네가 하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몇 달을 계속 고민했어. 네 짝사랑 기간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어."
언뜻 보면 무서워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의 귀에 내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조금 전부터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너무나도 컸다. 그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온몸을 뒤흔든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어딘가 긴장돼 보이는 준형이 가만히 두 손으로 내 양쪽 볼을 그러쥐고, 살짝 위로 들어올려 먼저 눈을 맞춰 왔다.
"네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계속 좋아해 줬으면 해."
"..."
"나도 너한테 내 마음을 주고 싶어졌으니까."
그리고 내 입술로 다가오는 그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살짝 떨리는 나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한참을 그렇게 입을 맞댄 채로 서로의 도톰하고 달콤한 입술의 온기를 나누다가,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작은 숨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렇게 처음과는 전혀 다른 꿈만 같은 두 번째 키스를 하고 나서, 날 바라보는 준형의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오랜 짝사랑이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아직 엔딩크레딧은 올라가지 않았다>
G-side
"이 시간에 니가 왠일이냐?"
"왜? 내가 못 올데 왔어?"
"..아니야, 들어와."
홧김에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이미 꽤 취한 상태에서, 늦은 밤 검은 봉지에 소주와 맥주를 가득 사 들고 예고 없이 갑자기 그의 집을 찾아온 날 보고,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편안한 츄리닝 차림으로 날 맞이한 준형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난 그런 그를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바닥에 술이 든 봉투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편하게 준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형이 술잔과 먹을 만한 안주거리를 가지고 오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안 있어 주방에서 두 개의 기다란 유리잔과 과자 몇 개를 들고 온 그가 내 옆으로 와 같이 바닥에 앉았다.
"너 술 좋아하잖아.. 저번에 에어컨 청소해 준 게 고마워서 사 왔어."
"..."
"너 마시라고 사 온 거지만, 나도 마셔도 되지?"
"그래, 마셔."
준형이 가지고 온 술잔에 각각 자기가 마실 것과 내가 마실 것으로 소주와 맥주를 따로 나눠 따르고, 과자 봉지들을 터서 내 쪽으로 밀어 놓았다.
"사실은 말이야..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무슨 할 말?"
목이 탄 사람처럼, 내 잔에 그득 채워져 있는 맥주를 단숨에 다 들이키고는 준형을 쳐다봤다.
"그때 생각나? 우리 처음 헤어졌을 때."
"..."
역시 술쟁이답게 소주로만 반을 채운 맥주잔을 들고서 꿀꺽꿀꺽 서너 모금이나 시원하게 들이킨 준형이, 내 얘기에 집중하는 것처럼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그때 우리 장난 아니었잖아. 서로 만나기만 하면 정말 죽일 것처럼 격하게 싸웠었잖아. 니 잘못이니 내 잘못이니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유치하게."
"음.. 그랬었지."
"두번 째로 헤어졌을 때는.. 아주 나 혼자 코미디를 찍었었지. 내가 의심병 걸려서, 니가 아무 여자랑 얘기만 해도 무슨 사이냐고 난리를 쳐서 니가 질려버렸었잖아."
"그땐 니가 심하긴 했어. 헬스클럽 프론트 여직원까지 의심했었으니까.."
"맞아.. 그래서 막 헬스클럽 바꾸자고 억지부리고, 완전 꼴불견이었는데."
"알긴 아는구나."
"쳇."
서로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또 마시기를 반복하면서, 먼젓번에 우리가 헤어졌을 때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데, 그래도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만큼 아팠고 힘들었던 일들을 이제 다 지난 얘기라고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그 얘긴 갑자기 왜 꺼냈는데?"
준형이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서 내게 물었다. 그래,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그때랑 너무 다른 거 같아서.."
"뭐가?"
"너무 아무렇지 않잖아, 우리.."
"..."
내 말에 또다시 술잔을 훌떡 비워버린 준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깊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알아? 나 좀 서운하다?"
"..."
"이런 말 되게 뻔뻔한 거 아는데, 그냥.. 니가 전보다 날 덜 좋아했나보다.. 그래서 예전보다 괜찮은 건가 보다 라고 생각하니까.. 막.. 좀 서운해."
"..."
"미안.. 웃기지? 곱게 헤어져 줘도 지랄이다, 그지? 하하.."
그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니까, 준형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이마를 가볍게 톡 치고는 그 손으로 내 볼을 살짝 꼬집는다.
"기광아, 넌 어떻게 아직도 날 그렇게 모르냐?"
"..어?"
난 그에게 볼을 붙잡힌 채로 휘둥그레 뜬 눈을 얼떨떨하게 깜빡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 우리 관계 되게 길게 보고 있어."
"..."
"100번 헤어지면 101번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우린 지금 헤어진 게 맞지만 정말 끝난 건 아니라는 거지."
"..."
"이별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널 아직도 좋아해서 네 곁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야."
"..."
"니가 다시 나한테 돌아올 때까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눈가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고, 준형이 내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떼서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누가 음악하는 사람 아니랄까봐, 노래 가사 같은 감성 가득한 말로 날 서럽게 울린다.
"전에는 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던 거고.. 이젠 니가 헤어지자고 해도 옆에 딱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야."
얄밉게 내가 우는 걸 보고도 당황하지도 않는다. 그냥 씨익 여유롭게 웃으면서,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날 두 팔로 끌어안고, 내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난 그에게 안겨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부끄러운 마음에 괜한 심통을 부렸다.
"아이씨, 진짜 이제 아주 꼬시는데 도가 텄어. 얄미워 죽겠어, 정말.. 신경질 나."
"그래서 다시 넘어 올 생각은 있고?"
"몰라, 이 능구렁이야. 일단 더 세게 나 좀 안아줘. 숨도 안 쉬어지게 꽉."
말 잘 듣는 준형이 날 안고 있는 팔에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바짝 붙어 서서 제 코앞에 있는 내 정수리에 가만히 입술을 묻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그렇게 우린 서로를 꽉 끌어안고 서서,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체온만을 느끼며 다른 생각은 모두 잊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 때문인지, 피부에 닿은 그의 몸이 엄청 뜨겁게 느껴졌던 어느 여름 밤, 준형의 품에 안겨 쿵쾅쿵쾅 몸 밖으로 튀어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는 내 심장이 또다시 시작된 우리의 네 번째 연애를 알려왔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멀지 않은 미래에 그와의 새로운 이별을 하나 더 겪게 될지도 모르지만, 준형이 말한 것처럼 몇 번을 헤어져도 결국 그 끝은 서로에게 다시 이어질거라는 믿음을 가져 보기로 했다.
너와 나는 이 세상의 끝에서도 다시 만날 운명이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의 오랜 짝사랑이었고, 지금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내 하나뿐인 우주가 되어버린 네가, 우리들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든 우리의 사랑은 깊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으니까.
우린 과거에 서로를 지독하게 사랑했었고, 지금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으며, 내일은 더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