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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양요섭x이기광

by. 익명

“형, 저기 소파 위에 옷 누구 거야?”

 

다음 수업에 가기 위해 과방에서 나가려는 찰나 익숙한 옷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예상이 맞다면 당연히,

 

“오늘 워낙 여럿이 더위 식히겠다고 들락날락 했어서... 아, 어제 기광이가 수업 끝나고 와서 놓고 간 것 같네. 에어컨 쌩쌩한 강의실에 있다가 과방 오니까 덥다고 벗더니 그대로 두고 갔나 봐.”

 

역시.

 

“이번 수업 같이 들으니까 내가 갖다 줄게.”

 

선배인 형에게 옷을 받아 가방 안에 넣고 과방을 나왔다. 참 오래도 입는다. 이기광은 환절기마다 이 남색 가디건을 챙겨 다닌다. 내가 이 옷을 처음 본 게 중학생 때였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입고 다니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주 더울 때나 추울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가방에 넣어 둔다. 아마 남들은 햇수가 오래 되었는데도 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이기광이 물건을 잘 간수하는 편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매년마다 잃어버리기를 몇 번, 같이 찾아다니기도 자주 하고 내가 발견해 갖다 주기도 엄청 많이 했다. 이 옷 뿐 아니라 겨울에는 장갑과 목도리, 여름에는 모자 같은 것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항상 있었다. 물론 그 중 매번 돌아와 준 것은 이 가디건밖에 없다.

 

 

 

유월 초의 날씨답게 조금은 선선했던 오전과는 달리 오후가 되니 햇볕이 쨍하다. 요즘은 강의실도 다 더위에 못 이긴 학생들이 에어컨을 풀가동 시켜놓았다. 적당히 강의실의 중간에서 두 줄 정도 뒤에 위치한 책상에 자리를 맡아 놓았다. 인원이 많은 대형 강의라 그런지 유난히 냉방이 더 강한 것 같다. 더위도 추위도 많이 타는 이기광은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덥다며 손부채질을 하다가도 강의 중반이 되면 몸을 으슬으슬 떨곤 한다. 이제 수업이 시작하기 5분 전인데 아직 오지 않았다. 학교 코앞에서 자취를 하는 이기광은 아침잠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며 하루를 빼고는 모두 오후 수업을 첫 교시로 해두었다. 아마 지금 허둥지둥하며 준비를 하고 있겠지.

 

“요섭아! 야, 진짜 덥다. 너 물 없냐, 더워 죽겠어.”

 

“없어. 야, 너 지금 땀내 나니까 내 옆에 앉지 마.”

 

지금은 시작하기 4분 전이며 방금 들어온 사람은 같은 과 동기인 김기훈이다. 1학년 학기 초에 사람 거절 못하는 이기광이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며 데려왔던 녀석이다.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우리 과제 없었지?”

 

자연스럽게 꺼내둔 내 노트를 가져가 부채질을 하며 물어오는 놈에게 한심하단 눈빛을 보내주고 답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알아듣고는 하하 큰소리로 웃더니 내 노트를 내려두고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꽤 잘 맞아 2학년이 된 지금까지 같이 시간을 맞춰 강의를 듣기도 하고 있다. 이렇게 셋이서 주로 같이 다니는 무리인 셈이다. 대학 와서 사귄 첫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기광과는 중학교 때 처음 만나 같은 동네 고등학교를 나왔고 성적도 엇비슷해 같은 대학교에까지 올 수 있었다. 사실 경제에는 관심이 없어 다른 학교들은 다 경제 관련이 아닌 다른 과들에 지원했었다. 이기광과는 원서를 접수하려던 대학들이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그래서 넣을 곳들을 추리고 남은 딱 한 군데의 기회는 이기광이 가장 가고 싶어 하던 학교의 같은 과로 넣었다. 둘 다 붙는다면 정말 기분 좋게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기광은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나는 몇 년 더 이기광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테니까. 잡담을 조금 하다 보니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작 몇 초 전 이기광이 도착했다.

 

“둘 다 여기 있었네. 나 아슬아슬했다.”

 

아슬아슬했다는 것치고는 해맑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다. 아무 말 않고 앉게 두는 나에게 뒤에서 김기훈이 쟤도 지금 땀나는데 옆에 앉아도 되는 거냐며 무어라 항의했지만 무시해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 걸 보니 엄청 뛰어왔을 게 안 봐도 뻔하다. 곧이어 교수가 출석을 부른 뒤 강의가 시작되었다.

 

“물 마실래? 나 얼음물 있는데.”

 

내가 물통을 꺼내 들며 이기광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자 또 뒤에서 항의의 종이뭉치가 날라 왔다. 이 정도는 별 반응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고맙다며 물을 시원하게 마신 이기광이 물통을 돌려주었다. 너도 마시든가 하며 그걸 바로 뒤로 전해 주자 금방 기분이 풀린 듯하다. 참 단순한 성격이다. 교수가 잠깐 수업과 관련 없는 얘기를 하던 것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 교수가 하는 교양 수업은 그나마 대학다운 수업이라 열중해서 듣게 된다. 나는 담당 교수가 마음에 드는지의 여부에 따라 수업 태도가 많이 달라서 성적이 과목마다 들쑥날쑥하다. 이 과목은 이번 학기에 듣게 된 것들 중 가장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라 열심히 하고 있다. 필기를 하던 중 무언가 소리가 들려 잠시 옆으로 눈을 돌리니 이기광이 펜을 딸깍거리고 있었다. 또 공상의 세계에 빠진 것이다.

 

예전부터 이기광은 자주 그랬다. 수업을 듣다가 혼자서 다른 생각에 빠져서는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곤 한다. 지금처럼 볼펜 버튼을 계속 누르거나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행동들. 가끔은 알아볼 수 없는 낙서를 하고 있기도 한다. 언젠가 별 생각 없이 너 이런 버릇이 있다며 얘기를 꺼냈더니 엄청나게 미안해했었다. 자기 행동이 거슬려서 집중하기 어려워졌을 것을 걱정했던 거다. 아마 나는 그때 그렇긴 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는 다음에 또 그러고 있으면 꼭 알려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해주었다. 꼭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그 뒤로는 지금처럼 이기광의 손이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을 때면 움직임을 멈추도록 손등을 톡톡 쳐 준다. 나는 여전히 내 손가락이 그 애의 손등을 스치는 순간이 참 간지럽다. 대학생씩이나 돼서 손 하나 닿는 일이 부끄럽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냥, 그 대상이 이기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기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큰 눈을 천천히 깜빡거린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벌써 몇 년 째 있어 온 일인데도 한결같이 저런 반응인 이기광이 참 귀엽다. 나는 살짝 웃어주고 입모양으로 집중이 안 되냐고 물어보았다. 그제야 깨달은 이기광은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내 검지 손가락 끄트머리를 두어 번 쓸어보다 다시 필기를 시작하였다.

 

수업 중반쯤이 지나가자 역시나 추워졌는지 이기광이 팔을 쓸어내리다 가방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가디건을 찾고 있는 거겠지. 책상 가방걸이에 걸려 있는 채로 찾다가 보이지 않는지 들어 올려서 구석구석 찾아본다. 바로 줄까 했지만 열심히 뒤적거리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워 조금 더 모르는 척 지켜보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행동이 멈춘 것을 보니 아마 어디다 놨었는지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다. 정말이지 이기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쉬운 사람이다. 그 앞에다 자연스럽게 가디건을 꺼내 놓으니 왜 이걸 네가가지고 있냐고 물어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웃고 싶어진 것을 애써 참으며 내 공책 구석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냐]. 그러자 곧바로 그 옆 편에 펜을 대고 손을 움직인다. [고마워^-^]. 정말 이기광답다.

 

 

 

학기말 과제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한 뒤 수업이 끝났다.

 

“나 잠깐 과제 질문 좀 하고 올게.”

 

알겠다는 둘의 대답을 듣고 교수에게 가서 질문을 했다. 간단한 질문 하나를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상담을 할 기세로 지금 과제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됐으며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자꾸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봤자 십 분 정도였지만 강의실 안에는 이미 나 외에는 학생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연강이 있다며 둘러대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복도 창가 쪽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김기훈이 보였다.

 

“이기광은?”

 

“아, 기광이 이따 저녁에 소개팅 있어서 먼저 갔어.”

 

“소개팅?”

 

소개팅이라니? 여전히 김기훈은 핸드폰 게임에 눈을 두고 손을 바삐 움직이느라 대답이 느릿했다. 살짝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재차 갑자기 무슨 소개팅이냐며 묻자 되려 김기훈이 기광이한테 얘기 못 들었냐며 나에게 느릿느릿 물어온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웬 소개팅인지 묻고 있는 것은 나인데. 얼굴을 아주 핸드폰 화면에 묻어버릴 기세이길래 결국 핸드폰을 낚아챈 뒤 다시 질문을 했다. 잠시 양요섭 성질머리하고는 정말, 하며 불평하던 김기훈이 이내 제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김기훈의 카톡 프사에 있는 사진을 보고 관심이 있다며 소개시켜달라는 동창 여자애가 있어 물어 봤고 흔쾌히 응한 이기광이 오늘 그 여자애를 만나러 나간 것이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기광이 여자를 만난다는 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그러냐고 말한 뒤 이기광의 다음 수업을 대리 출석해주기로 했다며 가는 김기훈과 헤어졌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전화를 한 통 걸었다. 전화를 건 상대는 뻔했다. 걸어가는 길 내내 생각할 수 있던 건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이기광, 너 오늘 소개팅 한다며 하고 얘기를 시작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딱 이기광이 들떠 보이는 만큼 내 마음은 욱신거렸다. 입 밖으로 술술 나오던 거짓말들의 끝자락에서야 입안을 맴돌던 말들 중 하나를 겨우 얹어볼 수 있었다. 왜 나에겐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얘기했어야 했나? 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기광이 저 말을 뱉은 데에는 별 뜻이 없었겠지만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가 많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주 당연할, 연인 같은 사이는 아니니까. 항상 궁금해 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현실이 갑작스레 다가왔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생각하느라 뜸을 들이다가 장난스레 섭섭하다며 어쨌든 잘하고 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루 종일 이기광에 대해 생각하고 설렜던 자신이 한심했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도 이만큼 키워 온 마음이었지만. 이렇게 이따금씩 우리 사이에 있는 유리벽이 보일 때면 내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진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몇 시간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 손 검지 끝을 쓸어 보고 있었다.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어 손을 베개 밑에 묻고 머리를 뉘어 버렸다. 내일 학교에서 만나면 소개팅에 대해 듣게 되겠지. 그런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다. 과연 적당한 반응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을 멈추기 위해 벽지에 있는 줄무늬를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온다 했었나. 오늘은 하루 종일 맑을 거라 했던 것 같은데. 소나기인가 보네. 점점 더 비가 굵어지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이기광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김기훈에게 들은 바로는 감기 몸살이 났다고 한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가방에 들어있던 우산을 그 여자에게 빌려주고 집이 가까우니 괜찮다며 역까지 바래다 준 뒤 본인은 그냥 집으로 뛰어갔다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더 만날 생각이구나. 이제 점점 날씨가 변덕스러울 테니 우산을 챙겨 다니라며 가방에 넣어 줬던 건 이기광이 괜히 아프지 않길 바라서였는데. 더군다나 주선자였던 김기훈에게 전해들은 그 여자의 말로는 카페에서 조금 춥다 했더니 가디건도 빌려 줬는데 깜빡하고 그대로 입고 와버렸다는 것이다. 비가 쏟아져 우산을 빌릴 일이 없었어도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거겠지. 자기도 에어컨 바람이 추웠을 텐데, 착하고 순진한 이기광. 그 가디건 고이고이 모셔서 이런 데에 쓰일 줄 알았으면 내가 그렇게 매번 열심히 찾아다 주지 않았을 건데. 나 혼자 속이 타서 이기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수업이 끝나고 약국에 들렀다. 약을 샀으니 가져다 줘야겠지. 멍청한 양요섭. 감기몸살이야 기껏해야 이틀 조금 앓으면 나을 건데 계속 눈에 밟혀서 안 보러 갈 수가 없다.

 

전화를 몇 번이고 해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제대로 아픈 것 같다.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긴 뭐해서 간다는 얘기 정도는 해놓으려 했는데, 전화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일까 발걸음이 빨라졌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가자 침대 위에 이불 속에 있는 인영이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속이 탄다. 평소에 상비약도 제대로 구비해두지 않는 탓에 분명히 감기약 하나도 먹지 않고서 앓고 있는 것일 거다. 이기광은 온도 변화에 민감한 만큼 감기도 잘 걸리는 편이다. 매번 환절기마다 훌쩍거리고 있었는데 이번엔 비까지 흠뻑 맞아서 끙끙대고 있으니 내가 다 괴롭다. 종류별로 감기약을 하나씩 사오길 잘한 것 같다. 몇 번 불러도 반응이 없어 억지로 흔들어서 깨웠더니 상태가 영 몽롱하니 안 좋아 보였다. 약이라도 먹고서 자라는 말에 대답은 겨우 하는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에 일으켜 먹여주고 다시 자도록 두었다. 밥도 못 먹었을 게 분명한데 계란죽이라도 끓여놓고 가야겠다.

 

서툰 솜씨로 죽을 겨우 끓여 놓고 잠시 침대 가에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빙글 돌아 앞을 보니 약 기운이 도는지 숨소리가 조금은 편해진 듯한 이기광이 보인다.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에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

 

“이기광.”

 

깊이 잠들었는지 한 번 불러본 이름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우산도 가디건도 다 걔한테 줘 버리면 어떡해.”

 

네가 이렇게 아픈 것도 속상하고 바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조금 부러워지는 내가 싫어지잖아. 마음을 깨달았던 시점부터 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 왔다. 처음부터 이기광과 나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며 언제든 다시 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나중을 예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어려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같이 자라났다.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이상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날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몇 년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누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욕심이 생겨나고서는 겁이 났다. 혹시라도 이기광이 이런 마음을 알아채고 멀어지면 어떡하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이기광의 이름만 부르는 일이 없게 된 것은. 혹시라도 기광아, 하고 부르면 나조차도 감당 못할 마음이 다 새어 나와 버릴 것만 같아서.

 

“기광아.”

 

듣지 못할 것이란 구실로 가벼이 불러 본 이름에 너무 많은 감정들이 들어 있어 말끝이 살짝 떨려 왔다. 아, 내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 커졌나 보다. 몇 년 동안 꾹 눌러 담아 왔던 마음이 다 여기에 있었구나. 그 이름 하나에 너무 많은 다정함이 물들어 있어 가슴께가 시리다. 그저 지나갈 사랑으로 두기에 너는 내게 너무 크다. 그래도, 너를 위해서 묻어 둬야겠지. 아니, 사실은 내가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쏟아내고 갈게.

 

“기광아, 아프지 마.”

 

너도 나도, 안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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