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양요섭x이기광
by. 요한 (@tb_avsb)
"으아ㅡ 기광아"
오늘도 흐물흐물 녹아가는 양요섭.
"살려줘어."
곧 수명이 다 할 듯 달달-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에 의지한 양요섭.
"더...워."
다잉 메세지야 뭐야.
"...토끼는 외로우면 죽어"
뭔 개소리지.
"요서비는 더우면 주거..."
완벽한 개소리다.
여름
양요섭x이기광
w.요한
여름 혐오 증후군, 나는 매년 여름마다 양요섭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었다. 지독하게 더위를 타는 녀석은 여름만 되면 곧 죽어가는 듯 시한부 시늉을 했다. 그 좋아하던 체육시간을 죽은 사람처럼 그늘 아래에서 누워서 시간을 떼운다거나 종 만치면 주인 마중 나가는 개처럼 뛰어가던 급식 실도 맨 마지막에 아주 느리게 갔으며, 최대한 교실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물까지 안마셨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만나는 뒷 쪽 자신의 자리에서 그저 숨만 붙어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광은 혀를 찼다. 양친놈.
교복은 무슨, 와이셔츠는 벗어 던진지 이미 오래전이고, 바지는 체육복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저 뒷자리 백수는 누구냐며 놀렸지만 딱히 크게 제지는 하지 않았다. 더위를 심각하게 타는 양요섭이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봄가을겨울에는 미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양요섭이 유일하게 조용해지는 계절, 선생님들은 그 모습을 신기해했고 내내 책상에 엎드려 죽은 사람 시늉하는 모습에 저 자식은 혼모노(진짜)라며 박수를 쳤었다. 뭐 이것도 양요섭이 교내에서 꽤나 이쁨 받는 학생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야 양요섭"
"...응"
"정신 차려,"
집 가자. 기광의 말에 요섭은 느적느적 고개를 들었다. 정말 여름이랑 전생에 웬수를 지었나 양요섭은 여름만 되면 꽤나 야윈다. 그게 좀 신기했는데 오늘은 불쌍하기 까지 했다. 오후 수업 내내 잠을 잤는지 잔뜩 뻗힌 요섭의 앞머리를 기광이 눌렀다. 정신 좀 차려. 멍충아. 요섭은 여전히 비몽 사몽한 얼굴로 크게 하품을 했다. 애들은?
"진작에 다 갔지."
"아...그래?"
요섭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기지개를 폈다. 가자. 기광의 건조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
"넌 어떻게 여름만 되면 이르냐"
"그니까."
"병원 가 봐야하는 거 아니야?"
진작에 가봤지. 유난히도 걸음이 빠른 아이였던 요섭은, 유난히 걸음이 느린 기광보다 더 느릿하게 걷는다. 원래 느긋한 걸음걸이였기에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기광도 그 보폭에 맞춰 걸었다. 느릿ㅡ, 느릿ㅡ, 집가는 길은 다른 계절보다 배는 더뎠다.
"걍 체질이래"
"그런 것도 체질이래?"
"응. 그런가봐."
별 이상한 것도 다보겠네. 기광은 햇빛으로 인해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요섭을 한번 보고는 푸흐- 하고 웃었다. 매년 여름만 되면 볼 수 있는 몇 가지 중 하나였다. 여름 한정 찌푸린 얼굴, 흰 티셔츠, 나이키 슬리퍼, 발목 양말. 걸음이 느린 양요섭, 흐물흐물한 양요섭, 축구안하는 양요섭
"야 제발 부탁 하나만 하자."
"아이스크림 먹자고?"
"역시."
엄지를 척 하고 드는 양요섭, 그리고 그게 익숙한 이기광. 어제도 이랬고 그저께도 그랬다. 오늘도 이럴거고 내일도 그럴거고. 아파트 단지 앞에 위치한 작은 슈퍼였다. 편의점으로 도배된 세상에 거의 유일하다 싶은 작은 슈퍼. 우린 항상 그 슈퍼에서 쭈쭈바 두개를 골라 놀이터로 간다. 초등학생들도 안 간다는 텅텅 빈 놀이터. 그곳 정자는 꽤나 시원했기 때문에.
"역시 여름은 탱크보이 아니냐?"
"노노 여름은 빠삐코지."
의미 없는 취향싸움이다. 탱크보이를 찬양하는 양요섭의 손에는 빠삐코가 들려 있었고, 빠삐코를 이야기하는 이기광 손에는 탱크보이가 들려있었다. 정말 의미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정자에 앉아 쭈쭈바를 쭉쭉- 빨아먹고 있으면, 누군가가 항상 이야기한다. 역시, 아이스크림은 쭈쭈바지.
"그래놓고 겨울에는 콘 아니면 안 먹으면서"
"겨울은 콘이고!"
"...뭐래"
요섭은 쭈쭈바를 입에 물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천장까지 잔뜩 낙서가 돼있는 정자. 저 중에 하나 정도는 새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기광이 단호하게 안 된다며 화를 냈었다. 공공기물에 낙서하는 거 아니야. 야아ㅡ 하나 정도는... 안된다고 했지.
노잼 이기광
꼰대 이기광
요섭은 다 먹은 쭈쭈바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었다. 그리고 다시 들이 마시면 쭈굴쭈굴, 다시 내뱉으면 빵빵. 살짝 굽어 앉아있는 기광의 등을 봤다. 안에 티셔츠도 입고 밖에 교복 셔츠도 입었고, 등에 가방도 맸어. 안 덥나.
"그네 타고 싶다."
"그네 타다가 타죽어."
오ㅡ 라임 개 쩌네, 요섭이 말하니 기광이 푸스스 웃었다. 이기광은 웃음이 헤픈 사람은 아니었지만 특이한 곳에서는 참 헤펐다. 남들이 웃지 않는, 오히려 욕할만한, 웃음 코드가 좀 특이했다. 항상 그랬다. 공감은 할 수 없었지만 이해는 가능한. 요섭은 빈 쭈쭈바 봉지를 손에 쥐고 앉았다. 야ㅡ, 이기광
"엉?"
"생각 보다 여름 괜찮은 거 같아."
"...뭐?"
기광은 진심으로 뭔 개소리냐며 얼굴을 구겼다. 양요섭이, 천하에 양요섭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단단히 미친건가.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듯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는 말 그대로, 진지했다.
"진짜 미친 거지"
"아닌데"
"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실화냐구"
여름이 괜찮아? 진짜로? 기광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방금 전까지, 정말 더위로 다 죽어가는 양요섭의 느닷없는 말. 확실히 미친 게 틀림없는데. 하지만 요섭은 태연하게 자신의 팔을 긁적거렸다. 나 진짜 안 미쳤거든?
"그럼 뭔데"
"아니...그냥 갑자기 너무 좋아서"
여기서 누워서 천장 보는데 낙서가 너무 재밌어. 아이스크림도 맛있고. 요섭은 두서없는 말을 꺼냈다. 단어 단어 하나하나가 엮이지 못하고 따로 두둥실 떠다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늘에 뭉게 뭉게 피어나는 조각조각의 구름처럼 단어들이 둥실둥실.
문득, 아주 문득, 지민♡영진 이라는 낙서도 재밌었고, 대민중 수지민지소미 왔다감. 이란 낙서도 재밋었다. 현피떠ㄱㄱ 내번호 010, 가비초 대가리 김철수. 등등 많은 낙서들과, 정자 주변에 무성한 푸른 풀들, 뜨거운 태양아래 뜨거워지는 놀이 기구들. 슬쩍 슬쩍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 두개. 탱크보이 껍질과 빠삐코 봉지의 바스락 소리. 앞에 앉은 가방 맨 이기광. 기광에게 말하지 않았던 수 만 가지의 이유들을 곱씹었다.
"내일도 오자."
"..."
"아이스크림 사줄께."
빠삐코랑 탱크보이.
두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