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이야기
윤두준x이기광
by. 잣 (@GK_9)
“안 나와, 도저히 답이 안 나와. 이거 답 없지?”
“답이 없는 게 어디 있어.”
“답 없는 거? 내 인생….”
멍하니 중얼거리자 프린트에 코를 박고 문제를 풀던 두준이가 푸흐- 웃었다. 어, 드디어 웃었다. 아침부터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이 길래 계속 아무 말이나 종알댔는데. 드디어 웃게 하는 데 성공했다. 두준이의 웃음을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두준이가 몸을 펴고 벽에 기대며 나를 슬쩍 봤다. 많이 덥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집에 불러 놓고 에어컨, 선풍기 하나 안 틀어줬다. 멍청한 이기광. 민망함과 함께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덥지. 에어컨 틀어 줄게.”
에어컨 리모컨을 찾으려 일어나는데 두준이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괜찮아, 하나도 안 더워. 이마의 땀을 대충 닦으며 그렇게 말 하는데, 그 말을 세상 어느 누가 믿을까.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았다. 리모컨을 가지러 가려고 발을 떼는데 두준이가 발목을 잡아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노트와 펜들이 떨어졌다. 아, 정말 아팠다.
“미안해, 넘어뜨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나 너무 아픈데.”
“나 진짜로 괜찮단 말이야. 하나도 안 더워.”
“내 무릎 박살난 것 같은데.”
“에어컨 안 틀어줘도 돼. 진짜 안 더워. 부채질 하면 되지.”
“두준아, 나 넘어졌다니까.”
땀을 줄줄 흘리며 열심히 덥지 않다고 어필하던 두준이가 아, 하고 시무룩해졌다. 내가 바지를 걷고 무릎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니 두준이는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미안해, 괜찮아? 만 반복했다. 아니, 안 괜찮아. 멍들 것 같아. 무릎을 한 번 콕 찌르고 세상에서 제일 아픈 척을 하니까 두준이는 풀이 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기광아, 미안해……. 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그것 보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윤두준의 모습이 참 새로웠다. 더 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쯤에서 툭툭 털고 괜찮다고 했다. 두준이가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떨궜다.
“에어컨 틀지 말자. 나 안 더워. 더워도 참을게. 나 에어컨 싫어해, 그러니까 틀지 말자.”
끝까지 에어컨을 거부하는 두준이가 이상해서 살짝 인상을 쓰고 쳐다봤더니 두준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축 쳐진 눈 꼬리를 보니 순간적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 정말. 나는 윤두준을 이길 수 없나보다.
“그럼 선풍기라도 틀자. 너무 덥잖아.”
내가 한 발 물러서니 두준이는 눈치를 보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너무 더웠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매미가 온 힘을 다해 울어대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작은 방에서 아무 것도 없이 수학 문제 풀기란 고문과도 같았다. 선풍기를 미풍으로 누르고 회전을 시켰다. 오래된 선풍기라서 그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약간 창피해서 두준이를 슬쩍 봤다. 두준이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대충 닦고 있었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뽀삐 왔어?”
“뽀삐가 누구야?”
“멍멍이.”
내가 뻔뻔하게 웃자 두준이도 따라 웃었다. 매일 두준이네 집 앞을 서성거리던 작은 강아지에게 나는 멋대로 뽀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작은 강아지가, 내가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 뽀삐와 비슷하게 생겨서 뽀삐라고 이름 붙인 건데. 아마 절대로 모르겠지. 두준이는 혼자 뽀삐, 뽀삐…, 하고 중얼거리다가 이름이 귀엽다며 웃었다. 나는 괜히 뿌듯해져서 이름의 유래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두준이의 말에 가로막혔다.
“근데 좀 걱정 돼.”
“뭐가?”
“아빠한테 들키면 어떡해? 오늘도, 개 소리가 난다고 그래서 내가 다른 데로 옮겨 놨어.”
“……”
“아빠한테 들키면…”
죽을 지도 몰라. 그 얘기를 하는 두준이는 분명 무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조금 슬퍼보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사실 내가 예전에 키우던 뽀삐는 집에 데려온 지 얼마 안 돼서 죽어버렸다. 깜빡 잊고 목줄을 채우지 않았던 어느 날, 뽀삐는 모두가 잠든 사이 혼자 밖으로 나갔다. 우리 가족은 아침에 일어나 뽀삐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뽀삐야! 뽀삐야!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 없었던 뽀삐는,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뽀삐 주변에는 깨진 소주병 조각들이 굴러다녔고 나는 울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있었다. 내가 마주한 첫 죽음이었다. 뽀삐의 무덤은 유난히 작았다. 우리 할아버지 무덤은 되게 컸던 것 같았는데. 의아했지만 아기 강아지라 그런가, 하고 넘겼었다. 엄마가 무덤에 하얀색 꽃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아무 흰색 꽃이나 꺾어 올려놓았다. 그 때 엄마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이 참 따뜻해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두준이의 동그란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두준이는 흠칫 놀란 듯 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두준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와 짝이 된 그 순간부터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다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