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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

윤두준x이기광

by. 익명

1.

 

 

난 오지랖이 참 넓다.

 

 

 

 

우는 아이 ,힘겨운 노인, 그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해 보일 때면 곁으로 달려가야 직성이 풀린다.

 

주홍빛, 서서히 노을지는 바다를 마주하고 흐느끼는 소년. 광활한 배경을 짊어진 그는 한없이 작아보인다.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간신히 토해내는 울음이 애달파 가슴을 적신다. 견딜 수 없어 걸음을 멈추고 만다.

 

 

“저기, 이거 드세요.”

 

 

자판기에서 유자차를 뽑아 조심스레 건네었다. 갓 뽑아낸 유리병이 따끈따끈하다. 잠시 흐느낌을 멈추더니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는 소년. 뺨부터 턱끝까지 눈물이 줄기지어 흐른다. 탄산음료 캔을 따며 곁으로 걸터앉았다. 귀를 가릴락 말락하는 조금 긴 칠흑색 머리칼, 하이얀 살결에 새빨갛고 두툼한 입술,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내 또래 정도 돼보인다. 얼마나 운 건지 유리병을 꼭 쥔 두 손은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눈물만

뚝뚝 흘려대는 그는 나이답지 않게 처연한 분위기를 냈다. 둥지에서 떨어진 참새새끼 꼴이다.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잔잔한 떨림이 심장의 진동까지 타고 들어온다.

 

 

“괜찮을거예요.”

 

 

 

난 오지랖이 참 넓다.

 

 

 

 

[두광] 해파리

 

 

 

 

2.

 

 

아침의 교실은 고요하다. 출항을 준비하는 배마냥 다들 고개를 파묻고 입술만 뻐끔거린다. 하긴 월요일 아침이니, 다들 피곤하겠지. 드르륵-어깨 위 무겁게 내리 앉은 정적도 곧 깨지고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 무슨 일인지 학생 하나를 꼬리에 단 채다. 옅은 소음에 아이들이 하나 둘, 부스스 고개를 든다.

 

 

“자자, 다들 잠깨고. 오늘은 새 친구가 왔다. 텃세부릴 생각하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어라? 눈이 크게 뜨인다. 저 아이는 어제 저녁 그....서럽게 흐느끼던..

 

 

“이기광이야. 잘 부탁한다.”

 

 

무심하게 소개를 하는 소년. 아니, 이제 기광이라고 불러야하나?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았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무뚝뚝을 넘어 살짝 냉담해보이기까지 하다.

 

 

“어디앉아야 할까. 아, 두준이 옆에 짝이 없었지? 저기로 앉자 기광아.”

 

 

손가락 끝을 좇던 시선이 내게 와 부딪힌다. 살짝 흠칫하는 소년,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책상 위 가방을 던져두고 의자를 끌어 앉는다.

 

 

“저기, 아..안녕?”

“....”

“하하, 우리학교 전학생 일줄이야 생각도 못했네..”

“....”

“어젠 집에 잘 들어갔어?”

 

 

기광의 거먼 눈동자는 낡은 책상을 향해있다. 대답할 기색이 없어 보인다. 어제 일이 창피해서 그런건가, 슬슬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숫기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어제 일은 입밖으로 내지 않을테니 신경쓰지 않아도...말을 끝맺기도 전에 책상으로 떨어지는 고개. 듣기 싫다는 듯 등을 지고 엎드려버린다.

 

 

아..하하,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인가.

 

 

그래, 흐느끼던 모습으로 비추어 보아 너는 나름의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다. 선뜻 마음을 열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 여유를 갖고 천천히 다가가보자, 천천히.

 

 

“우리 학교 지리 알려줄까?”

“....”

“배 안고파? 매점 같이 가볼래?”

“....”

“점심 같이 먹을 사람 있....”

“야.”

 

 

헉, 대답해줬다.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꺾는 기광. 왜인지 미간이 한껏 찌그러져있다.

 

 

“쫑알쫑알 더럽게 시끄럽네. 귀찮으니까 짜증나게 굴지마.”

 

 

...응? 기대에서 한참 빗나간 반응에 잠시 얼이 빠졌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기껏 생각해서 신경써줬더니 돌아오는게 고작 짜증난다는 말이라니. 고분고분하게 위로를 받아내던 소년과 동일인물이 맞는 것일까 의심까지 든다. 나는 오지랖이 넓은 것뿐이지, 남의 싸가지까지 감싸주는 호구는 아니다. 소원대로 신경꺼주자, 이 이상 관심쏟지 말고.

 

 

좋지 않은 일들은 한꺼번에 닥쳐온다. 가령 신발을 새로 살 때가 되었는데 지갑을 잃어버린다거나, 늦잠을 잤는데 엘리베이터까지 고장이라거나. 오늘의 경우엔 꿀꿀한 기분으로 하필 내가 주번이 되어 꽉 찬 쓰레기통을 비우게 된 것이다. 영차, 쓰레기를 들고 걷다보니 생각이 밀려온다. 어쩌면, 어쩌면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는게 당연했을 수도. 전학 첫 날부터 좋지않은 기억을 들쑤셔놓고 떠들어 댄 셈이니...눈치 없는 자식, 탐탁치 않아하는게 눈에 보이는데도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지정된 장소에 쓰레기 봉투를 던져넣었다. 두어 번 소리나게 손까지 털어주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잿빛 콘크리트 바닥 위 붉은 반점이 눈에 띈다. 핏자국 같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주변을 둘러보자 연결이라도 되는듯 여러 붉은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건가, 마른 침을 삼키곤 다급히 발을 옮겼다.

 

 

 

 

 

 

 

 

3.

 

 

 

우울하다.

 

 

 

두려움을 떨쳐내려 바다 근처 학교까지 전학을 왔는데, 기도가 막힌 듯 숨이 턱턱 멈춘다. 아직 변화를 바라긴 이른거겠지. 꾹 참고 견뎌내보자, 그림자를 벗어나보자. 다짐하며 교실에 들어섰건만, 어째 시작부터 꼬인다. 어제 해변에서 날 위로해주었던 아이, 이름은 두준이라고 했다. 이런 건 예상치 못했는데. 무엇이 반가운지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두준. 미안하지만, 인간관계를 쌓을 생각은 없다. 당분간은 기쁨을 누리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것 같아서다. 매몰차게 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니 크게 상처받지 말았으면.

 

 

 

엎드려 있는데도 머리가 웅웅 울린다. 괜찮아 지겠거니 했는데...부표마냥 표류하던 기억은

예고없이 무의식에 고개를 들이민다. 시야가 흐려진다. 어깨가 떨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가르며 떨어진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칼을 집어 들었다. 인적 드문 곳을 찾자.

 

 

 

쓰레기 분리수거장. 시야 속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팔을 길게 그었다. 시뻘건 피가 칼자국을

따라 절취선 처럼 올라온다. 이내 옆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들. 두리번거리다 골목으로

확실히 몸을 숨겼다. 사고 이후 수많은 안정제들을 복용해 보았지만 자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저릿하게 구석구석 몸을 파고드는 고통 위로 덮이는 왠지 모를 해방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하...청승맞은 스스로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잔잔히 흐르는 피에 쓰레기 같은 감정들도 실어 보낸다. 모두 안녕, 안녕. 오늘도 칼을 들고 말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기서 뭐해?”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윤두준, 그 아이다. 피가 흥건한 팔을 황급히 몸 뒤로 숨겼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다 본건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또 너냐? 내가 짜증나게 굴지 말랬잖아! 남이사 뭘하든 신경쓰지말고 갈 길 가라.”

“그래도 그 팔...다친거아냐?”

 

 

좆됐다.

 

 

“참견말고 꺼져.”

“바보야! 피 흘리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딨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너 자해하지?”

 

 

다 봤구나. 묵직한 한마디가 날아와 가슴께에 박힌다.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가 없어서 주먹만 꼭 쥐었다.

 

 

“교실엔 어떻게 가려고. 피 뚝뚝 흘리면서 걸어갈거야? 보건실로 간다 해도 변명은 못할거야. 꽤 큰 상처라 선생님도 눈치 채실걸.”

“....”

“보건실에서 구급상자만 가져올게. 여기서 기다려.”

 

 

말을 마친 두준은 제멋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타닥타닥-희미해지는 발소리를 느끼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짙은 한숨이 나온다. 하필이면 꼬여도 저런 아이랑..피범벅이 된 팔만큼이나

모든 것이 엉망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되돌아온 두준. 잠시 땀을 훔치는가 싶더니 재빨리

구급상자를 연다. 팔 이리줘! 서툴게 닦아내는 휴지 위로 시뻘건 피가 번져간다.

 

 

“아, 아파..”

“그러게 왜 했냐? 중이병이야 너?”

“..닥쳐.”

“곧 있으면 하복 입을거라 상처도 다 보일텐데..기왕 할거면 좀 철저하게 하지 그랬냐. 어우

상처들 좀 봐. 혼자서 얼마나 해댄거야..”

 

 

묵묵히 어설픈 치료를 받아내자니 두준의 집중한 얼굴이 눈에 띈다. 짙은 눈썹 못지않게 선명한 눈매에 곧게 잘 뻗은 콧대. 성격만큼이나 정갈하고 잘생긴 외모다. 말은 퉁명스럽게 뱉고 있어도 걱정하는 마음이 손길에 실렸다.

 

 

“야, 기광이라고 했지?”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삭히는 것보단 나누는게 나아.”

“....”

“도와주겠다고.”

 

 

고맙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한편으론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기분탓인가. 종일 찝찝한 불쾌감에 휩싸여 있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꾸만 날 좇는 느낌. 복도를 거닐 때도, 수업을 들을 때도, 책상에 엎드려 있을 때도. 시선은 집요하게 나를 찌른다. 예고없이 고개를 틀었다. 또 너냐, 시야에 담기는 두준. 눈이 마주친다. 계속 쳐다볼거면 티라도

좀 내지 말던가. 당황한 어깨가 튕기듯 떨린다. 주춤주춤, 부자연스럽게 반대로 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노려보아주었다. 정말이지, 귀찮은 성격이다.

 

 

할 말 있으면 얘기해-끝내 던진 한마디. 몇 교시에 걸쳐 찐득하게 눌러붙는 시선에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대충 눈치만 주면 그만할 줄 알았더니..흘끔흘끔 곁눈질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엎드려 자는 것도, 교실을 나서는 것도. 도무지 신경쓰여서 할 수가 없었다. 잠시간 정적. 두준이 고개를 꺾는다.

 

 

“너 감시 하는거야.”

“뭐?”

“또 피 흘리는 바보 같은 짓 할까봐.”

“...그거 굉장히 거슬리거든?”

“다 네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해서다. 고마워 하라고, 나한테.”

 

 

너무도 당당한 녀석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 잠시 말을 잃었다. 반박하려는 찰나, 선생님의 윽박이 사이를 가른다.

 

 

“어이, 윤두준이 수업시간에 떠드나?”

“아니..선생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고..됐고, 벌로 심부름 하나만 해라. 마치고 바로 교무실로 온나!”

 

 

두준은 무어라 변명을 덧대려는 것 같았지만, 선생님의 태도는 강경했다. 두준의 눈썹이 젖힌다.

실시간으로 울상이 되는 표정이 꽤나 재밌었다. 잘됐다. 잠시 없어진 틈에 화장실이나 다녀와야지.

평생 교무실에 있어라.

 

 

찝찝한 시선이 따라붙지 않은 복도. 원래 당연한 생활인데, 걸리적거리는게 있다 없으니까

이렇게 편할수가! 인간은 정말 단순한 동물인가보다. 문득 심부름을 하고 있을 두준이 떠오른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아이.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나한테 이렇게나 관심을 쏟는걸까. 착한건지, 오지랖이 넓은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물 묻은 손을 위 아래로 세게 털었다.

 

 

“아 씨발.”

 

.

난데없이 들리는 욕설에 자연스레 돌아가는 시선. 눈이 마주쳐버렸다. 죄다 풀어헤친 와이셔츠에 학교인지 밖인지 머리에는 왁스를 잔뜩 쳐발랐다. 포인트는 엉거주춤하게 바짓주머니 속 꽂아놓은 손. 학교에 한 두명 씩 있을 법한, 누가봐도 질 나쁜 양아치였다. 앞으로가 훤히 보인다. 이런 자식들의 행동에는 패턴이 정해져있기 마련이다.

 

 

“물 튀었잖아 새끼야.”

 

 

첫번째, 무작정 시비를 건다.

 

 

“어, 몰랐네. 미안.”

“눈 안까냐? 계속 뭘 야리고 자빠졌어?”

“그냥 보는건데.”

“미친 새끼가...너 내가 만만하지?”

 

 

두번째, 말대신 주먹부터 날아온다. 뻑-둔탁한 소리가 허공위로 흩어진다. 난데없는 큰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꽂힌다. 다들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겼다는 눈빛이다. 개새끼들...뒤이어 턱으로, 옆구리로 묵직한 타격이 들어온다.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지금의 상황이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 것 마냥 느껴져 마음이 편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채 맞기 시작했다. 좆밥새끼가 왜 나대-허세 가득한 말들, 자신보다 약한 것들을 잡는데 혈안인 눈빛. 에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단단히 쥔 주먹이 명치를 노리고 날아온다. 저건 좀 아프겠는걸.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데, 어라. 아프지가 않다.

 

 

“아흐...아파라.”

 

 

양팔을 벌린 채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두준. 뛰어온건지 머리칼이 제멋대로 날아다닌다.

 

 

“이 새낀 또 뭐야? 같이 다구리라도 쳐줘?”

“어허, 입이 험한 녀석일세. 친구끼린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이러면 못쓴다.”

“씨발, 진짜 쌍으로 빡치게 하네.”

 

 

넌 저기로 빠져있어-날 밀쳐둔 뒤 날아드는 주먹을 민첩하게 피하는 두준. 양아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이새끼가 피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두 어번 더 버둥거리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옷가지를 잡아끄는 양아치. 두준의 어깨가 훤히 드러난다. 눈이 크게 뜨인다. 피부 위 희미하게 새겨져있는 크고 작은 칼자국들. 내가 냈던 자해의 흔적들과 비슷하다. 당황한 두준이 손을 쳐내고 세게 주먹을 먹인다. 뻑-일순간 분위기가 술렁인다.

 

 

“되도록 사람은 안 때리려고 하는데, 정당방위인 경우에는 달라.”

 

 

정색하고 계속해서 주먹을 날리는 두준. 뻑, 뻑, 뻑. 여러 번의 소음끝에 양아치가 넘어지는 걸 보고서야 동작이 멈추었다. 꼭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구경났냐는 듯 주변을 훑어보는 두준. 때르릉-마침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저마다의 길로 관객들이

흩어진다. 후...짧게 숨을 뱉더니 웃는 낯으로 내게 다가온다. 괜찮냐는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우린 조금 닮은 걸지도.

 

 

 

 

5.

 

 

오후 한시, 막 점심을 먹고난 뒤 햇살이 제일 따스하게 느껴지는 시간. 대다수의 아이들이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까딱이고 있다. 옆자리, 그 까칠하신 이기광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펜을 꼭 쥔 의지를 잃지 않은 채 눈두덩이가 곱게 감겨있다. 햇빛을 받아 머리칼은 밝은 갈색으로, 뽀얀 피부는 더욱 하얗게 빛이 난다. 앙 다물려 있는 두툼한 입술이 예쁘다. 살랑살랑 머리가 흔들리는 모습이 귀여워 절로 미소가 나온다. 자는 모습은 이렇게 얌전한데, 평소 틱틱대는 성격도 반만 따라갔으면. 저번 일은 정말로 놀랐었다. 자해하는 모습을 보고 유심히 지켜봐야 겠다 생각했는데, 한눈 팔 수 밖에 없었던 그새에 사고를 치다니..가뜩이나 덩치도 작은 놈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얻어터지고 있는 모습을 보자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나가버렸다. 눈을 뗄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잠 좀 꺠라 얘들아..환형동물, 편형동물 같은 거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다 떼고 나왔지? 한번

간단히 읽고 넘어가도록 하자. 34번?”

 

 

기광의 번호다. 어느새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고 있는 기광의 피부를 살짝 꼬집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두덩이가 젖힌다.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는 녀석에게 입모양으로 상황을 알려주었다.

 

 

“네.”

“330페이지 한번 읽어볼까?”

 

 

팔랑팔랑 넘어가던 책장이 멈춘다. 자료로 실려있는 해파리 사진, 어두운 바다 속을 유유히

거닐며 푸른 빛을 반사시키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 무슨 일인가 바라보았더니 어딘가에 초점을 맞춘 눈동자가 아래 위로 흔들린다. 야, 왜그래? 들리지 않는지 기광은 하얗게 질린 손을 하염없이 떨기만 한다. 무슨 일이지?

 

 

“선생님, 기광이가 목이 아프다는데 제가 대신 읽을게요.”

“그래? 그러렴.”

 

 

교과서를 읽어나가며 곁눈질로 바라본 기광은 여전히 불안정해 보였다. 시선을 멀리 던진 채

온몸을 사정없이 떨고 있다. 어디 아픈건가? 아무 대답없던 녀석은 종이 치자마자 밖으로 달려나갔다. 뒤따라 달려나가자 화장실에 도착한 기광의 손에 칼이 들려있다. 날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손목을 향해 겨눈 칼을 아래로 힘껏 내리치려한다.

 

 

“야 이 미친놈아!”

 

 

얼른 팔목을 쳐내었다. 챙강-바닥과 부딪힌 칼이 청량한 소리를 낸다. 고개를 푹 꺾고선 아무 말도 않는 기광. 파들파들 떨던 몸뚱이가 쓰러지듯 넘어지려 한다. 기광을 붙잡고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질 않다. 흐느끼기 시작하는 기광. 구슬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당황스럽다. 차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대로 서있기만 했다.

 

 

“....나 좀 도와줘.”

 

 

겨우 말을 뱉고서 기광은 한참을 더 울었다.

 

 

 

 

 

 

*.

 

 

나는 해파리가 죽을듯이 무섭다.

 

 

 

 

나사가 하나, 아니 우수수 빠진 삶을 살 때가 있었다.

세상은 너무도 지루했고, 정해진 규율 속에 갇혀 살을 사는 것이 피곤했다. 늘 반복되는

생활을 탈피하고 개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료한 삶 속 나름의 재미였다. 주먹질 한번에

무서워서 쩔쩔매는 꼴들을 보고 깔깔 웃어대며 쾌감을 느꼈다. 밥먹듯이 학교를 거르고 툭하면 집을 나갔다. 이기광, 그 때의 내 이름 석자를 논하며 다들 쓰레기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랬던 나에게도 처리할 수 없는, 거슬리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형. 형은 나와 다르게 번듯한 삶을 살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형은 이미 직장을 구해 어엿한 사회인 구실을 했다. 나이 든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많이 챙겼고, 삐뚤어져 가는 나를 보며 바로잡으려 애썼다, 여러 번의 가출 끝에는 항상 형의 손에 끌려와야 했으니 말이다. 형에게는 독특한 취미가 있었는데 해파리를 기르는 것이었다. 형은 물을 무서워해서 바다를 만끽한 적이 없었는데,

그에 대한 대리만족인 것 같았다. 기르기 까다롭다는 해파리를 전용 수조 까지 마련해서 보살필정도로, 형은 애정이 각별했다.

 

 

그 날은 길어진 일탈의 마지막이었다. 친구들과 무리지어 거리에 서 있는데. 익숙한 자동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서서히 문을 열고 발을 딛는 형, 잔뜩 화가 난채로 내게 다가왔다. 평소같으면 체념하고 형을 따랐겠지만, 이상하게 그날따라 반발심이 일었다. 세워놓은 친구의 바이크로 곧장 뛰어 시동을 걸었다. 야, 너..! 형과 친구가 동시에 부르짖었지만 아랑곳않고 페달을 밟았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빵빵-, 크게 울리는 경적소리. 바이크를 보자 형도 곧장 차로 나를 쫓았다. 나도 필사적이고,

형도 필사적이었다. 겨울바람이 살을 엤지만 이를 악물고 페다를 밟았다. 건물이 빽빽히 들이찬 광경이 휑해질 정도로 추격전은 길어졌다. 부아아앙-높아지는 속력에 코끝이 빨개질 때쯤,

얼마남지 않은 연료를 발견했다. 젠장, 왜 하필 이때. 욕지거리를 뱉으며 시선을 돌리는데 꽝꽝 얼어붙은 강물이 눈에 띄었다. 그래, 형은 물을 무서워하니까. 저기라면..갓길에 바이크를 세우고 가드레일을 넘어 뛰었다. 하하, 가슴뛰는 해방감에 웃음이 나왔다. 따라서 차를 세우는 형.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서려있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미안해, 형. 형이 계속 잔소리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놀다 지치면 알아서 들어갈테니까

멋대로 나 찾지 마.’

 

 

꽝꽝 얼어붙은 황토색 잔디를 넘어 얼어붙은 강물 위로 발을 딛었다. 생각보다 미끄러워 단단히 균형을 잡고 섰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형. 주먹을 꼭 쥐더니 가드레일 밖으로 다리를 낸다. 뭐야, 여기까지 따라올 생각인가? 멀리 도망치려 걸음을 옮기는데 엇, 우지끈-하며 영 좋지 않은 소리가 난다. 발을 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얼음이 파사삭 흩어진다. 어어...정면을 향해있던 시선이 아래로 쳐박힌다. 풍덩-투명한 물방울이 공중을 수놓는다. 몸뚱이를 감싸는 영하의 온도에 곤두서는 신경. 물장구를 치며 밖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손으로 잡는 족족 부서지는 얼음에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잔뜩 물을 머금은 옷에 몸이 배로 늘어난 듯 무겁다. 딱딱 부딪히는 이가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알 수 없다. 점차 가라앉는 몸을 느끼는 순간, 물결진 형의 얼굴이 보인다. 힘껏 팔을 뻗는대도 날 잡을 수 없자, 결심한 듯 자신을 물에 던지는 형. 저 멍청이가...물도 무서워하는 주제에..왜... 정신까지 서서히 얼어붙는 듯 눈꺼풀이 무겁다.

 

 

 

왜일까, 형 주위를 둘러싼 크고 작은 기포들이 형이 기르던 해파리처럼 보인다.

 

 

왜일까, 기포들이 형이 기르던 해파리처럼 보인다.

 

 

기포들이 해파리처럼 보인다.

 

 

해파리처럼....

 

 

해파리.....

 

 

 

 

 

6.

 

 

기광은 잔잔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이었어.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서 구조해 주셨거든.”

“...다행이네.”

“아니, 나는 운 좋게 살았지만 형은 그날로 기일이 돼버렸어.”

 

 

아아, 탄식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심정을 이해하려 한들 네 맘처럼 아플까. 감당이 힘들만큼 무거운 과거사에 차마 위로를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인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무겁게 뚝뚝 떨어지는 말들이 가슴에 울려 힘들다. 오늘의 너는 여지껏 보았던 어느 때 보다도 처연하다.

 

 

“결론은, 이런 나를 극복해 나가고 싶어. 도와줘. 보답은 얼마든지 할게.”

“보답은 됐고.”

 

 

기광의 팔을 잡고 소매를 걷었다. 그새 못 보던 상처가 늘었다. 미간이 절로 찌그러진다.

 

 

“이제 자해는 그만하는 걸로 갚아라.”

 

 

해파리 사진을 프린트로 여러 장 뽑았다. 점심시간이면 기광과 되도록 밝은 대화를 이어나가며 함께 사진을 보려 애썼다. 녀석이 쥐고 다니던 칼은 만질 수 없게 꽁꽁 숨겨두었다. 트라우마가 씌인 공포증을 하루아침에 극복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여린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고 양팔에 닭살이 돋아난다. 손을 단단히 잡아주며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너는 자꾸만 형이 떠오른다고 했다. 온갖 공포와 죄책감으로 들이찬 너의 눈동자. 나까지 가슴이 떨려와 되새겼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기광아.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한계에 다다른 듯해 눈앞을 막아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내게로 시선을 돌리는 너. 어금니를 꽉 깨물며 울음을 참는 모습이 애처롭다. 등을 토닥여주었다.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날개 뼈가 바스라질 것만 같다.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는 너. 허공으로 흩어지는 눈물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너는 자연스레 내 품을 찾아 고개를 묻는다. 꽤 친해진 걸까.

 

 

“사실은 나도 너처럼 자해를 했었어.”

“...”

“안보이게 일부러 어깨 같은 곳에 샤샤샥.”

“,,,”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아..그러니까 내말은..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단 거야.”

 

 

가슴께를 간질이는 네 머리칼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난다. 기분 탓일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7.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뙤약볕에, 우린 어느덧 긴팔을 벗어던지고, 반팔로 갈아입게 되었다. 두준의 도움은 생각보다 효과를 주고 있다. 사진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다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던 처음과 달리 조금 머리가 아프지만, 대화를 이어나가며 사진을 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크나 큰 발전이다. 하루하루 해파리 사진을 보다보니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성심성의껏 날 도와주는 녀석의 존재가 곁에서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너는 자신도 자해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너는 정말로 나랑 닮은 존재였어. 죗값을 치르려 그어두었던 선, 어쩌면 너에게만은 지워도 되지 않을까. 네 앞에서는 웃고 떠들고, 그저 즐겁게 지내도 되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에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지. 죽었던 형이 다시 돌아왔다. 눈앞에서 숨을 쉬고 걷기까지 한다.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의지와는 다르게 발이 앞으로 나간다. 아, 안돼. 얼음이 깨진다. 몸뚱이가 고꾸라진다. 풍덩-하는 소리가 난다. 형이 따라 몸을 던진다. 죽은 형은 사라지고, 살아남은 내가 형이 된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형이 기르던 해파리가 시야에 가득 차오른다. 전기를 머금은 촉수가 일제히 나를 향한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눈을 닫으려는 찰나, 누군가 내게로 손을 뻗는다. 너다, 윤두준. 뭐하고 있어, 빨리 잡아! 있는 힘껏 네 손을 잡는다. 일순간 모든 해파리가 제라늄으로 변해 피어난다. 가슴이 쿵쿵 뛴다.

 

 

헉-짧게 숨을 몰아쉬며 이불을 박찼다. 꿈이구나.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는 중이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악몽.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꿈에서 마주친 두준의 얼굴이 뇌리 속에 여전히 선명하다.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문득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 앞으로 그어 둔 선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연락이라도 해볼까, 휴대폰을 집는데 연락할 핑계도 없다. 늘 틱틱대다 갑자기 먼저 연락하는 것도 이상하고. 체념하려는 순간 진동이 울린다. 발신번호 윤두준.

 

 

[ 오늘 만날래? ]

 

 

왔어? 날 발견하고 뒤를 돌아 본 두준이 음료수 한 병을 뺨에 들이민다. 앗, 차거!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잠시 노려보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병을 받아들였다. 센스있게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잘생겼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그러고 보니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구나.

 

 

“갑자기 만나자고 했는데 나와줘서 고마워.”

“아냐, 나도 심심했어.”

 

 

너는 오늘 수족관에 가자고 했다. 개선이 많이 되었으니 종지부를 찍자는 얘기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와 함께였던 날들이 떠올라 아쉽기도 했다. 오늘 아무렇지 않게 해파리를 바라 볼 수 있게 된다면, 너와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지는 걸까.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휘저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냥 너는 날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널 향해있던 시선에 고개 돌리는 너와 눈이 마주친다. 날 향해 손을 뻗어주던 꿈 속 너와 지금의 네가 겹쳐 보인다. 다시 가슴이 쿵, 쿵 뛴다. 먼저 시선을 피했다. 많이 긴장돼? 괜찮을 거야.- 내 속은 알지 못한 채 바보처럼 손을 잡는 너.

 

 

지하철을 갈아타고 나서야 수족관에 다다랐다. 형형색색의 물고기와 신기한 해양생물들. 문어의 빨판이 징그럽다며 달라붙질 않나, 해마가 귀엽다며 한참을 바라보질 않나. 절로 미소가 나왔다. 동물원에 처음 와보는 어린아이마냥 들뜬 너의 모습, 나까지 즐거워져 버렸다. 신이 나서 나의 팔목을 잡고 이리저리 이끌던 네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선다. 저기 있다, 해파리. 부웅- 구름처럼 공중을 유영하던 기분이 일 순간 곤두박질친다. 지금까지 너와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은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내 눈으로 담을 수 있을까. 곤두 선 신경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 바짝 곤두 선 신경이 딱딱히 굳는다. 힘들 것 같으면 돌아가도 괜찮아. 내 표정을 살피며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너. 고개를 저었다. 오늘 포기한다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도망치는 겁쟁이가 될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날 위해 물을 극복해내었던 착한 우리 형처럼.

 

 

괜찮다는 확답을 받아낸 뒤에 너는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눈을 질끈 감고서 억지로 발을 떼었다. 해파리 수조 앞에 멈춰 선 너. 잔뜩 긴장한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자, 지금 등지고 서있으니까 천천히 눈 뜨면서 나부터 보는 거야.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서서히 눈을 떴다.

 

 

기적이라 생각했다. 이상하다. 분명 날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존재였는데. 꿈 속 너의 손을 잡고서 해파리가 일순간 제라늄으로 변했던 것처럼...너와 함께 바라본 해파리는 전혀 무섭지 않았을 뿐더러 일순간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원래 이렇게 생긴 녀석들이었나? 푸른빛을 발하며 유유히 헤엄을 즐기는 해파리들을, 나는 넋을 넣고 바라보았다. 너는 뺨으로 푸른빛을 잔뜩 받아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8.

 

처음엔 나와 비슷한 상처에 이끌렸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점점 너의 상처가 아닌, 네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이것저것 잘 따라와 주는 네가 좋았고, 점차 변해가며 밝게 빛나는 네가 좋았다. 엎드려 자는 너의 머리칼을 몰래 넘길 때에, 심장은 왜 주체하질 못하고 터질 것 같았는지. 폭신폭신하고, 집으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곱게 흩어지는 머릿결이 좋아 혼자 한참을 그러고 놀았다. 보고 싶어서 큰일 났다. 오늘은 주말이고, 널 만날 핑계도 다써버렸는데 어쩌지. 연락이라도 해볼까, 귀찮아하면 어쩌지. 고민 끝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네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몇 번의 전화 연결음 뒤에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 여보세요?-젠장, 무슨 애기 할지 아직 생각 못했는데.

 

 

“어....음...야..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나한테 고마운 거 갚을 기회를 줄게...아, 아니..어, 내 말은 너 자해하는지 안하는지 감시도 해야 하고...”

 

 

망했다. 왜 이렇게 횡설수설 하는거야. 짜증이 나 머리를 잔뜩 헤집는데, 들려오는 의외의 대답.

 

 

“그래, 좋아.”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을 열심히 청소했다. 구석구석, 먼지도 열심히 털고 지저분한 것 없이 쓰레기도 죄다 내다버렸다. ‘대체 뭘 원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오늘 만나자는 애기지? 가까우니까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괜찮아?’-물론 괜찮고말고. 너랑 같이 있고 싶은 것 뿐이니까. 막 걸레질을 끝내자 초인종이 울렸다. 너는 무언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고마운 거 갚을 기회를 준다며.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아무거나 다 사왔어.”

 

 

내게 봉지를 들이미는 너. 봉지 안은 온갖 아이스크림과 과자류로 가득 차있다. 아니,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얼떨결에 봉지를 받아들고서 너를 안으로 들였다. 너는 쭈뼛쭈뼛 발걸음을 딛는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있어. 이것저것 둘러봐도 돼. 만화 책 꽂혀있는 거 꺼내서 봐도 되고...그냥 마음대로 해.”

 

 

너는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훑었다. 한 곳에 오래 시선을 박더니, 이내 질문을 던진다. 네 앨범 봐도 돼?-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앨범을 꺼내어 자리를 잡는 너. 안 본지 몇 년은 된 앨범인데..흥미가 생겨 곁에서 함께 감상을 시작했다. 이건 재롱잔치 때 찍은 사진이고...기억난다. 이건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찍었던 사진. 이 사진, 저 사진 가리키며 간간히 설명을 늘여놓았고 너는 잠자코 들으며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너와 함께 있으니 적적했던 공기부터가 달라진다. 숨길 수 없이 심장이 뛰고, 목소리가 한없이 들뜬다. 자꾸만 사진이 아닌 네게로 눈길이 간다. 가까워진 얼굴에 내 숨길이 네게로 가닿고, 네 숨길이 내게로 와 닿아 서로를 간질인다. 올라가는 입 꼬리를 막을 수가 없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두 손이 부딪힌다. 앗, 정전기. 전율이 찌르르 타고 흐른다.

 

 

사진을 전부 둘러보고 앨범을 책장에 넣는데, 어깨를 툭툭치는 너. 사진 한 장이 앨범에서 떨어졌다며 쥐어준다. 응? 불과 몇 년 전 사진인데 기억에 없다. 옆의 사람은 누구지, 친구?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살갑게 웃으며 투닥거리고 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무언가를, 그것도 사람을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을 끼워 넣었지만 남아있는 찝찝함은 지울 수 없었다.

 

 

 

 

9.

 

 

머리가 세게 부딪힌 듯 아프다. 말없이 이럴 아이가 아닌데, 사흘 째 네가 학교에 나오지 않기에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실은 가출 중이란 얘기를 들었다.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금껏 왜 너는, 내게 한 없이 강한 사람으로 비추어졌는지. 나의 상처만 바라볼 때 너는 속으로 나름의 상처를 알음알음 삭혀온 건 아닐까. 정말 이기적이구나, 나. 지금이라도 널 찾자. 네가 그래 주었듯 상처를 함께 느끼고 보듬어 주자. 이젠 내가 손을 뻗을 차례다.

 

 

무작정 학교를 박차고 나왔지만 아무런 단서 없이 널 찾기란 정말 막막한 일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동네 피씨방이란 피씨방, 룸카페라면 룸카페 있을만한 곳은 죄다 뒤져봤지만 어디로 숨어버린 건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영영 널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 끝부터 뜨거운 숨이 차오른다. 이젠 더 울지 않으려 결심했는데, 눈물이 덜컥 차올라 버리고 만다. 며칠 안 본 것 뿐인데 널 향한 갈증이 차오른다. 그냥 네가 보고 싶었다, 아주 많이. 지쳐 주저 않을까 하던 찰나에 피부에 스며드는 주홍빛. 고개를 꺾어 바라본 하늘은 벌겋게 물들어있다. 일순간 한줄기 기억이 뇌리에 스친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곳, 네가 처음으로 나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던 순간. 노을 지던 바닷가.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지쳐 간신히 옮기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았다. 주먹을 꼭 쥐었다. 제발 그 자리에 있어주길. 가슴 속 정제되지 않는 순수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내게는 네가 필요하고 네게도 내가 필요해. 우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의미한 존재야. 주홍빛 배경을 뒤로 한 채로 그리운 너의 실루엣이 보인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감정의 줄기 속 감정 하나가 확실히 매듭을 짓는다. 목이 쉬어라 짜내듯 외쳤다. 야, 윤두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 끝에 반가운 너의 얼굴이 담긴다. 우뚝, 걸음이 멈춰 서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날 끌어안는 너. 잠깐만, 나 뛰어오느라 땀 장난 아니란 말이야! 등을 쳐대었지만 넌 아랑곳 않고 깊게 날 껴안았다. 너의 심장도, 나의 심장도 너무 빠르게 뛰고 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늘 먼저 다가와 주던 너라 무어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무슨 일이야 대체..학교도 안 나오고.”

“기광아, 나..내가 자해했던 이유를 찾았어.”

 

 

별안간 들리는 무거운 얘기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앨범에서 떨어졌었던 사진 한 장 기억나? 전혀 기억에 없었는데..갑자기 정신이 들더라.”

“...”

“그 사진 속, 죽은 친구가 한명 있었어.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가늘게 떨리는 너의 목소리. 네가 가진 슬픔이 떨림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위로 대신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나랑 정말 친했던 친구였거든. 온종일 함께 구르고 웃던..그러다 어느 날 자살해버렸어. 고작 힘들었다는 유서하나만 남기고선. 죽고 싶더라, 친구라는 새끼가 힘든 것도 하나 모르고...그 후 성격이 바뀌었어. 남들의 아픔을 모른 척 하지 못하게 됐지.”

“...”

“..멍청하게도, 충격이 컸는지 어느 순간 그 친구를 지우고 살았어. 바보 같은 자식, 어떻게 지 친구를 잊냐..아직도 그 아이랑 함께했던 기억이 흐릿해. 이런다고 변하는 게 없는 걸 아는데도..너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었어. 정신 차리니까 무작정 도망치고 있더라고.”

“...네 잘못이 아니야.”

 

 

하하, 넌 실소를 터뜨리며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얘기 못해줘서 미안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찾았으니 됐어.

 

 

“그런데 그거 아냐? 이상하게 정말로, 정말로 네가 날 찾아줬음 하더라.”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짙게 깔린 노을 마냥 뺨이 불타올랐다. 팔을 느슨하게 풀고 내 뺨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려 시선을 부딪히는 너. 가깝다. 부끄러워 붉게 달아오른 뺨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다.

 

 

“...네가 내게 그러했듯, 나도 네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어.”

“내게 넌 이미 가치 있는 존재였어.”

“부끄럽게 그런 말을 왜 해.”

“..내가 그 친구한테 한 가지 더 미안한 게 뭔지 알아?”

 

 

서로 맞물린 심장박동이 부딪혀 펑펑 터진다. 묘한 기분에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나 봐.”

 

 

뺨을 꽉 끌어 쥐고 얼굴을 높게 끌어올리는 녀석. 키 작은 것도 서러운데 얼굴까지 망가뜨리냐, 알았으니까 놔라 놔!

 

 

“내가 느끼는 모든 게 전부 혼란스러운데, 이거 하나는 너무 확실하더라고.”

 

 

...공기를 타고 흐르는 이 기류는 뭘까. 잦아들어라, 잦아들어라. 속으로 꾸준히 주문을 되뇌지만 심장 박동은 점점 증폭되어만 간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너의 얼굴. 어? 자, 잠깐만! 쪽-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무방비하게 내주고 만다.

 

 

“좋아해.”

 

 

일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부끄러운 듯 뺨을 놓은 채 얼굴을 감싸는 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얼굴을 덮은 손을 치우고 힘껏 발돋음을 했다.

 

 

“나도.”

 

 

이번은 뽀뽀 말고, 더 깊게.

 

 

마침내 넌 사고의 순간, 겨울의 시간에 갇혀있던 날 여름으로 꺼내고 만다.

고마워, 내게 여름 같은 존재가 되 주어서. 터진 상처 꿰메고 앞으로는 한 걸음 더 딛길, 한 번 더 웃길.

 

 

내 붉은 뺨에, 네 등줄기에, 맞닿은 우리의 입술에도, 본격적인 여름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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