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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양요섭x이기광

by. 꽝아 (@_KWANGSX)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에서 예고해준 장마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켰다. 젠장. 다른 때는 그렇게 틀리더니 이건 또 잘 맞춰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할 거라는 예고를 해준 기상캐스터의 말만 믿고 우산을 안 가져갔다가 배신당한 기억이 떠올라 요섭은 속으로 질책했다. 고개를 절레 저으며 어느덧 신발을 다 갈아신은 요섭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오늘도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나 있어야지.

"잠깐만, 양요섭!"

어물쩍 발걸음을 떼려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제가 아는 이기광이다.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상체를 숙이고 헉헉거리던 기광이 요섭을 올려다 보며 씩 웃는다. 세이프.

"하여튼 언제나 느린 아이 이기광. 거북이보다 더 느려."

 

"에이, 거북이보단 내가 더 빠르다."

 

요섭의 말에 호흡을 가다듬은 기광이 혀를 빼꼼 내밀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냐. 더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걸 아는 요섭이 픽, 코웃음을 쳤다.

 

"얼른 가기나 하자. 지금 빨리 안 가면 나중에 비 더 와. 신발 얼른 갈아신고. 안 그럼 너 버리고 간다. 5, 4, 3..."

 

"야, 야 잠시만! 어떻게 신발을 5초 만에 신냐!"

요섭이 시간을 재며 재촉하자 기광이 헐레벌떡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리곤 비 오는 날이면 매번 입고가는 우비를 꺼내려는데, 그걸 본 요섭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넌 그거 꼭 써야 하냐? 어차피 우산 쓰는데 뭐하러 써."

"이래야 옷이 안 젖거든? 베-."

기광이 혀를 빼꼼 내밀며 대꾸하자 요섭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오늘도 집에 빨리 가긴 글렀네. 요섭이 푹, 한숨을 쉬며 기광을 쳐다보는데 한쪽 팔에 우비를 걸치지 못한 채 한바탕 씨름을 하는 기광이 눈에 들어왔다. 그깟 우비 하나 못 입어서야 원. 쯧, 혀를 찬 요섭이 결국 기광에게로 성큼 다가가 한쪽 팔을 마저 끼워준다. 무심하면서도 다정하게 저를 챙겨주는 요섭에 기광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역시 나 챙겨주는 사람은 양요섭밖에 없네."

단추까지 꾹꾹 잠가주던 요섭의 손이 멈칫하더니 힐끔, 눈동자를 돌려 기광을 쳐다본다. 아무런 티 없이 맑디 맑은 눈빛이다. 눈에 비를 맞았나. 이제는 초롱초롱해 보이는 기광의 눈동자를 한참을 말없이 응시한 요섭이 이내 마지막 단추를 잠그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한다.

"그럼 나 말고 누가 널 챙기냐."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뿐, 그 안에 어떠한 저의도 없었는지 기광이 입을 다물며 제 단추를 채워주는 요섭을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요섭의 뒤통수가 오늘따라 더 든든하게 제 옆을 자리하고 있었다.

 

"다 됐어. 가자."

 

어느새 기광의 단추를 남김없이 다 채워준 요섭이 숙인 몸을 바로 해 기광을 마주 보았다. 단추가 모두 잠긴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기광을 보고 있자니 제 또래 남자애 같지 않게 꽤 귀여워 요섭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기광에게 그런 마음이 든 게 어쩐지 어색해서 되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본다.

"못난아."

 

"누가 못난이야? 설마 나?"

 

기광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고 자신을 가리킨다. 그 행동에 픽, 웃음을 흘린 요섭이 고개를 저어대는 기광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래, 너. 못난이.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너 엄청 뜬금 없는 거 알아? 내가 왜 못난이인데?"

 

"몰라, 나도."

기광의 반박에 할 말이 없는지 요섭이 모르쇠로 일관한다. 여전히 이유를 알고 싶은 듯,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기광을 마주하고 있기도 한참, 요섭이 별안간 기광의 우비 모자를 기광의 머리 위로 덮었다. 예상치 못한 요섭의 행동에 기광이 버둥거리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렵지 않게 기광을 그 자리에 고정한 요섭이 급기야 모자 밑에 달린 끈으로 기광의 얼굴을 꽉 동여맸다.

"이러니까 좀 낫네. 가자, 못난아."

"못난이 아니거든? 아, 정말. 더워 죽겠는데."

난데없이 얼굴이 질끈 묶인 기광이 툴툴거린다. 우비 모자 틈새로 꽉 찬 얼굴에 불퉁 튀어나온 입술이 의도치 않게 귀여움을 부각해버려 요섭은 그만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가기나 해."

척척 걸어나가는 요섭의 귀는 그 새 조금 빨개져 있었다. 자신이 뭐라 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요섭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던 기광이 뒤늦게 쫓아가 요섭이 쓰고 있는 우산 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래서,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뭘. 내가 못난이인 이유. 못난이니까 못난이라고 하지. ...이왕이면 예쁜이 시켜주지. ...뭐? 못 들었음 말아. 이내 기광의 걸음이 빨라진다. 그의 발에 맞춰, 요섭의 걸음도 덩달아 빨라진다. 어느 새 한 발짝만 내디디면 교문 밖으로 닿을 공간에 둘이 나란히 멈췄다. 그리고 곧, 두 개의 손이 겹쳐진다.

"잘해줄게."

 

"...당연하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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