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at and Beat
윤두준x이기광
by. 달빛 (@itsallabout0330)
아, 덥다.
너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얼굴에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너의 모습이 가까워진다.
눈앞에 김이 낄 만큼 후끈하다.
너의 얼굴이 보인다.
입이 바짝 타들어 간다.
너의 눈동자를 마주 본다.
아, 나의 여름은 오늘도 시작된다.
*
처음 만난 건 개학식 날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교장 훈화에 집중하며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도톰한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마치 강아지가 배가 고파 입을 가만있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내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어느 순간 입술을 꼭 다물더니 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왔다. 당황한 나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런 나와 눈을 맞춘 뒤 긴 눈매를 달처럼 휘며 웃어왔다. 선홍빛 입술이 호를 그리며 벌어졌다.
"교장 재킷에 땡땡이무늬 보이는 것만 74개다."
그때 처음 계절에 맞지 않게 더웠던 것 같다.
이름이 이기광인 그 아이는 공부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고3이라면 대부분이 점점 드리워오는 수능이라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문제집을 장식처럼 펼쳐놓고 예의상 샤프를 들고서는 옆에 앉은 친구 하나하나, 앞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 꼼꼼하게 뜯어봤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 하나,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저 구름 리본처럼 생겼다. 저기 구름은 용가리 같고. 오늘따라 하늘이 복작복작하네."
"어, 그러게. 하늘 예쁘다."
나는 혼잣말하듯 던져오는 말 하나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목소리가 혼자 허공에 남겨지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기광은 예의 그 미소를 띠고는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때 보이는 이기광의 갈색 눈동자가 세상에서 가장 예뻤다.
다른 반으로 떨어진 친구들과 먹다보니,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이기광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오히려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같은 반 친구랑 밥 먹고 학원에서나 보자며 나를 떨구고 가버렸다.
“기광아, 밥 같이 먹으러 가자.”
“어?”
“나 같이 먹을 사람 없어서.”
“... 그래. 나도 혼자인데 잘 됐다.”
이기광은 급식실로 가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걸음이 많이 느린지 계속 뒤처지기에 보폭을 좁혀 걸었다. 몸에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밀려오는 바람이 간지러웠다. 아직 봄인데도 여름에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만 같이 오묘했다.
“두준아, 너 원래 같이 먹는 애들은?”
“걔네는 어차피 학원에서 매일 봐서 밥 같이 안 먹어도 돼.”
“어, 그러면 나 때문에 친구들이랑 안 먹는 거야?”
“아, 아니, 그건...”
말을 흐리는 나를 힐끔 쳐다본 이기광은 내 팔을 슬쩍 주먹으로 건드렸다.
“고마워. 사실 나 작년 말에 전학 와서 친구 없었거든. 이제 밥 먹다 체 안 하겠다.”
학원이 휴강을 했다. 중간고사도 끝난 후의 금요일이라 그런지 반 애들은 불금을 즐기겠다며 고3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는 하교했다. 한창 날씨가 좋을 때라 야자는 하기 싫은데 나만 꼼짝없이 학교에 갇혀있어야 하는 게 실망스러웠다. 체념하고 서랍에서 수능특강을 들고 와 자리에 앉는데 이기광이 책상에 볼을 맞대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너 하기 싫지?”
“하기 좋은 사람이 있을까?”
“너는 항상 하고 싶어 보였는데. 아니었구나.”
“응. 나 공부 싫어해.”
“근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해?”
“해야하니까. 그럼 넌 왜 안 해?”
“난 안 해도 되니까.”
왜라는 물음을 하려는 순간 이기광이 내 손을 잡았다. 달아오른 내 손에 비해 차가운 손가락이 감싸왔다.
“그럼 오늘 째고 놀래?”
나는 그 입꼬리 잔뜩 올라간 입술을 보고 홀린 듯이 가방을 챙겨 따라나섰다.
시원한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아직 일탈 한번 해본 적 없는 고3 둘이 갈만한 곳은 한정적이었다. 막상 학교를 나오니 어딜 가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나는 멀뚱멀뚱 서서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이기광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생각의 실타래를 따라가는 투명한 눈동자만 봐도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이따금씩 눈동자를 덮는 눈꺼풀을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유려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콧날과 입술은 조각이라도 한 듯 완벽했다. 도톰하고 탱탱한 입술은 손가락으로 한번 튕겨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림처럼 잘생긴 귀도 한번 깨물어보고 싶었다. 귓바퀴가 약간 붉은 걸 발견했을 때 이기광이 입을 열었다.
“한 판 붙을래?”
학교랑 제일 가까운 피씨방에 들어서자 중학생들로 가득 차 욕이 난무하고 있었다. 딱히 그런 분위기에서 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기광의 손을 다시 잡고 오락실로 향했다. 오버워치를 못해 아쉬워하던 이기광은 다시 방방 뛰며 오락실을 휘젓고 다녔다.
좀비가 쫓아오는 게임에서 서툰 사격을 하다 죽은 이기광은 계속해서 라운드를 이어가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기광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헤집고 다니는 게 느껴졌다. 목에서부터 열기가 몰려왔다.
“두준아, 너 진짜 잘한다. 너 군대 가서 사랑받겠다.”
“거기서는 딱히 사랑 안 받고 싶은데- 우오씨-”
이기광은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일일이 다 설명하며 군대 가서 사랑받아야 2년 잘 버틸 수 있다고, 꼭 사랑받으라고 재잘거렸다.
“근데 너 진짜 잘생겼다. 너 대학 가서 인기 많겠다.”
크아악-
“......”
“어, 뭐야. 죽어버렸네. 딴 거 하자, 두준아.”
내가 왜 멈췄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더 할 수가 없었다. 게임에서 죽었는데도 이기광의 뒷모습을 보면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귀에 울리는 맥박이 천둥마냥 커졌다.
지긋지긋한 학교 축제였다. 매년 겪으면서 느꼈지만, 우리 학교만큼 엉성하고 조잡한 학교 축제는 없을 것 같았다. 실속 없는 동아리 전시들과 땡볕에서 고통받는 공연들. 그래도 좋다고 후배들이 깔깔거리며 학교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우리는 3학년이란 이유로 교실에 갇혀있어야 했다.
나는 약간 밀린 문제들을 풀며 얼마 안 남은 6월 모의고사를 준비했다. 요 며칠 내내 꿈에 이기광이 나오는 바람에 정신이 어리벙벙해져 계획한 공부를 밀리고 말았다. 그 내용들이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도 하루종일 떠오르고 공부를 못 할 정도로 심장이 버거웠다.
그때 화장실 가느라 잠시 비어있던 옆자리 의자가 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털썩 주저앉으며 생긴 바람이 내 허리께에 머물렀다.
“아, 이건 고문이야.”
“왜?”
“다 노는데 우리만 이렇게 처박혀있는 게 말이 돼?”
“그 우리가 400명이 넘으니까 괜찮아.”
“치.”
공부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하는 펜이 종이 위에서 춤추는 게 눈 구석으로 보였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것도 느껴졌다. 내가 반응해주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꿈으로 괴롭힌 장본인이기에 마음이 좋게 먹어지지 않았다. 이기광에게 맞춰주면 뭔가 진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이기광은 그렇게 한참을 눈치를 보더니 결국엔 먼저 입을 열었다.
“내 꿈에 너 나왔다.”
“어?”
“니가 내 꿈에 나왔다고. 꿈에 바라는 게 나온다더니 요즘 니가 너무 차가워져서 그랬나 봐.”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꿈 하니까 괜히 찔렸다. 내가 자신 꿈을 꾼 건 전혀 모를 텐데 뭔가 눈치챈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내가 모른 척해서 그렇지 꿈은 무시 못 할 내용이었다. 매번 비슷한 전개였다. 내가 어딘가에 있으면 이기광이 언제나 옆에 있었다. 그곳이 구름 위든 바다 속이든 내 집이든.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었다. 항상 내 손보다 시원한 손이 사이사이 얽혀있었다. 그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하면 언제나 이기광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번 벅찬 표정으로 그 예쁜 얼굴에 입을 맞췄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위에, 반듯한 이마 위에, 날선 콧대 위에, 그리고 오늘은 그 도톰한 입술 위에.
“니가 내 손을 잡고 골목 사이를 계속 끌고 다니는 꿈이었어. 데려가고 싶은 데가 있었나?”
“아, 진짜? 신기하네.”
“... 그러니깐 나한테 차갑게 하면 안 돼. 나한테 너밖에 없단 말이야.”
조심스레 들려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멋쩍은 듯이 웃고 있는 이기광이 눈에 담겼다. 며칠을 꿔온 꿈처럼 살짝 올라간, 익숙한 입꼬리가 내 마음을 간질거렸다. 괜히 귀 끝이 달아오르고 입이 말라왔다. 아직도 눈에 선한 꿈처럼 짧게나마 입 맞추고 싶었다.
기말이 끝나고 방학까지 붕 뜨는 날 중 하나였다. 후덥지근한 학교보다는 독서실이 공부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아 다른 애들처럼 나도 저녁만 먹고 하교하는 날이 더 많아졌었다. 그 날도 평소처럼 가방을 싸서 반을 나서려는데 이기광이 팔짱을 끼어왔다.
“두준아, 나랑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독서실까지 데려다줄게.”
“안 데려다줘도 돼. 내가 애도 아니고.”
“이 형아가 너 지켜줘야지.”
“그게 뭐야. 누가 보면 내가 널 지켜줘야 한다고 하겠다.”
“뭐래. 잔말 말고 가자. 이기광이 쏜다, 쏜다, 쏜다!”
내 팔을 감싸고 있는 시원한 팔이 느껴졌다. 남자애가 앵겨오면 싫을 법도 한데 이기광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이 평생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따금씩 부딪히는 몸이 그렇게도 좋았다.
내가 사겠다는 걸 이기광이 우겨서 산 아이스크림은 정말 달았다. 쪽쪽 빨아가며 먹고 있을 때 이기광이 뭘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주황색 파이리 얼굴이 박힌 부채와 라인프렌즈 곰돌이가 새겨진 미니 선풍기였다. 그 옆에는 판다가 잔뜩 그려진 아이스팩들이 뭉치로 있었다.
“내가 포장을 잘 못해서...”
“이건 왜 주는 거야?”
“시험 기간이라 니 생일 그냥 축하한다고만 하고 넘어갔잖아. 생일 선물이야.”
내가 쳐다만 보고 있자 민망한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귓불이 발갛게 물드는 것도 보였다.
“너 몸에 열이 많길래... 싫음 말아라-”
“고마워.”
뻘쭘한지 아랫입술을 깨무는 걸 보았을 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장벽이라도 되듯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선물들을 어디로 치우고 더 붙고 싶었지만, 그것도 다 이기광이 나를 위해 준비한 거라 생각하니 아무 상관 없었다. 당황했는지 굳어버린 몸이었지만 보들보들하고 따스한 감촉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기광아, 정말 고마워.”
“... 별 거 아닌데 뭐.”
“난 니가 정말 좋아.”
“... 나도.”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 안 그럼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야.”
평소와는 다른 말들과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평소와 달리 숨기지 않은 내 진심이 이기광에게 똑같이 전해지고 있길 바랐다. 무슨 소리냐며 밀어내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내 품에 갇힌 팔을 바르작댈 때마다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소심하게나마 내뱉은 내 마음을 제발 알아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한참의 사투 끝에 내 품을 빠져나온 이기광의 두 팔이 내 허리께를 감쌌다. 여전히 선물은 두 손에 쥔 채로 둘 사이의 틈이 없게끔 꽉 껴안았다. 그리곤 턱을 내 어깨에 살포시 얹으며 완전히 내게 몸을 맡겨왔다.
“그래.”
항상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이기광의 체온이 처음으로 달아오른 내 체온과 같게 느껴졌다.
*
늦은 밤 우리는 골목길을 손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빛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드문드문 이어진 가로등이 우리의 발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어도 해가 떨어지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주변에 가득했다.
너는 웃고 있었다.
하루 언제든 봐도 질리지 않는 그 미소가 내 심장을 간질거렸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잔뜩 온몸을 감쌌다.
너는 그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너의 미소 위로 입술을 겹쳤다.
우리는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