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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랑이었을, 시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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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건
BGM 꼭 들어주세요.

 

 

 

어렸을 적부터 난 두려움이 많았다. 새로운 시작이 무서웠고, 홀로 가야 하는 것들이 싫었다. 옛말처럼 돌다리도 두드린 후에 걷는다고 신중하다며 칭찬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반면에 애가 애같지 않다는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들었던 나는, 신중한 만큼 소극적이고 소심했다. 그랬기에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내밀어진 손조차 잡지 못하고 후회하는 열 아홉의 끝자락.
나는 그렇게 첫사랑을 스스로 버렸다,

 

 


아마도 사랑이었을, 시간에게
양요섭x이기광

 

 


"지겹지도 않냐?"
"왜 또 시비야-"
"너네 허구한 날 붙어 다니는 거 말이야."

 

보는 내가 질리는데 너네는 물리지도 않냐고. 밖에 축구 경기를 하는 애들을 보던 두준이 쭈쭈바를 입에 물고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촛점없는 눈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던 기광은 입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딱- 부러트렸다. 굳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저와 요섭이 자주 붙어 다니긴 했어도 지겹거나 질린다는 감정은 느껴본 적 없는데,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하던 기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딱히 그런 적 없는데?


난 우리누나 아침마다 얼굴 보는 것도 질리던데ㅡ. 제 책상에서 뒤돌아 앉아있는 두준이 얼굴을 구기며 기광의 책상에 엎드렸다. 입에는 빈 쭈쭈바에 바람을 넣다 말았다 넣다 말았다를 반복하며 웅얼거린다. 종강하더니 허구한 날 집에 있겠다며, 마주치면 자꾸 공부하라고 잔소리해서 열 받는다고. 한참이나 구시렁거리는 두준을 보며, 갑자기 누나한테는 왜 시비야. 기광은 누워있는 두준의 정수리를 콩딱- 때리며 말했다.

 

"너랑 나도 맨날 만나잖아."
"그게 같냐?"
"뭐가 다른데."

 

그야 너네는, 씨바-, 거짓말 좀 보태서 똥 쌀 때 빼고는 다 붙어있잖아. 가족이라도 그 정도 같이 있으면 존나게 싸우고 손절한다고. 나 봐봐 누나랑 이미 손절각이야. 축구하는 탓에 흙먼지 일어나는 운동장을 보던 두준은, 순간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기광에 팔을 툭툭- 쳤다. 두준의 말마따나 요섭과 기광이 붙어 있는 시간은 꽤 긴 편이었다. 같이 등교하고 쉬는 시간에 만나고 점심같이 먹고 같이 하교하는 순으로ㅡ, 그리고 하교 후에는 같이 독서실에 가거나, 요섭이 알바하는 날이라면 그 가게에서 공부하면서 기다린다거나, 그리고 나서 같이 저녁 먹고 헤어졌다. 주말도 그때그때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갔다. 만나서 공부하고 밥 먹고 각자 할 일 하면서도 웃기게도 늘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기광은 두준의 질문처럼 한 번도 지겹다거나 서운하다는 생각 해본 적 없었다. 오히려 하루가 짧으면 짧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미친놈아 너 양요섭이랑 사귀냐?"
"아 뭐래."
"그게 사귀는 거 아니고 뭔데"

 

그게 왜 그렇게 흘러가냐며 인상을 쓴 기광에 두준은 어휴, 어린것들이랑은 이야기가 안된다며 기광에 책상에 누워있던 몸을 돌려 제 자리에 똑바로 앉는 두준의 등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고작 몇 달 빨리 태어났다고 지랄은. 흥이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한 창밖을 바라봤다. 눈부실 정도로 뜨거운 여름의 하늘이었다. 그럼에도 후텁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 좋았는데, 저 투덜이 윤가놈이 다 망친거같았다. 양요섭이랑 내가? 하 참나, 어이가 없어서.

 

양요섭은 나랑은 달리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었다. 가치관도 뚜렷하고 미래의 대한 목표가 정확하게 있어 모든 것들의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 타입이었다. 시작을 무서워하는 매사에 소심한 나랑 정반대의 타입, 한번 정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멋있어서, 내가 먼저 쫓아 다녔다. 일종의 자극제처럼, 나도 너를 닮고 싶다는 이유로. 항상 앞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열 일곱살의 이기광은 양요섭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동경하는 거 같아. 춘추복을 입었던 가을 저녁,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그네에 앉아 이야기했고, 요섭은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렇게 지금처럼 친해졌다. 나는 너를 닮아 조금 더 나 스스로가 단단해지길 바랬다.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닌 사람으로.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왜 윤두준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기광ㅡ 양요섭이 너 보는.."
"야 기광아, 나 체육복 좀"
"그럼 그렇지, 광부찾으러 양부 오셨네-"
"왜 지랄이야?"

 

두준의 말이 끊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뒷문에 주인공은 점심시간 내내 미친것처럼 달리던 양요섭이었다. 운동장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온몸이 땀과 수돗물 범벅인 요섭은, 하복 상의를 손에 쥔 채로 두준에 등짝을 때렸다. '네가 안 나와서 졌잖아, 개놈아!' , '아! 오늘 더워서 싫다고!' '라며 투덕거리는 둘을 보며 기광은 가방걸이에 걸려있던 책가방을 뒤적였다. 요섭이는 내가 체육복 챙겨온 거 귀신같이 아네. 어제 세탁해 보송보송한 체육복을 건넸다. 

 

"아 빨아서 내일 줄게"
"그냥 줘도 돼."
"오늘 이거 입고 갈꺼거덩"

 

알바까지 헤헤.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는 요섭의 개구진 표정에 기광도 역시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구며 키, 심지어 신발 사이즈까지 비슷해서 체육복이나 운동화를 빌려도 서로한테만 빌렸다. 허구한 날 그렇게 붙어있는 모습에 주변 친구들은 부랄 두짝마냥 붙어 다닌다고 양부광부(뜻은...) 이라고 불렸다. 둘 중 누구 하나 떨어지면 큰일 난다며, 주변에서 서로 붙여주기도 하는 그런 사이었다.

 

"근데 내일이 방학식인데 체육복 들고 오려고?"
"귀찮나?"
"아니 상관없는데."

 

그래 그럼. 요섭은 기광의 머리를 헝크렸다. 야-- 윤두주니 울 기광이가 괜찮다잖아. 한참이나 별거 아닌 것들로 둘이 투닥거린다.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하는 짓이 꼭 소(小)동물같이 구는 윤두준과 그런 윤두준을 잡아먹을 것처럼 장난치는 양요섭이 만나는 게 웃겨서 풉-. 하고 웃어버렸다. 

 

"어쭈 웃냐?"

 

살랑- 열린 창밖으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해사하게 웃는 기광의 얼굴을 향해 두준은  허공 주먹질을 해댔지만, 요섭은 미묘한 얼굴로 기광을 바라봤다. 기광은 두준의 허공 공격을 막느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요섭은 꽤 오랫동안 말없이 기광을 보다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어딘가 간질간질한 표정으로 두준과 장난치는 기광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나간다?' 라며 요섭은 기광의 교실을 떠났다.


덕분에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다듬으며, 그 흰 티를 입은 뒷모습을 뒷문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그러니 '양부가니까 서운하냐?' 라는 두준의 말에 엿이나 먹으라며 얼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새파란 하늘의 하얀 구름이 둥둥,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태양과 소란스러운 교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들. 묶어놓지 않아 흔들리는 커텐, 내 앞에 바보 같은 윤두준, 그리고 흰 티를 입은 양요섭. 매미는 울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 중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후텁지근하고 미묘하게 상쾌한 그런 날 같은 느낌이다.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고, 귀 끝이 따가운 그런. 기광은 큼큼- 하며 목소리를 다듬으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으면서. 

 


-

 


'양요섭이 너 보는 눈빛이,'
"좋아해."
'약간, 다른 애들이랑 다른 거 알긴 아냐?'
"..."
'알 리가 없지. 이 세상 제일 둔탱인데.'
"...미안해. 기광아"

 

기광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요섭의 흔들리는 눈빛이 애처로워 차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급작스럽게 튀어나온 고백, 침 한번 삼키기도 벅찬 분위기가 요섭과 기광의 사이를 갈라버렸다. 기광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버렸고 요섭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기광에게 등을 보인 채 달렸다. 이기광은 소심하다. 그리고 신중하다. 또 두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도망치길 선택했다. 양요섭같이 나 스스로가 단단해지길 바랬지만, 우습게도 이기광은 역시나 도망쳐버렸다. 

 

양요섭이 세탁한, 녀석의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는 자신의 체육복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손에 꾹- 쥐었다. 바보- 멍청이- 이 겁쟁이-. 눈물이 바닥을 향해 뚝뚝 흘렀고 그 눈물은 시멘트 바닥을 짙은 회색으로 적셨다. 셀 수 없이 많이 흐르는 방울방울이 볼을 타고 턱 끝을 적시고 기광의 소매 끝을 축축하게- 만들었고 끄끝내 바닥을 변하게 했다. 숨 쉬는 게 힘들었다. 간지러웠던 목 언저리가 이제 아팠다. 따갑던 귀끝이 터질 것같이 두근거렸다. 

 

요섭의 얼굴에서 보였던 고백은 명백하게 실수였지만, 급작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단단했었다. 하지만 꾹꾹- 눌러 담은 문장이 멍청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급하지만 응축된 감정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놓은 그 범인은, 자신, 바로 이기광이었다. 잔뜩 구겨진 얼굴이, 절대로 가볍지 않아서, 짓밟혀 구겨진 마음에 상처를 받은 요섭은 기광에게 등을 보였다. 좋아해. 흔들리는 눈빛에서, 결국 미안하다는 뒷모습. 붙잡지 않았는지, 아님 못했는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 기광.

 

그렇게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

 


연락해볼까?
..아니다.
카톡...해보고싶다.

 


-

 


양부 요새 직업학교로 바로 가던데, 너네 어떡하냐.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친구의 말에 문제를 풀던 손이 멈춘다. 자격증따서 빨리 취업하고 자리 잡고 싶다는 양요섭은 나처럼 어딘가에 머무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늘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방학 하기 전에 스치듯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2학기부터는 아예 그쪽으로 등교한다는 게 정말이구나, 이제, 그럼 학교 안 나오나? 그럼 만날 수가...

 

...없나. 풀고 있던 문제집 위로 똑- 하고 샤프심이 부러졌다.
방학 내내 고민했지만 결국 연락하지 못했다. 틈이 날 때면 늘 멈춰버린 카톡 창을 보곤 했는데 차마 무언갈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역시나 용기 내지 못하고 도망친 거였다. 먼저 밀어버려 놓고, 당겨주길 바라는 그런 못된 인간. 기광은 복잡한 마음 때문에 샤프를 내려놓고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싱그럽고 뜨거웠던 계절이 지나고, 창밖에 나뭇잎들이 붉어진 가을이었다. 너를 동경한다고 이야기했던 그 계절이었다. 그때처럼 나는 춘추복을 입고 있는데, 너도 그 날 처럼 긴 팔 와이셔츠를 입고 다닐까?

 


-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흐르고 늘 나아간다.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 않고 빠르게 갈려고 해도 가지지 않는 게 시간이었다. 언제 올까, 행여나 올까 하던 그날이 왔다. 결국 시간에 의해서 온 거였다. 그 해에 처음으로 추운 날. 십여년의 학창 시절 단 하루때문에 달려온 그날이었다. 맞춰놨던 알람시간보다 살짝 먼저 잠에서 깨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봤다. 익숙하다 못해 눈감고도 그릴 수 있는 벽지를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쳐다보다 울리는 알람에 몸을 일으켰다. 올해도 역시 춥다더니 진짜네. 기지개를 쭉- 켜고는 차가운 방바닥에 발을 디뎠다. 냉골 바닥에 정신이 확 깨며 비로소 느꼈다. 오늘이 정말 수능이라고.

 

"차로 데려다준다니까." 
"됐어, 그럼 더 긴장 될거같아."
"떨지 말고, 차분하게."

 

핫팩을 손에 쥐여주고는 목도리를 단단하게 여며준 엄마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도 더 호들갑 떠는 엄마의 마음도 이해 가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대꾸했다. 다녀올게요. 현관문을 열었고 코끝이 시린 계절이 새삼 느껴졌다. 하- 하고 숨을 내뱉으니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하늘로 뭉게뭉게 퍼진다. 익숙하게 계단을 내려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철제 대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조금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열린, 문 너머에

 

"안녕, 기광아."
코끝이, 귀끝이, 빨갛게 변한 네가 서 있었다.

 

 기광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아니 얼마 동안 서 있었던 건지. 가늠조차 안된다. 코끝이 빨갛게 변한 것도 모자라서 손도 빨갛게 변했다. 기광은 필사적으로 터져버릴 거 같은 울음을 참으며 대문을 넘어 요섭에게 다가갔다. 요섭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퐁퐁-, 기광의 입에서도 퐁퐁-. 너무 추워서 코끝이 아팠다. 시리다 못해 아파서,

 

"너 끝나면 찾아가려고 했는데"
"..."
"시간이 안될거같아서...그래서 먼저 찾아왔어."
"..."
"나는 수능 안보니까."

 

무안하게 웃는 요섭이 건넨 쇼핑백 안에는 합격이란 단어가 붙어있는 상품들이 들어있었다. 엿, 찹쌀떡, 초콜릿이며 ㅡ 수면 양말과 의미 모를 합격 기원 쿠키세트도. 꽤 묵직해 받아든 손이 힘이 들어갔다. 한참이나 말없이 울상으로 요섭을 바라보던 기광은 자신의 잠바 주머니에서 핫팩을 요섭에게 건넸다. 손끝이, 손등 손마디마다 추위게 질려버린 손 위로 핫팩을 쥐여줬다. 요섭은 픽- 허무하게 웃으며 언제나 그렇듯 기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잘 봐.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 기광을 보고 요섭이 걸음을 옮겼다. 괜히 온건가ㅡ 하는 마음과 이렇게라도 줬으니 됐다는 표정, 또 핫팩을 자신의 잠바 주머니에 넣는 얼굴에선, 머쓱함이. 여러 감정이 섞인 요섭은 또다시 기광을 등지고 걸었다. 남들보다 빠른 템포의 걸음걸이로 미련없이 자신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기광도 등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남들보다 느린 속도로.

 


-

 


너때문에 수능 잘본거같아.
- 내가 뭘 했다고, 여태껏 네가 노력했던 결과지.
...그날 선물 고마워.
- 응.

 

그 말이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허무하게도ㅡ 그렇게 끊겼다,

 


-

 

 

양요섭은 무슨 일을 하길래 졸업식도 안 오냐? 걔 요새 돈 버는 거에 미쳐있더라. 투잡뛰던데? 왜? 모르지 나야. 세면대에서 다른 친구랑 한참이나 떠들던 두준은 교복 매무새를 다듬었다. 한참이나 거울 앞에서 구레나룻을 정리하더니, 아까랑 별로 달라진 것도 없어 보임에도 꽤나 만족한 얼굴로 손을 씻었다. 야- 광부 안 섭섭하냐? 두준은 멍하니- 서 있는 기광을 향해 물었다. 양부 오늘 안 오는 거 말이야.

 

"바쁘니까 그렇겠지."
"너네가 웬일이냐?"
"뭐가."
"아 맞네."

 

너네 붙어 다니는 거 못봤네. 이제 고자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건가. 두준은 크흐흣- 하면서 웃음을 지었고 기광은 두준을 밀치며 개소리 말랬다. 고자는 무슨. 그날 이후로 끊긴 연락은 도통 이어지지 못했다. 요섭의 근황은 본인에게 듣는 거보다 주변 친구들한테 듣는 게 더 빠를 정도였으니. 두준을 뒤로 한 채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니 졸업식 때문에 혼잡한 강당이었다, 색색에 플랜카드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가족들, 마지막이라며 사진 찍는 애들과 떠들기 바쁜 사람들. 왁자지껄한 가운데 나 혼자만 즐겁지 않았다. 홀로 둥둥- 떠다니는 외딴 섬처럼 즐거운 분위기에 섞이지 못했다.

 

우울하다. 왜 그러지. 윤두준의 말처럼 다른 한쪽이 없어서 그런가. 대충 빈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여전히 연락은 없음. 소식도 없음.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박아넣고 고개를 숙여 운동화 코를 바라봤다. 기뻐야 하는 졸업식날 기쁘지 못한 건, 양요섭이 없어서, 이건 다 바쁜 양요섭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 

 


-

 


내가 그날 너를 받아줬으면 우린 여전히 지낼 수 있었을까?

 


-

 


계절이 돌고 돌아 벚꽃이 만개한 봄이었다. 새내기치고는 꽤나 시니컬한 대학생이 된 기광은 언제나 처럼 기분이 좋지 못했다. 딱 싫어하는 단체생활. 그것도 오티때 처음 만난 선배랑 동기들 때문에 끌려갈 신입생환영회(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지들끼리 처먹고 노는)때문이었다. 술은 커녕 이런 친목질을 선호하지 않는 기광은 동기의 닦달에 죽상을 하고 억지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 금방 나올 거야. 알겠냐? 분명 단호하게 말했지만 이미 정신이 꽃밭에 나갔는지, 오키도키요! 하는 동기의 뒤통수라도 갈겨버릴까 고민하며 교정을 걸었다.

 

학교의 자랑이자, 명물인 벚꽃길은 칙칙한 자신의 기분과는 달리 싱그럽다. 거짓말 좀 보태면 수백그루의 나무가 펼쳐진 장관에 없던 연애 세포도 살아나는 그런 계절이었다. 분홍색의 꽃잎이 날리면 꼭 따뜻한 눈이라도 오는 듯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상사병을 앓아 시름시름 아팠던 기광이었지만, 이 숨 막히게 따뜻한 햇볕아래 흩날리는 꽃잎들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떠오르는 달뜬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이제 와서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난 양요섭을 좋아한다. 했다. 라는 과거형도 아닌 한다. 라는 현재형으로. 사랑을 동경이라는 포장지를 덮어놓았던 거였다. 늘 말했듯 나는 소극적이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서, 더군다나 눈치는 완전 빵점이라 알아채지 못했던 거였다. 또 매사에 둔했기에 뻥- 걷어찬 사람을 인제야 그리워한다. 내밀어진 손을 내팽개치고 또 다시 보여준 마음을 방치할 정도로 바보인 나는, 지독하게 앓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아마도ㅡ 그건 전부 사랑이었을 꺼라고. 그리고 이걸 반년 전에,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 조금 덜 아팠을까? 라는 후회를 하면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완벽한 봄이다. 누구 하나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봄이었다. 

 


-

 


숨이 멎는다는 기분이 이런기분일까. 동기 녀석한테 끌려간 학교 앞 술집에서 너를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언제 염색했는지 샛노란 병아리색의 머리를 한 채로 테이블 여기저기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에 심장이 다시 귓가에 들릴 만큼 쿵-쿵- 크게 뛴다. 목 언저리가 그때처럼 간지러웠다. 괜히 큼큼- 목을 긁으며 친구가 앉는 자리에 대충 구겨 앉았다. 맨정신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채워지는 술잔을 집어 마셨다. 비워지면 채워지고 비워지면 다시 채워지는 마법 같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 눈알만 돌려 힐끔- 바라봤다. 여전히 바쁘게 뛰어다니면서도, 다른 직원들이랑 잡담을 하는 너를 보니 괜시리 이상했다. 익숙한 이질감. 그런데도 그 얼굴을 보니 따끔거리는 귓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고, 목 안쪽이 긁고 싶은 만큼 간지러웠다. 그러면서도 얼굴 전체가 두근거린다. 술때문인지, 아님 녀석 때문인지 모를 열기에 고개를 숙였다.

 

"야야- 이기광 괜찮냐?"
"아으..."
"주는대로 다 처먹으면 어째"
"나...나 화장실 좀."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행동도 말도 나의 모든 것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사람들은 웅얼웅얼-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쁘다. 붕 뜬 기분이 마냥 좋지만 않아서 조금은 울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같이 가겠다는 동기에게 됐다고 거절한 채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니 술집 안과는 다른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봄이라 그런지 시원한 바람보다는 조금은 미적지근한 바람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다. 하- 씨발.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욕이 입에서 튀어 나갈 정도니, 내가 어지간히 취하긴 취했구나. 똑바로 걷고 싶은데 세상이 자꾸 멋대로 움직여서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가게 벽 잡고 걸었다. 그러다 누군가 운동화가 툭- 차였다.

 

"어어-? 죄송..."
"...이기광?"

 

익숙한 목소리, 힘없이 바닥만 보던 고개가 그 익숙한 목소리에 번쩍 들린다. 동글동글하고, 흑요석 같이 까만 눈.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입에는 미처 불 붙이지 못한 담배가 물려있었다. 그걸 보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색도, 담배 피우는 녀석도 전부 내가 모르는 것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사실, 내가 놓아버서 모르는 것들이었다. 너는 내게 기회를 줬지만 그걸 뻥- 하고 차버려놓고 이제 와서 하는 후회였다. 내게만 모진 거 같은, 나한테만 왜. 나는...나는. 기광은 요섭의 어깨를 붙잡고 알 수 없는 단어들만 흘렸다. 서러움의 가득 차서 나오지 못하는 것인지, 아님 그날 기회를 날린 멍청한 선택에 후회인지, 그것도 아님 요섭의 대한 원망인지. 조각조각 말을 내뱉는 기광을 요섭은 말없이 안았다. 

 

요섭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펑펑 우는 기광에게선 술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도 봄 바람냄새도 났다. 지독하게 따뜻하면서 알게 모르게 코끝이 간지러운 그런 향기였다. 익숙하지만 낯선 기광의 채취에 요섭은 괜스레 코가 시려 훌쩍이다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버렸다. 불 한번 붙여보지도 못했음에도 행동에는 미련 따윈 없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우는 기광을 말없이 토닥이며, 온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했는지 눈물을 흘리는 기광에게 요섭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등을 다독였다. 두근- 두근- 맞닿아 요섭에게까지 들리는 유독 커다란 심장 소리에 맞춰 그렇게 다독일 뿐이었다. 

 

가게 앞에 누군가 심어놓은 작은 벚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꽃잎 몇 개가 눈앞을 지나 하늘로 날아가고 요섭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만큼, 잦아드는 기광의 울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토닥 토닥- 여전히 다정한 손길로, 벅찬 온기가, 맞닿았다. 

 

이제야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유독 아팠던 여름도, 홀로 외로웠던 가을도, 시리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온전히 새로운 계절, 이었다. 그렇게 비로소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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