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미상관(首尾相關)
첫날은 기광이 아직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구나 싶었다. 이틀째 되던 날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기광은 전화든 문자든 확인하면 바로바로 답신하는 편이었다. 하루면 몰라도 이틀 동안 연락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요섭은 결국 참지 못하고 기광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매일같이 서로의 집에 드나들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하지만 초인종에 반응해 나온 사람은 요섭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나온 기광의 어머니는 요섭을 보더니 오랜만이라며 웬일이냐고 물었다. 요섭은 그런 어머니의 반응이 의아했다. 고삼 때부터 발길이 좀 뜸해졌기로서니 요섭이 이 집에 찾아오던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웬일이냐니. 기광이 없지 않은 이상은… 잠깐, 기광이 없어? 요섭이 일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재빨리 물었다. 기광이 지금 집에 없나요? 그 말에 기광의 어머니는 어머, 하고 놀라더니 기광이가 말 안 했니? 하고 물었다. 그 뒤에 들려온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광은 어제 대학 앞에 있는 자취방으로 떠났다고. 당연히 요섭과 같이 가거나 미리 얘기했을 줄 알았다고. 기광이 자취방을 구한 건 알고 있었다. 기광이 알려줬으니까. 방을 고민할 때 함께 골라주기도 했다. 그런데 왜 벌써? 요섭에게 말도 없이? 요섭은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집에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광이 요섭에게 말도 없이 이렇게 급하게 떠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해 그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해도 왜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꾸 나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기광이 요섭과의 연을 끊으려 하는 거라면?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요섭은 며칠간 기광이 말없이 떠난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기광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취해서 고백이라도 한 건가…? 요섭은 그날 많이 취했고, 그날의 기억은 손상된 필름처럼 드문드문 지워져 있었다. 그래서 요섭도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정말 그런 거라면. 그래서 제가 불편해진 기광이 말없이 떠난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요섭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의 플립을 닫아 침대로 던져 버렸다.
3. 이기광
양요섭과 이기광은 친구다. 이 명제는 참이다. 두 사람은 이 명제 위에 무수한 시간과 추억을 쌓아왔다. 그렇다면 이 명제가 거짓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기광이 생각하는 정답은 ‘무너진다.’였다. 그 위에 쌓은 것들이 모조리 무너질 거라고. 그래서 기광은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숨겼다.
기광은 요섭이 기광의 마음에 처음 틈새를 만들었던 순간을 기억했다. 요섭을 두 번째로 만났던 날. 그날 요섭은 체육복을 돌려주려고 기광을 찾아왔다. 체육복을 세탁해서 돌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나나우유까지 챙겨온 걸 보고 섬세한 아이구나 생각했다. 팔자 눈썹이 돼서 혹시라도 바나나우유를 싫어할까 걱정됐다고 했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기광과 눈을 마주치며 지금은 괜찮으냐고 물어왔을 때는 그 눈이 너무 다정해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고작 두 번 본 사람에게 그렇게 걱정 어린 시선이라니. 그 시선이 기광의 시선을 옭아매기라도 한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괜찮다는 기광의 말에 다행이라며 웃었을 때는 그 미소나 너무 근사해서 저도 모르게 잘생겼네, 라고 중얼거렸다. 요섭이 만든 아주 작은 틈새에서 새어 나온 말이었다. 오밀조밀 귀여운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어른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때는 작은 틈새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번 틈이 생기면 침식은 가속화된다. 요섭의 다정은 물방울이 되어 틈새 위로 뚝뚝 떨어졌고, 가장자리가 깎여나가며 틈새는 점점 벌어졌다. 그 틈새로 뭔지 모를 마음이 자꾸 새어 나와 가슴을 축축하게 했다. 그리고 열여덟의 어느 겨울, 기광의 벽은 끝내 허물어졌다. 그날 기광은 독한 감기에 걸려 학원에 나가지 못했다. 수업이 시작할 때쯤 요섭에게 왜 안 오냐는 문자가 왔고, 그에 기광은 아파서 못 간다고 답장했다. 그러고 한동안은 요섭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밤 열 시쯤 되었을 때 요섭에게 뜬금없는 문자 한 통이 왔다. ‘문 앞을 봐봐.’ 기광은 그 문자를 보고는 문을 열어 문 앞을 살폈다. 문고리에 검은 봉투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약과 이온 음료, 온갖 과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기광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고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요섭을 좋아한다는 걸.
벽이 허물어졌던 밤, 역설적이게도 기광의 마음속에서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광은 스스로 새로운 벽을 세웠다. 기광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지만, 그것을 요섭에게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기광은 앞으로도 계속 요섭의 곁에 있고 싶었다. 요섭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견고해야 했다. 하지만 기광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면 두 사람의 관계가 흔들릴 것이 뻔했다. 그래서 기광은 마음속에 벽을 세우고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숨겼다. 벽을 유지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요섭이 없는 미래를 가정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기광은 이대로 기광이 자신의 마음만 잘 막아둔다면, 계속 요섭의 옆에 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섭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일주일 뒤 요섭과 술을 마실 때였다. 분명 술은 기광이 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요섭이 꽐라가 되어 버렸다. 기광은 자신의 앞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머리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섭을 데리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그 와중에 머리통은 진짜 작네. 기광이 요섭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양요섭, 일어나봐. 기광이 어깨에 요섭의 팔을 두르며 말했다. 하지만 요섭은 꼼짝도 안 했다.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때 요섭이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시끄러워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이기광 미워…. 기광은 처음에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뭐?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다음 들려온 말은. 이기광 미워, 밉다고…. 기광은 마음속에서 뭔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요섭이 기광이 밉다고 했다.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기광은 제멋대로 요섭의 말을 진심이라고 결론짓고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가 요섭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던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멈췄다. 원인이 뭐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양요섭이 저를 미워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기광은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뒤로 어떻게 요섭을 데려다주고 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 기광은 온종일 요섭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아팠다. 기광은 요섭을 좋아한다. 하지만 요섭은 기광을 미워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광을 미워하게 됐다. 기광은 앞으로도 계속 요섭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요섭이 기광을 미워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요섭의 곁에 있을 수 없다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로 요섭의 곁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자취방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일찍이라고 해봤자 일주일 앞당긴 것뿐이라서 아주 이른 건 아니었다. 다행히 전에 살던 사람이 이미 나간 뒤라 주인과 이야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미 가구가 갖춰진 집이라 챙겨갈 것도 많지 않았다. 부피가 커서 채 들고 가지 못하는 건 엄마한테 택배로 부쳐달라고 했다. 그렇게 기광은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로 도망쳤다. 그사이에 계속 요섭에게 연락이 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설령 나중에 요섭을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요섭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4. 다시, 두 사람
기광은 동기들과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자취방으로 향했다. 살짝 취기가 올라 몽롱한 정신으로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골목길 끝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 인영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 인영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리고 그 인영에 도달하기까지 고작 열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 기광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 인영의 주인은 기광이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가로등 빛을 받으며 벚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담벼락 밑에 서 있는… 양요섭.
그 장면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서 기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내가 취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취했다고 나를 볼 정도면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요섭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
“…진짜 양요섭이야?”
기광은 멀거니 서서 고장 난 테이프처럼 말을 늘이더니 이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말했다.
“안 믿기면 와서 만져볼래?”
요섭이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 말에 기광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요섭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너희 어머니한테 여쭤봤어.”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요섭이 시선을 돌린 채 말이 없는 기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달 전 기광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고 요섭은 많은 생각을 했다. 제가 취해서 기광에게 고백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기광이 제게 실망해서 말도 없이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이 삼 년간 쌓아 올린 관계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끊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광을 찾아가기 위해 기광의 어머니께 기광의 자취방 주소를 물어봤다. 하지만 그 즉시 찾아오지 않고, 두 달이나 지나서야 기광을 찾은 건, 요섭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말 자신이 술김에 고백을 해서 기광이 떠났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아닌 다른 이유면 또 어떡하나. 두 달 동안 요섭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광을 재회했을 때 할 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막상 기광을 만나고 나니 요섭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기광에게 조금 화가 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나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았는데.”
“…”
“왜 말도 없이 떠났어?
“…”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끝낼 사이는, 아니지 않아?”
“…”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기광은 요섭이 뭐라고 말하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입술을 꾹 다문 건 말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기광은 참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야‥ 너‥ 울어…?”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순간 기광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야, 왜 울고 그래‥.”
기광은 지난 삼 년간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요섭은 크게 당황했다. 그새 화가 난 것도 잊고 사과를 했다.
"기광아, 내가 미안해. 울지 마."
그때 기광이 양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보고 밉다고 했잖아….”
“뭐?”
요섭이 자신이 들은 걸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때 네가 나보고 밉다고 했잖아…!”
기광이 고개를 쳐들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요섭은 또다시 당황했다. 기광이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광은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에도 늘 허허, 하고 실없이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요섭이 대신 화를 내주는 일도 많았다. 그런 기광을 보며 요섭은 인세(人世)에 마실 나온 신선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 지르는 이기광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었다.
“‥내가? 언제?”
“그때 술 마시면서.”
“내가 그랬어…?”
“어.”
기광이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목소리의 떨림이 잦아든 것이 눈물샘은 조금 진정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요섭의 머릿속은 난리가 났다. 기광이 말도 없이 사라진 원인이 마지막 만남에 있다면 그것은 필시 요섭의 취중 고백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요섭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분명, 기광이 미울 때도 있었다. 간혹 기광을 좋아하는 일이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면 요섭은 기광이 미워지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투정에 가까웠다. 또한, 결국 기광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촉발된 것이었으므로 요섭에게 미워한다는 말은 곧 좋아한다는 말과 같았다. 게다가 그 미움은 먼지보다도 작아서 원래대로라면 기광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러나 맥락 없이 요섭의 입을 통해 자모(字母)를 갖게 된 미움은 그 날카로운 모서리로 기광에게 상처를 남겼다. 요섭은 기광이 더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지도 몰랐다. 진실이 기광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요섭은 단지 기광에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요섭은 지금이 진심을 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설령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더라도.
“어‥ 나 그때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안 나. 미안해.”
“근데 네가 정말 미워서 그렇게 말했던 건 아냐.”
요섭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했는데?”
요섭을 바라보는 기광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요섭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막상 말하려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기광은 그런 요섭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요섭이 입을 열지 않자 그대로 휙 하고 돌아서 가버리려고 했다. 요섭은 그런 기광의 팔을 황급히 붙잡으며 외쳤다.
“자, 잠깐만, 기광아!”
“네가 좋아서 그랬어…!”
뜸 들인 것이 무색하게 진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듣고 눈이 커진 기광이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뭐?”
돌아본 기광의 머리카락에 연분홍색의 벚꽃잎이 붙어 있었다. 요섭은 손을 뻗어 그 벚꽃잎을 떼어주며 말했다.
“투정 같은 거였어,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 없어서…”
“정말 네가 미웠던 게 아니야.”
요섭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광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요섭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왜 또 울고 그래….”
요섭은 기광이 우는 것이 자신의 고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요섭이 기광을 좋아하는 게 싫어서 우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광은 요섭의 고백이 싫어서 눈물이 난 것이 아니었다. 더는 참을 필요가 없기에 눈물이 났다. 기광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 줄곧 벽으로 자신의 마음을 막아왔다. 막아두면 언젠가는 그 안에서 모두 증발하리라고 생각했다. 지난 두 달간은 정말로 수위가 낮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요섭을 떠올리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므로. 그러나 오늘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요섭을 발견한 순간, 기광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요섭을 발견하자마자 격하게 출렁이기 시작한 마음은 조금도 줄어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기광은 막막해졌다. 이 마음은 대체 언제쯤 증발하는 건지, 언제까지 막아내야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섭이 기광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기광이 더는 자신의 마음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오래도록 마음을 막아왔던 벽이 허물어지며 과량의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양은 너무나도 방대해서 몸 밖까지도 범람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형태가 없었고, 그 대신 쏟아져 나온 것은 눈물이었다.
“날‥ 좋아한다고? 정말…?”
기광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요섭은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자신의 고백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 순간 기광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나도 좋아해.”
“어…?”
요섭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도 좋아한다고, 너.”
하지만 기광이 그 말에 쐐기를 박았다. 요섭의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했다.
“진짜…?”
“응.”
요섭은 자신이 기광의 중력에 일반적으로 이끌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광은 자신 역시 요섭의 중력에 이끌렸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두 사람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쌍성(雙星)처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요섭은 기광과 충돌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럼…”
“응?”
“나, 너 한 번만 안아 봐도 돼…?”
요섭이 곧은 시선으로 기광의 두 눈을 응시했다.
“정말로 한 번만 안을 건 아니지?”
기광은 요섭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고 씩 웃으며 말했다.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들이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순간 요섭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요섭은 기광에게 성큼 다가가 기광을 꽉 끌어안았다. 마치 둘 사이에 어떠한 공백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기광은 그런 요섭의 품 안에서 팔을 벌려 요섭을 세게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은 가로등이 비추는 벚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두 개의 심장이 같은 빠르기로 뛰었다.
두 별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수미상관(首尾相關)
가락
1. 두 사람
어쩌면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3년 내내 다른 반이었고, 동아리도 어울리는 무리도 달랐다. 양쪽 모두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둘은 정말로 서로의 졸업 앨범 한 귀퉁이만을 차지한 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짐작에 불과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졸업 앨범 한 귀퉁이뿐만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까지도 떡하니 차지해버렸다. 고등학생으로 보낸 삼 년의 시간. 거기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것은 단연 서로였다. 양요섭과 이기광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서로와 보냈다. 시작은 요섭의 변덕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열일곱의 어느 날, 요섭은 체육 시간 직전에야 체육복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체육복 안 입고 가면 벌점인데. 누구한테 빌리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친구 목록을 훑던 요섭에게 친구 하나가 말을 건넸다. 3반 가봐. 3반도 오늘 체육 들었던데. 그 말을 들은 요섭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잘됐지 싶었다. 3반은 바로 옆 반이었으니까. 요섭은 부리나케 3반으로 달려갔다. 활짝 열려 있는 뒷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친구들을 찾았다. 하지만 어딜 갔는지 친구들은 하나같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교실 안을 훑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대와 다른 상황에 초조해진 요섭은 교실 뒤편에 걸린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요섭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반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야 끝에 누군가가 걸렸다.
초점 밖의 뭉그러진 인영 따위 평소라면 의식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 순간 요섭의 눈길을 끌었는지 요섭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때에는 의문조차 품지 못했다. 그것은 요섭의 의식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섭이 그날의 일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그 당시의 요섭은 그저 하얀 인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치 강한 중력에 이끌리듯이 자연스레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초점 밖에 있던 존재가 순식간에 초점의 정중앙으로 들어왔다. 시야 끝에서 색채로 뭉개졌던 풍경은 이제 가장 뚜렷한 상이 되어 요섭의 망막에 맺혔다.
세 번째 분단의 맨 뒷자리, 책상 위로 드리워진 햇살, 그리고 이어폰을 꽂은 채 한쪽 팔을 베고 비스듬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한 소년.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 사실주의 화가의 그림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요섭은 그 화폭 속의 소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요섭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했다.
“저기‥.”
“어?”
요섭이 성큼 소년의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소년은 이어폰을 빼며 몸을 일으켰다. 소년의 기다란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요섭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체육복 좀 빌려줄 수 있어?”
“체육복?
“응. 다음 교시가 체육인데, 체육복을 안 가져와서….”
“아, 응. 그럼.”
“고마워.”
소년이 선뜻 부탁을 들어주자 요섭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호기롭게 다가갈 때는 언제고 막상 말을 걸고 나니 긴장이 됐었다. 모르는 사이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빌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소년은 잠시만 하고 말하더니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있는 사물함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사물함에 붙은 이름표가 요섭의 눈에 들어왔다. 이기광. 그게 소년의 이름인 듯했다. 소년은 사물함에 걸린 자물쇠를 풀고 그 안에서 잘 개어진 체육복을 꺼내 요섭에게 건넸다. 요섭은 그 체육복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이름이 기광이야?”
“어? 어, 맞아.”
기광은 별안간 요섭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섭은 그런 기광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자신이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 내 소개도 안 했네. 나는 양요섭이야. 2반.”
“바로 옆 반이네? 근데‥.”
“응?”
“안 가 봐도 괜찮아? 종 치기 직전인데.”
기광이 흘긋 벽시계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요섭이 고개를 휙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다음 숫자에 근접해 있는 분침을 보며 요섭은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광이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말했다.
“빨리 가봐.”
“응, 그래야겠다. 체육복 빌려줘서 정말 고마워.”
“아냐.”
그럼, 갈게. 안녕! 요섭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기광도 잘 가, 하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뒷문으로 향하던 요섭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곤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기광은 책상 속에서 교과서를 꺼내다가 그 소리에 다시 요섭을 바라보았다. 요섭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이 마지막 교시니까 이건 내가 빨아서 내일 가져다줄게.”
“어? 아니, 그럴 필요는….”
“아냐, 내가 미안해서 그래.”
그럼, 진짜 안녕! 요섭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몸을 돌려 뒷문으로 달려갔다. 요섭이 3반 문을 통과하는 순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복도로 나오니 요섭의 반 주번이 교실 문을 잠그고 있었다.
“어? 야, 잠깐만!”
“양요섭 이제 오냐?”
“어, 나 체육복 빌리러 갔다 오느라‥. 교실 문은 내가 잠글 테니까 먼저 가봐.”
“알겠어.”
주번은 요섭에게 열쇠를 넘기고 사라졌다. 요섭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에는 아이들만 있을 뿐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으신 듯했다. 요섭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들이쉬는데 어디선가 은은하게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혹시나 해서 소매에 코를 묻자 같은 향이 풍겨왔다. 이미 한 번 입은 체육복에서 섬유유연제 향이라니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는 앤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책상에 엎드려 있었지. 요섭이 나른한 얼굴로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기광을 떠올렸다. 오후 두 시의 햇살로 빚어놓은 듯한 얼굴. 사실이 어떻든 기광과 잘 어울리는 향이라고, 요섭은 생각했다.
다음 날, 1교시 전, 요섭은 세탁한 체육복과 바나나우유를 들고 3반으로 향했다. 기광은 전날처럼 엎드려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또,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는데, 그게 수학 문제에 대한 풀이라는 것은 가까이 가서야 알았다. 요섭은 기광의 책상 옆으로 다가가 말없이 체육복과 바나나우유를 내밀었다. 기광은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물건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양요섭?”
기광이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이름 기억하네? 체육복 빌려줘서 고마워.”
요섭은 얼른 받으라며 체육복과 바나나우유를 조금 더 내밀었다. 기광은 두 손으로 그것들을 받아들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고마워.”
“아니야. 내가 더 고맙지. 그런데….”
“응?”
“바나나우유 싫어하는 건 아니지? 혹시라도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서….”
요섭이 조금 소심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런 요섭의 얼굴을 보며 기광은 알았다는 듯 아, 하더니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냐. 좋아해. 잘 마실게.”
“아, 지금 마셔도 되나?”
“어? 당연하지.”
“오늘 아침을 못 먹어서 배고프던 참이었거든.”
기광은 요섭이 함께 챙겨준 빨대의 포장을 벗겨 바나나우유에 꽂았다. 그러고는 입을 오므려 우유를 길게 쪽 빨아 마셨다.
“아, 당 들어가니까 좀 살 것 같다.”
기광이 빨대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그 말투가 나이 든 아저씨 같아서 이번에는 요섭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순간 문득 즐겁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즐겁다고? 뭐가? 요섭이 스스로 반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이기광과의 대화가. 요섭은 이 대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할 말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러던 중 책상 위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기광이 열심히 풀이 과정을 적던 노트. 요섭이 그 노트를 눈짓하며 물었다.
“그건 숙제야?”
“아, 이거?”
“응, 오늘 학원 가는 날인데, 숙제를 아직 안 해서.”
“급한 거야? 내가 방해한 건가?”
“그건 아니고, 학원 가기 전에 축구 하려고 미리 해두는 거야.”
기광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요섭의 동그란 눈이 한층 더 동그랗게 변했다.
“축구? 너 축구 좋아해?”
“응, 왜?
“아니, 좀 의외라서.”
“의외라고? 왜?”
기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체육 안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체육복에서 좋은 향기가 나서….”
“어‥?”
기광의 얼굴에 일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얼굴이 조금 발개진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요섭은 아차, 싶었다.
“아, 미안.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맡으려고 맡은 건 아니고, 입으니까 그냥 향기가 나서….”
“아, 아냐. 괜찮아. 어제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벤치에서 쉬었거든. 그래서 그랬을 거야.”
기광은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기광의 말을 들은 요섭은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괜찮아?”
“어?”
“지금은 몸 괜찮냐고.”
요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광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기광은 그런 요섭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응, 괜찮아.”
“괜찮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요섭은 안도한 듯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기광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때맞춰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그만 묻히고 말았다. 종소리가 끝나고 요섭이 뭐라고 했냐고 물었지만, 기광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을 뿐이었다. 그에 요섭은 더 묻지 못하고 인사만을 남긴 채 반으로 돌아갔다. 그런 요섭의 뒷모습을, 요섭이 떠난 자리를, 기광이 오래도록 응시했다는 사실을, 요섭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토요일, 요섭은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기광을 발견했다. 기광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걷고 있었는데, 아직 요섭을 발견하지는 못한 듯했다. 그에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요섭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살금살금 기광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워, 소리를 내며 기광의 어깨를 톡 쳤다. 기광은 화들짝 놀라더니 휙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로 뒤에 서 있던 요섭과 눈이 마주치자 기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요섭이…?”
“안녕?”
요섭이 실실 웃으며 인사했다. 장난기 가득한 그 얼굴을 보고 기광은 눈을 흘기며 투덜댔다.
“뭐야, 놀랐잖아.”
“미안. 집 가는 길이야?”
요섭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너는?”
“나도.”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광은 이어폰 두 짝을 모두 빼고는 후드 집업 주머니에서 MP3를 꺼냈다. 기광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자 어두웠던 화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요섭은 화면으로 보이는 앨범 커버에 눈이 커졌다. 그것은 요섭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요섭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너도 그 앨범 좋아해?”
“어? 이거?”
기광이 요섭에게 MP3의 화면을 보이며 되물었다.
“응, 그거.”
“어, 좋아하는데… 혹시 너도…?”
“응, 나도 좋아해. 그럼, 그 밴드도 좋아해?”
“응, 옛날부터 팬이었어.”
그 말에 요섭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저를 제외하고 제 주변에서 그 밴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래서 요섭은 한층 들뜨고 말았다.
“우와, 나돈데.”
“어? 진짜? 나 주변에서 얘네 좋다는 사람 처음 봐.”
“나도 그래. 그럼, 앨범도 모아?
“모으긴 하는데‥ 수량을 워낙 적게 뽑다 보니 다는 못 구했어.”
요섭은 이게 기광과 친해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집에 구경 올래? 나 앨범 전부 가지고 있는데.”
“와, 진짜? 나야 좋지. 언제?”
“오늘도 좋고, 다른 날도 좋고.”
“그럼, 오늘 어때?”
“좋아.”
요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기광은 그런 요섭을 보며 마주 웃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집이 어디야?”
“나 새봄 아파트.”
그 말을 들은 기광의 눈이 커졌다.
“어? 나도 거기 사는데. 몇 동?”
이번에는 요섭의 눈이 커졌다.
“어? 진짜? 나는 21동이야. 너는?”
“나는 23동.”
“가깝네. 왜 여태 너를 한 번도 못 봤지?”
“보고도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지. 우리 안 지 얼마 안 됐잖아.”
기광이 씩 웃으며 요섭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 위로 드리워진 햇살 탓에 기광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요섭은 일순 정신이 아득해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금 간격을 두고 중얼거렸다. 그러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기광이었다.
“아, 혹시 집에 같이 가는 친구 있어?”
“아니, 친구들 집은 다 정반대 방향이라….”
요섭이 조금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집에 같이 갈래? 나도 그렇거든.”
예상치 못한 기광의 말에 요섭이 눈을 크게 뜨고 기광을 바라보았다. 요섭이 아무 말이 없자 기광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싫, 은가‥?
“아니아니, 좋아. 그러자.”
요섭이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요섭을 보고 기광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요섭은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게 허파에 꽃가루가 들어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배고픈데, 떡볶이 먹고 갈래?”
“좋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오후 한 시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뒤로 요섭과 기광은 매일 하굣길을 함께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때로는 기다리는 시간이 함께 걸어가는 시간보다 길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짧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 늘 기꺼이 서로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졌다. 하굣길에서 다른 길로 새는 일이 잦아지면서 두 사람의 하굣길은 30분, 1시간, 3시간 거리로 늘어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집에 가는 길에 함께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강변을 걷기도 하고, 멀리 시내에 나가기도 했다.
한 차례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사소한 이유로 서로의 반에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여름방학에는 네 방이 내 방인 양 지냈다. 하루는 양요섭의 방에서 하루는 이기광의 방에서 두 사람은 만화책을 보고,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듣고, 가끔은 공부를 했다. 그다음 해에는 함께 야자를 신청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비록, 반이 달라서 붙어 있지는 못했지만, 둘은 함께 석식을 먹고, 운동장을 산책하고, 여전히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가끔은 야자를 빼먹고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럴 때는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수능이 1년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에는 요섭도 기광이 다니는 학원에 등록했다. 기광은 공부를 열심히 했고, 늘 성적이 좋았다. 요섭은 원래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 무렵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수능이 한 달쯤 남았을 무렵부터는 수능 당일에 익숙해진다며 매일 도시락을 싸 와서 함께 먹었다. 대망의 수능 당일에는 서로 다른 수험장에 배정됐고, 두 사람 모두 무난하게 시험을 보고 나왔다. 그 후 수능 성적표가 나왔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성적에 맞는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비록, 두 사람은 같은 학교에 지원하지는 못했지만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기광은 최초합으로 요섭은 추합으로 대학에 붙었다. 뒤늦게 요섭의 합격 소식이 들려온 날 밤, 두 사람은 같은 지역에서 학교에 다니게 됐다며 기뻐했다. 얼마 후 요섭과 기광은 무수한 추억을 쌓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할 생각에 걱정도 되었지만, 서로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2. 양요섭
요섭이는 둘도 없는 내 친구야. 기광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요섭은 기쁘면서도 슬펐다. 기광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 슬펐다. 비록, 그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요섭은 기광을 좋아했다. 처음 자각한 것은 열일곱에서 열여덟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던 밤, 요섭은 문득 기광을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시야 끝에 걸렸던 인영을 향해 고개 돌렸던 순간. 요섭은 처음으로 그때의 일에 의문을 품었다. 왜 그 순간 그 인영이 요섭의 눈길을 끌었는지. 왜 요섭은 그대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그날 요섭은 안 하던 행동을 했는지. 요섭은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그때 맞은편 벽에 생긴 창문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밤새 눈이 온다던 일기예보의 말이 맞았는지 창문의 그림자에서는 잿빛 눈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요섭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중력. 중력에 의해 지상으로 떨어지는 눈처럼 저도 기광의 중력에 이끌린 것이다. 한 천체가 강한 중력을 가진 다른 천체를 만나 궤도를 이탈하듯이 요섭도 기광에게 이끌려 궤도를 이탈했다. 기광이 중력으로 요섭을 끌었고, 그 불가항력에 요섭이 어찌할 도리 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원래의 궤도를 이탈해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했다. 요섭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력이 작용하는 한은 계속 그 주위를 공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자각하기 전에도 이따금 느껴졌던 욱신거리는 통증은 자각한 이후로는 더 자주, 더 크게 찾아왔다. 있는지도 몰랐던 상처를 알아채면 그때부터 아프게 느껴지는 것처럼. 때때로 통증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요섭의 가슴을 옥죄기도 했다. 기광이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래를 응시하거나 눈을 접어 웃는 모습을 목도할 때면 특히나 그랬다. 그럴 때면 요섭은 기광이 미워지기도 했다. 조금, 아주 조금. 기광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통증이 좀 줄어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기광을 찾아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요섭은 열여덟의 여름 방학에 시골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일주일간 기광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력에 메인 건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마찬가지였는지 기광과 오래 떨어져 있으니 힘이 들었다. 그래서 요섭은 기광의 곁에 남아있는 쪽을 선택했다. 중력을 거스르려고 애를 쓰기보다 자발적으로 그 주위를 공전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숨기고 기광의 절친한 친구로서 늘 기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겠다고.
그러려면 우선 기광과 같은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가야 했다. 요섭은 난생처음으로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실제로 수능에서도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입시는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던가. 요섭은 지원했던 모든 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중 하나의 대학에서 예비번호를 받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추가 합격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요섭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고,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는 결국 마음이 내려앉았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사실보다도 적어도 1년간 기광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마감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그런데 마감 시간을 몇 분 안 남기고 기적적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요섭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기광과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요섭은 눈물의 흔적을 말끔히 없앤 뒤 기광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이 소식을 직접 만나서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기광을 보니 요섭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요섭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몇 분이 지나고서야 “기광아, 나 합격했다.”라고 말했다. 요섭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덩달아 심각해졌던 기광은 그 말을 듣자마자 요섭의 등을 때리며 타박했다. 붙었으면 냉큼 얘기할 것이지 왜 분위기를 잡느냐고. 떨어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았냐고. 요섭은 맞으면서도 실실 웃음을 흘렸다. 기광은 그런 요섭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때 요섭은 앞으로도 기광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얼마 전 기광과 술을 마신 이후로 기광에게서의 연락이 뚝 끊겼다. 기광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