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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사랑 얘기

어른의 연애란 뭘까?

 

현시점에서 의문이 든 기광이었다. 요즘 연인들은 키스하고 시작한대 사랑을. 어느 걸그룹의 히트곡 노래 속 가사처럼, 마음을 주고받기 전에 일단 몸 정부터 드는 게, 이런 게 어른의 연애인가? 선섹후연. 선 섹스 후 연애 이런 줄임말도 있으며 자만추. 자보고 만남 추구. 원래 있던 줄임말의 뜻이 변하기도 하는 지금. 어른의 연애는 정말 몸부터 맞추고 시작하는 건가? 쓸데없고 답도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기광이 지금 그런 상황인 것 같기 때문이다.

 

 

양요섭과 이기광은 썸인가?

 

썸. 이 단어가 없었을 적에는 이 관계를 도대체 뭐라고 명명하였는가. 사귀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사귈 것이며, 사귀기 이전에 그 멜랑꼴리하고도 설레는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관계. 그 애매하고 애매해서 밤잠 못 이루게 하는 관계를 설명하기에 썸이라는 한 글자는 정말로 좋은 단어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이 관계는 썸이라고 명하기가 조금... 그렇다. 조금 그렇다는 말 말고는 도저히 이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일단 썸은 풋풋한 학생들 그러니까 젊은이들 고유의 단어 같다. 아, 늙은이는 안 된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뭔가 양요섭과 이기광의 관계를 썸이라고 말하기에는 본인이 조금 부끄러울 뿐이다. 부끄럽지 않더라도 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에는 둘의 관계가 썸이라면 이루어지는 행동들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섹파라면 섹파지.

 

 

일어나고, 자기 전 모든 순간들에 연락을 하고 있는가? X

시간이 된다면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하는가? X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가? X

집에 데려다주거나 귀갓길에 통화를 하는가? X

시간을 내서 영화-밥-카페-술 전형적인 데이트를 하는가? X

손을 잡는 등 조심스럽게 스킨십을 하고 있는가? ... O

 

 

대략적으로 사람들이 썸이라면 하는 대표적인 행동들에 해당되는 것 마지막뿐이다. 근데 조심스러운 스킨십이 아니라.. 이미 할 거 다해버려서 조심스럽지 않다는 게 흠일뿐. 그렇다면 섹파인가?

 

 

그래서, 이기광은 양요섭과 연애를 하고 싶은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어쨌든 마음에 없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광은 잘 모르겠다. 29살 이기광은 지쳤다. 무엇에? 모든 것에. 20대 초반에는 연애도 하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고, 로또도 당첨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에 열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르고 아홉수가 되어버린, 흔히들 말하는 계란 한 판이 되어가는 이기광은, 몇 번의 헤어짐을 겪고 연애에 관심이 사라진지도 오래됐으며, 취뽀가 꿈이었던 때와 다르게 가슴 한편에 사직서를 품고 살고 있으며, 로또 당첨이라는 기적은 자신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아 주택청약이나 넣고 있었다. 주택청약은 좀 될 것 같더라. 주변에서 몇몇은 당첨되더라고. 그래서 그냥 삶에 지쳐버린 이기광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양요섭이라는 변수가 턱하니 생겨버렸다. 그래서 양요섭이랑 이기광이 무슨 일이 있었나. 클리셰적인 문장이지만 이는 한 달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뻔한 사랑 얘기

w.으뜸

 

 

 

 

 

 

 

양요섭과 이기광의 우연적인 만남은 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승진을 한 친구가 승진 턱을 쏘겠다며 이자카야를 데리고 갔다. 연어 회와 모둠꼬치가 상을 가득히 채웠다. 안주가 이러니 술이 당연히 술술 들어갈 수밖에. 술은 술을 부르고, 술이 나를 마시는지 내가 술을 마시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빠른 템포로 부어라 비워라 마셔댔다. 그러다 한계점에 도달한 기광은 화장실을 가 체내에 가득한 알코올을 빼러 일어섰다. 나, 화장실 갔다가 담배 피우고 오께. 장장 9년을 술에 단련된 기광은 취했지만, 제 몸은 가눌 수 있었다. 취했다고 휘청대고 정신을 잃을 나약한 상태로는 회식이 잦은 기광의 회사에서 버틸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갔다가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겨울 끝 무렵인데도 여전히 추웠다. 취했을 때 피는 담배는 취기를 더욱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맛도 있었다. 불을 붙이기 위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좀 끊으라고 했던 전 애인이 선물로 사주었던 지포라이터. 금연하라면서 라이터 사주는 모순조차도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럼 뭐해, 바람 나서 떠났는데. 아직도 전 애인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싫어할 정도로. 그래서 그와 관련된 물건들은 다 버렸지만, 지포라이터는 계속 사용했다. 다른 건 안 아까워도 라이터는 아까웠달까. 원래가 그렇다. 20000원짜리 치킨 하나는 시킬까 말까 고민하면서, 다이소에서 2000원짜리 예쁜 쓰레기는 10개를 산다. 그러니까, 4500원 담뱃값은 안 아까운데 1000원짜리 터보라이터는 아깝다. 기름을 채워 계속 쓸 수도 있고 무엇보다 뒤퐁- 하며 간지 나는 지포라이터는 버리기가 아까웠다. 뭐.. 죄는 사람이 지었지 라이터는 죄 없잖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부싯돌을 탁탁 돌리는데 불이 나오지 않았다. 아, 어제 기름 채우는 걸 까먹었다. 같이 마시는 친구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며, 이미 캡슐을 깬 담배를 다시 넣으면 맛이 없어질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당연히, 불을 빌려야지. 주변을 둘러보니 골목 구석에서 담뱃불이 살그머니 빛나고 있었다. 기광은 입에 문 담배를 손에 쥐고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공손히 물었다.

 

 

“저 죄송한데,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구석에서 홀로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 사람은 라이터를 건네며 말했다.

 

“그럼 제 고민 좀 들어줘요.”

 

라이터를 친구가 승진 턱을 낸다는 그날, 우연히 그 이자카야에 갔고, 그 시간에 우연히 담배를 피우러 나갔으며, 또 우연히 라이터의 기름이 없었다. 이런 우연 아닌 우연들이 쌓여서

 

“네?”

 

양요섭과 이기광은 만나게 되었다.

 

 

 

“고민이요. 할까요, 말까요?”

 

주어와 목적어는 어딜 그리 바삐 갔는지 서술어만 남아 있는 질문에 기광은 당황했다. 갑자기? 나한테? 웬 고민? 뭘 하는데? 일단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돌려주며 기광은 답했다.

 

“뭐를... 요?”

 

“뭐든 간에요.”

 

요섭이 담배 연기를 뱉고 말했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지? 담배 한 번 피려다가 또라이랑 대화하게 됐네. 요섭에 대한 기광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그래도, 불도 빌려줬고 쌩까고 멀리 떨어져 담배 피우기도 좀 그래서

 

 

“하세요.”

 

라고 답해줬다. 혹시 뭐 주어가 ‘살인을’ 이런 건 아니겠지? 그래서 내가 별생각 없이 말한 하라는 말에 누군가 죽는 건 아니겠지? 약간 관상이 좀... 또라이 같은데. 특기가 망상과 공상인 기광은 담배 맛도 못 느끼며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자신에게도 일정의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번호 좀 주세요.”

 

 

그리고 그 생각들을 깨고, 기광의 N년의 흡연 기간이 무색하게 기침을 하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허리를 숙이고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는 기광을 무심히 보던 요섭은 등을 탁탁 두드려줬다. 아니, 뭐 토하냐고.

 

“아아, 크흠. 뭐라구요?”

 

“약간 말할 때 되묻는 타입인가 봐요?”

 

 

아니, 계속 한 번에 납득이 안 가는 말들만 하고 있잖아요. 납득이 안 가. 납득이. 기광이 어이가 없어 황당해하고 있자 요섭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쪽이 마음에 드니까, 번호 좀 달라구요.”

 

 

무슨... 처음 보는 사람한테 번호 달라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고 공손치 못하게 말하지? 것보다 여기 대한민국 맞아? 나... 되게 게이같나? 티가 나나? 게이들한테는 게이더가 있다고들 한다지만. 내가 이자카야를 온 게 아니라 게이클럽을 왔던가? 짧은 시간이지만 요섭과 대화를 하면서 기광은 계속 말문이 막히기만 했다. 어디 가서 말 못 한다거나, 이해 못 한다는 말 들어본 적 없는데.

 

“안 줄 거예요?”

 

“네.”

 

 

내가 게이로 보이냐(게이 맞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내가 왜 번호를 줘야 하냐 등등, 하고 싶은 말을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할말하않. 늙은이가 됐다는 것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자꾸 배우려고 함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왜요?”

 

 

당연히 알겠다, 죄송하다. 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왜냐는 원초적인 질문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와다다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기광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사회생활 N년차, 이런 또라이들 상대하는 법쯤이야 안다 이거야.

 

“번호 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도 못 했을 거다. 한 방 먹은 듯한 요섭이 처음으로 말없이 곰곰이 생각했다. 이겼다고 생각한 기광이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자자고 할 건데요.”

 

 

아, 이건 진짜 내가 이길 수 없는 또라이다. 이 사람은 찐이다. 기광의 뇌리에 ‘잘못 걸렸다’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이기광은 과연 뭐라고 하고 벗어나야 하는가? 기광은 잠시 생각하다가

 

“01001050331이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번호를 말하고 빠르게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더 말을 해봤자 안 통할 것이며, 자신은 계속 얼타서 요섭에게 감길 거라고 판단했다. 빨리 번호를 불러주고 들어가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연락이 오면 그냥 차단하면 되는 거고. 기광은 빠르게 테이블로 돌아가 앉아서 소맥을 벌컥벌컥 마셨다.

 

“야 내가 지금 무슨 일이···.”

 

그리고 친구에게 방금 있었던 따끈따끈한 썰을 말하려고 했는데, 마치 테이블이 침대인 것 마냥 뻗어서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아, 진짜 되는 일 없네. 취한 사람 처리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데. 기광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친구의 핸드폰을 잡아 익숙하게 패턴을 풀었다. 단순한 새끼. 패턴이 ㄱ이 뭐냐, 이럴 거면 왜 걸어두는 거야. 그리고 최근 통화기록으로 들어가 마님♥ 이라고 저장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수씨, 죄송해요. 제가 진짜 지금 기가 다 빨려서.

 

“제수씨- 저 기광입니다. 네, 애가 많이 취해서요. 제가 지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네네. 네, 주소 보내드릴게요! 죄송해요, 네ㅡ.”

 

넌 내일 일어나면 꽤 시달리겠다. 미안하다 친구야. 기광은 친구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 겨우 부축해서 술집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혔다. 조금 기다리자 제수씨가 차를 끌고 와 친구를 태우고, 다시 한번 사과를 드렸다. 차가 출발하고 기광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또라이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휘몰아친 기분이다.

 

 

 

 

 

“아 라이터...”

 

라이터가 없다는 걸 또 까먹고 캡슐을 깨버리다니. 진짜 정신없네.

 

“라이터 빌려줘요?”

 

설마 하며 뒤를 돌았을 땐,

 

“이제 혼자죠?”

 

라이터를 건네며 그 또라이가 서있었다.

 

“하, 또 왜요.”

 

“되게 내가 먼저 말 건 것처럼 얘기하네요? 아까는 그쪽이 먼저 말 걸었는데.”

 

“아니 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어진 기광의 손에 붙들린 담배를 쏙 빼서 입에 물려주곤 불을 붙여줬다. 이 일련의 과정들에서 기광은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라이터를 사죠. 혹시 작업 거는 기술인가?”

 

“허, 참. 저기요, 라이터 있는데 깜빡하고 기름을 안 채워서 빌린 거구요. 작업은 그쪽이 먼저 걸었어요.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맞네.”

 

 

더 이상은 못 참겠어서 받아쳤더니, 돌아오는 대답에 괜히 허무하고 부들댔던 자신이 왜인지 창피해서 기광은 그냥 친히 불을 붙여준 담배를 빨았다.

 

“내일 주말이라 일도 안 할 텐데, 저랑 한 잔 더 할래요?”

 

“제가 왜요?”

 

“보니까 취하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취해서 가버렸고. 이렇게 집에 가기는 아쉬울 거 아니에요. 저도 그쪽이랑 같은 상황이어서.”

 

 

이것 또한 맞는 말이긴 하다. 분명 취했었는데 요섭과 대화를 나누고 취한 친구 뒤처리를 하고 나니 술이 다 깨버렸다.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집에 가면 잠은 안 오고 머리만 아플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혼술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좀... 차라리 혼술이 낫지. 매몰차게 거절하고 빠르게 집으로 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주 좋아하는 거 있어요?”

 

아- 모르겠다. 납치당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걸어왔지만 진짜 지금 여기에 대체 왜 왔는지 모르겠다. 홀린 것이 분명하다. 사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구미호였던가. 꼬리를 찾자. 구미호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구미호 나온 전래동화는 안 봤는데...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봤는데. 거기서 이승기가 어떻게 했더라?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 차리자, 이기광.

 

“아뇨, 아무거나 주셔도 돼요.”

 

그러니까 기광은 지금 호랑이 굴 아니 또라이의 집에 와버렸다. 자신도 왜 왔는지 모르겠다. ‘말렸다’라고 생각이 들어버렸을 땐 이미 신발 벗고 들어와 자리에 앉고 난 후였다.

 

“술은 소주? 맥주? 소맥? 와인? 막걸리? 뭐요?”

 

“아까 소맥을 먹어서, 소맥 먹을게요.”

 

 

 

어쩌다 같이 마시기로 결정이 되고, 술집을 가려 하니 자기네 집으로 가면 술이 종류별로 있다며 안주도 기막히게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넘어간 건 아니고···. 어쨌든 진짜였다. 술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술만 있는 냉장고가 있었다. 그것도 술마다 두, 세 종류씩 있었다. 뭐 바를 운영하나.

 

“며칠 전에 친구들이랑 술을 마셔서 안주로 먹을 만한 게 없네요.”

 

요섭이 사과, 배 등을 깎아 과일 안주를 내오며 말했다.

 

“배불러서 과일이 더 좋아요.”

 

되게 예쁘게 깎았네. 요섭은 소맥을 타 기광의 앞으로 잔을 밀어주었다. 그리곤 잔을 내밀었다.

 

“짠.”

 

 

이왕 온 거 술만 딱 마시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잔을 맞부딪혔다. 술을 들이 킨 기광은 생각했다. ‘아, 좆됐다.’ 흔히들 술이 달면 큰일이라고 했다. 아까는 안주가 맛있어서 술이 술술 들어갔는데 지금은 술만 마셨는데도 달다. 이 사람 약 탄 거 아니야?

 

“술이 다네요.”

 

뭐야, 읽힌 건가. 기광은 아무 말 없이 사과를 집어 베어 물었다. 꿀 사과인가. 사과도 다네.

 

“근데 이름이 뭐예요?”

 

“네?”

 

“입버릇이에요? 들었으면서 자꾸 되묻는 거?”

 

“아니, 자꾸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같이 술 마시는 사이에 이름 묻는 게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계속 그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정 없게.”

 

“질문도 흐름이라는 게 있어야지, 별안간 툭툭하니까 그렇죠. 그리고 우리가 뭐 정이 있어야 할 사이도 아니잖아요.”

 

 

기광의 말이 끝나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기싸움도 오랜만이었다. 가만히 기광을 쳐다보던 요섭은 픽하고 웃더니 기광의 잔을 가져가 술을 따라줬다.

 

“알겠어요.”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사람 무안하게 갑자기 꼬리 내릴 건 뭐야. 나만 유치해 보이게. 기광도 요섭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기광이에요.”

 

요섭이 또다시 잔을 들고 말했다.

 

“양요섭입니다.”

 

유리잔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 좆됐다.’ 분명히 이 생각을 전에도 한 것 같은데 기광은 또 좆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이 네임 이즈 딕. 씨발. 이건 진짜 좆됐다. 분명히 좆됐다. 이건 확실하게 좆됐다. 그냥 나가 죽자. 그게 더 편할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불효자는 갑니다. 사망보험금으로 효도하고 가겠습니다. 세상아 안녕, 미련 없이 떠난다. 생각으로는 이미 자결하고 남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일단. 일단 수습을 해보자. 난 어른이고, 성인이잖아.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꿈에서 깨 눈을 떴을 때 펼쳐진 상황이 너무 충격이라 까먹었다. 조상님이 로또 번호라도 불러주신 꿈이면 어쩌지. 조상님 죄송한데 내일 다시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조상님도 지금 이 꼴을 보면 노하셔서 다시 안 나와 주실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무슨 상황이냐면. 눈을 뜨니 집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방, 푹신한 침대, 어쩐 일인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의 나체, 그리고··· 내 옆에 누워 있는 다른 이의 나체. 조상님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테니까 한 번만 더 나와주세요.

 

잔 걸까? 아니야, 그냥 더워서 벗었겠지. 나 원래 잘 때 벗고 자잖아. 근데 왜 양요섭도 벗고 있지? 잔 거겠지? 아니 분명 술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자겠어. 빼박이야, 잔 거야 이건. 29살의 이기광이 그럴 리가 없어. 무슨 스무 살 애도 아니고. 그래, 나를 믿자. 일단 옷을 입고 빨리 집으로 가자.

 

결론을 내리기가 무색하게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와 일어서자마자 허리가 뻐근하고 안쪽 다리가 후들거렸다. 씨발, 진짜 했잖아. 그리고 몸이 알려주는 느낌에 증거를 더해 ‘양요섭과 이기광이 섹스를 했다‘라는 문장은 팩트가 되었다. 침대 밑에 널브러진 옷을 입으니 보이는 예쁘게 묶인 콘돔들. 들. 콘돔. 아니고 콘돔들. 단수 아니고 복수. 이 와중에 엄청나게 해댔구나. 그러니 이렇게 아프지.

 

옷을 들고 거실로 나와서 조용히 입었다. 혹여 기광의 소리에 요섭이 깨서 마주친다면 정말 최악일 테니까. 옷을 입자마자 신발을 신고 나왔다. 도어락 소리에라도 깰까 싶어 손으로 잠금장치를 돌려서 열었다. 진짜 현타 온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억을 더듬었지만 어쩌다 섹스를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광이 더 빡이 치는 건 섹스를 하면서 좋아했고, 신음소리를 흘려대던 장면들은 문득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진짜 짐승이냐. 오랜만에 해서 좋긴 좋았겠지... 무엇보다 잘했던 것 같다. 이내 기광은 자신의 머리를 세게 벽에 박았다. 아프다. 기억을 잃을 거면 통째로 잃든가. 선택적 블랙아웃은 더욱 괴롭다.

 

 

 

 

 

 

 

 

 

 

 

기광은 집에 오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정이 오고 갔다. 자괴감에 빠졌다가, 화가 났다가, 우울했다가, 욕을 하다가, 자학하다가 이내 합리화까지 와버렸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아, 나이가 몇인데 그럴 수 있긴 뭘 그럴 수 있어.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하다 보니 곧 몸이 불어 터질 것 같았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운 기광은 더 이상 생각해 봤자 자신만 고통스럽다고 결론을 지었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뭐. 하룻밤 잘 즐겼다고 생각하자. 그래.

 

하지만 기광의 결론은 보란 듯이 내팽개쳐졌다. 꿈으로 도피하기 위해 눈을 감고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 울린 핸드폰 알림 소리 때문에.

 

[언제 갔어요.]

 

 

보지 말걸 그랬다. 그냥 스팸 문자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잘걸 그랬다. 기광은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핸드폰을 주워와 언제 갔냐는 다섯 글자를 한참 쳐다봤다. 어제 뻗어서 집에 간 친구가 보낸 문자일까, 어제 팀장보다 빨리 칼퇴 해서 온 팀장의 문자일까.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문자를 보자마자 든 생각을 애써 억눌렀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양요섭이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지? 아, 내가 줬지. 그걸 그 순간 듣고 저장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차단... 차단을 하자! 차단을 하려는 순간

 

[차단할 건 아니죠? 나 이렇게 먹고 버려지는 건가.]

 

 

맷돌의 손잡이를 왜 어이라고 부르는지 아느냐고 하던 영화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광은 아주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뭘 먹고 버려요? 이 사람 진짜 말 웃기게 하네. 당신이 그게 할 말이에요? 먹고 버린 건 그쪽이죠. 이러려고 집에 데려갔으면서 무슨.]

 

보내고 후회했다. 그냥 차단할걸..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보자.

 

[먹고 버렸으면 제가 이렇게 연락을 했겠어요? 그리고 기광 씨가 먼저 들이댔잖아요.]

 

나, 더 이상 못 참아. 기광은 문자를 읽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이판사판이야. 어디서 덮어씌워.

 

신호음이 두 번을 채 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

 

“저기요. 제가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죠. 뭐? 내가 먼저 들이댔어? 어디서 개수작이야. 애초에 나보고 번호 달라고 할 때도 자자고 했죠. 그리고 일부러 당신 집으로 데려간 거 아니야. 내가 그냥 다신 안 볼 사이고, 그래 뭐 하룻밤 즐겼다고 치고 넘기려고 했는데 이 사람 안 되겠네. 이게 수법이에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 다 끝났어요?”

 

“네. 말 다 끝났어요. 어디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입이 삐뚤어진 건 당신 같은데요. 기광 씨한테 자고 싶다고 하면서 번호 딴 건 맞아요. 근데 제가 뭐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고, 기광씨도 동의해서 집으로 온 거 아닌가요? 그리고... 저는 기광 씨랑 잘 생각 없었습니다. 그러려고 딴 거 아니에요.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요. 기광 씨 취해서 침대에 눕혔는데 갑자기 먼저 키스하더니 옷 벗겼잖아요. 저는 그냥 맞장구친 거예요. 저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까. 진짜 기억이 안 나서 이러는 거예요, 아니면 쪽팔려서 이러는 거예요. 후자면 그냥 제가 먼저 들이댄 걸로 할게요. 그게 기광 씨가 마음이 편하면.”

 

 

요섭의 말을 들은 기광은 다시 한번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말들을 뱉을 수는 없었다. 왜냐면 기억이 났거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은 이내 선명해져갔다. 술이 달더라니, 빠른 템포로 술을 마셔댔다. 그리고 술기운과 잠이 쏟아졌다. 요섭이 자신을 깨우던 목소리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들리는 몸. 푹신한 침대. 머리를 베개에 조심히 눕혀주는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미친 이기광. 진짜 짐승 맞구나.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거지? 진짜 죽자. 말만 죽자고 하지 말고 정말 죽어버리자. 살면서 이렇게 쪽팔릴 수가 있나? 기광은 이 상황을 도저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광의 기억이 돌아온 것을 눈치챘다는 듯 요섭이 운을 뗐다.

 

 

“정말 기억이 안 났던 거였네요. 지금은 기억이 난 것 같고... 몰랐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일단, 해장은 했어요? 속 많이 쓰릴 텐데.”

 

“...”

 

“쪽팔려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

 

“그럴만해요. 나 같아도 너무 쪽팔리고 미안할 것 같다.”

 

“... 쪽팔리고 조금 미안하긴 한데 재수 없네요.”

 

“이 와중에 질 수는 없고.”

 

전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 정말 말을 재수 없게 하는 특기가 있다. 말투가 재수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재수 없게 하는데 진짜로 재수가 없는 거다.

 

“해장이나 할래요? 미안하면 해장국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않나.”

 

“미안한 건 미안하지만 싫은데요...”

 

“아ㅡ, 기광 씨가 테이블에 토한 거 제대로 안 닦았지. 이거나 닦···.”

 

“사줄게요. 사준다고요. 일단 나와요.”

 

“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우리 집 알아요?”

 

“네. 어제 말해줬잖아요.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 전화하면 나와요.”

 

아, 이기광.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 거야? 그렇게 말 많은 편도 아닌데... 대체 왜. 진짜 구미호가 맞는 건가. 처음 본 사람한테 집까지 얘기하고, 토도 하고, 섹스도 하고. 최악이다.

 

 

 

 

 

 

 

 

기광은 너무 창피해서 요섭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지만 나가야 했다. 꾸역꾸역 옷을 입고 나오라는 전화에 나갔더니 단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집도 가까워... 밥만 사주고 이제 다시 마주치지 말자고 하자. 어쨌든 사과는 해야 하니까.

 

“집 주변에 괜찮은 해장국집 있어요?”

 

“... 따라오세요.”

 

 

 

기광이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늘 가는 작은 해장국집에 갔다. 여기에 누구를 데려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장국 두 개를 시키고 말없이 물만 마셨다. 맞은편에 앉은 요섭이 자꾸 진득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하, 그냥 말을 해요. 쳐다보면서 사람 눈치 주지 말고.”

 

“뭐가요. 내가 언제 눈치를 줬다고?”

 

“미안해요. 내가 먼저 키... 들이 대놓고 적반하장으로 군 것도 미안하고! 토한 것도 미안하고!”

 

“토한 건 뻥이에요.”

 

“뭐라고요?”

 

“저 안 보려고 할 것 같아서. 뻥친 건 저도 미안합니다.”

 

당했다. 기광은 이제 더 이상 화도 나질 않았다. 그냥 속이 쓰리고 배가 아팠다. 현타와 창피함이 사그라들자 그에 눌려있었던 숙취와 허기짐이 몰려왔다. 그래, 밥이나 먹자. 그러고 꼭 다시 보지 말자고 말하는 거야.

 

 

 

“천천히 좀 먹어요. 누가 안 쫓아와요.”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어서요.”

 

해장국이 나오고 기광은 말도 없이 거의 마셔댔다. 기광이 얼추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요섭도 내려놨다. 거의 먹지도 않았네.

 

“더 먹어요. 먹는 사람 두고 먼저 집에 가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에요.”

 

“다 먹었어요.”

 

“아니, 사달라고 했으면서 그게 뭐예요.”

 

“저 사실 해장국 별로 안 좋아해요.”

 

“뭐야, 그럼 왜 사달라고 했어요?”

 

“그냥요.”

 

싱거운 대답에 기광은 기가 찼다. 그럼 그래요. 하며 기광이 일어서자 요섭도 일어섰다. 계산을 하고 나와 기광은 숨을 들이쉬었다. 자, 말하자.

 

 

“들어가요. 연락할게요.”

 

하지만 요섭이 선수를 쳤다.

 

“네? 아, 아니. 왜요?”

 

요섭이 또 되묻는다고 할까 봐 기광은 급히 대답했다.

 

“기광 씨 마음에 드니까요.”

 

“전... 싫은데요.”

 

“저 싫어요?”

 

“아니, 뭐 싫다고 그렇게 막 딱! 매정하게 말하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좋은 거네요.”

 

“그건 진짜 아니구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연락받는 게 어때요? 제가 뭘 어떻게 하자는 것도 아닌데.”

 

“... 알겠어요.”

 

“네. 맛있게 먹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그렇게 말한 요섭은 정말 휙 하고 돌아서 갔다. 뭐지? 뭔가 낚인 기분이다. 이게 아닌데. 왜 자꾸 내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저 사람이랑만 있으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기광은 그대로 집에 들어와 뻗어 잤다. 일어나니 저녁이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자보긴 또 오랜만이네. 기광은 시간이 애매해서 뭘 하기가 그래서 오랜만에 미뤄둔 집안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네. 뭐 바로 연락할 것처럼 굴더니.

 

 

기광은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고 시간을 보니 10시였다. 아직도 속이 좋지는 않아서 대충 끼니를 때웠다. 씻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뭐야, 아직도 자나.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켜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왜 아무런 연락이 없지?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이 지나 월요일. 그리고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요섭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아닌데, 연락을 하겠다고 당당히 말해놓고 오지 않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기다리는 건 진짜 아니었다. 괜히 사람 찜찜하게 하고 있어. 잘 됐지 뭐. 어차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함께 어울리는 동료들과 간단히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에 먹는 삼겹살에 기광은 또 술이 술술 들어갔다. 그날 이후 다시는 취할 만큼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아, 좆됐다.’ 분명히 이 생각을 전에도 한 것 같은데 기광은 또 좆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이 네임 이즈 딕. 씨발. 이건 진짜 좆됐다. 분명히 좆됐다. 이건 확실하게 좆됐다. 요 며칠 사이 기광은 대체 몇 번 좆됐는가. 일어나 보니 이제는 익숙한 그 방이었다. 조상님은 다시 안 나오실 것 같다. 아, 나 왜 여기 있지? 목이 말라 눈을 뜨니 자신은 또 나체로 누워있었으며, 그 옆엔. 나체의 양요섭이 또.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기분이 좋을 만큼 얼큰히 취한 기광은 핸드폰을 들어 문자함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아! 신이시여! 아니, 신은 없다. 신이 있으면 내가 또 이런 실수를 하게 만들 리가 없다. 다행히도 출근 시간 전에 깼다. 기광은 일단 집에 가면서 생각하자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거, 데자뷔야? 옷을 주섬주섬 줍고 있던 기광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또 몰래 나가게요?”

 

“악!”

 

“거봐, 나쁜 짓 하려니까 놀라잖아.”

 

“왜 사람을 놀래 켜요!”

 

“저는 그냥 말한 것뿐이에요. 괜히 찔려서 놀란 거지.”

 

“제가 뭘 찔려요!”

 

“저번처럼 나 버리고 그냥 가려고 했잖아요.”

 

“아니... 제가 왜 또 여기...”

 

“기억이 또 안 나시나 봐요? 어떻게 됐냐면...”

 

“아 저도 알아요! 물어본 거 아니에요. 그냥... 한탄이었어요.”

 

 

 

꼼짝없이 붙잡힌 기광은 그대로 요섭이 차려주는 아침밥까지 먹고 출근을 했다. 요섭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 면목이 없었다. 나 요즘 진짜 몸이 좀 달아오르는 건가? 왜 이리 본능에 충실하지?

 

 

 

 

 

 

 

 

 

 

 

 

그리고 현재로 돌아온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발전 없는 기광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요섭과 섹스를 했다. 전과 달라진 것은 술을 먹지 않아도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흘러갔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평일은 보통 둘 중 한 명이 술을 마시거나, 둘 다 마신 채로 만난다. 그리고 주말은 요섭이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티비를 보다 섹스를 하고 잔다. 이렇게 두 달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섹스만 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 그런... 미묘하고... 애매하고... 그런... 그래서 지금 자신이 요섭과 썸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섹파라고 하기에는... 그래. 솔직히 요섭이 좋아졌다. 그리고 요섭도 자신을 섹파로만 보고 있지는 않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기광은 지금 이 사이를 썸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것이다. 썸인데 할 건 다해서. 그리고 썸이라고 하기에 섹스 말고 대단히 한 것은 없어서.

 

둘의 사이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다. 오늘 월급 루팡 톡톡히 했네. 결국은 결론이 나질 않았다. 집에 도착했는데 요섭에게 문자가 왔다.

 

[치킨 사들고 가는 중.]

 

오늘은 하고 싶지가 않은데... 이미 오는 중이라고 하니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오랜만에 치킨이 먹고 싶어서요.”

 

문을 열자 요섭이 치킨을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티비를 보며 치킨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기광이 먼저 씻고 침대에 누워있자 요섭이 씻고 나왔다. 어느새 서로의 집에 각자의 칫솔과 잠옷이 구비되어 있었다. 요섭이 누워있는 기광의 머리에 손을 집어넣어 팔베개를 했다. 아, 도저히 오늘은 내키지 않는다.

 

“오늘은 별로 안 하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에상과 다르게 너무 쿨하고 빠른 대답에 기광은 놀랐다. 하려고 왔을 텐데 자신이 안 한다고 하면 허무하려나? 집에 보내는 게 낫나? 기광이 고민을 하던 중 요섭이 말을 걸었다.

 

“고민이 뭔데요?”

 

“고민 없어요.”

 

“에이, 나 고민 있다! 하고 티를 내고 있는데요.”

 

“어른의 연애는 뭐라고 생각해요?”

 

“어른의 연애라... 어렵네요.”

 

“그냥 친구가 묻길래요. 썸... 같은데 연애로 이어지지가 않는데요.”

 

“음... 사귀자고 말을 하지 않는 거?”

 

“그게 뭐예요.”

 

“솔직히 우리 사귀자! 하고 말하고 그날부터 사귀는 거 너무 어린애들 같고 남사스럽잖아요. 사귀자고 말을 하지 않아도 연애가 시작되는 거. 제가 생각하기에 그게 좀 어른의 연애 같은데.”

 

 

기광은 이렇게 눈치를 줘도 저렇게 열심히 답하는 걸로 봐서 요섭은 정말 둘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기광은 자신만 요섭과의 관계를 고민했던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양요섭과 이기광은 정말 섹파인 걸까. 이럴 거면 그냥 집이나 가지. 왜 다정하게 자신이 고민 있는 걸 눈치채고, 또 들어주고 있어.

 

“우리처럼요.”

 

“네?”

 

“뭐가요?”

 

“뭐요?”

 

“뭘요. 갑자기 왜 이래.”

 

“방금 했던 말이요.”

 

“뭐가요?”

 

“그전에!”

 

“우리처럼?”

 

“우리 사귀나요?”

 

“아니에요?”

 

“아니... 아니! 왜 마음대로 사겨요!”

 

“저... 차이는 건가요?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저 이용당했나요?”

 

“그 말이 아니라. 하... 아니 와. 진짜 바보 같았다.”

 

“왜요.”

 

“아니, 사귀자는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사귀는 걸 알아요.”

 

“당연히 사귀는 거 아니에요?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잠도 자는데.”

 

“저는 우리가 썸인지 섹파인지 고민하고 있었다구요.”

 

“아, 그래서 아까 그런 얘기를 한 거였구나. 그게 고민이었어요?”

 

“왜 이렇게 담담해요!”

 

“그럼 나는 나 혼자 연애했다는 거네. 연애처럼 할 거 다 해놓고 연애라고 생각 안 하고 있었다는 게... 제가 더 상처인데요.”

 

“우리가 뭐 데이트를 했어요, 매일 수시로 연락을 해요. 전형적인 연애랑 너무 다르니까, 당연히 모르죠. 그리고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아냐구요.”

 

“아 기광 씨 그런 거 좋아해요? 그럼 이제 그렇게 해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미안해요. 나는 당연히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자신이 썸과 섹파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요섭은 홀로 연애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수시로 연락은 안 해도 매일 하고 있긴 했다. 아침과 점심에 몇 통 그리고 저녁에는 만나고. 두 달 동안 일주일에 세 번은 만났는데 그리고 둘의 집을 오고 가며 지냈는데. 각자 회사원이기 때문에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기도 했다. 기광도 나서서 어딜 가자, 뭘 먹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삽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쨌든 더 이상 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광은 웃음이 나왔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네요.”

 

“그렇죠.”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전에 연락한다고 해놓고 왜 연락 안 했어요?”

 

“밀당이요. 처음에 마음에 드는 티 냈으니까. 기광 씨도 저 마음에 드나, 안 드나 기다렸죠.”

 

“이 사람 고수네.”

 

“이제 못 기다리겠어서 연락하려니까 먼저 오던데요. 술 마시고.”

 

“아. 이제 말하지 마요.”

 

“저는 먼저 연락 와서 또 막 저 덮치길래 기광 씨도 저한테 마음 있구나 하고 당연히 사귀는 줄 알았죠.”

 

 

생각해보면 요섭은 저를 좋아하는 티를 냈다. 자신이 이 관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싶어 고민을 하느라 확신으로 느끼지 않은 것이지. 어찌 보면 서로 호감의 표현을 하고, 그걸 서로 느꼈으며, 할 거는 다 했다. 연애였다.

 

 

“근데 기광 씨 수시로 연락하고, 데이트하고, 사귀는 날짜 세는 거 좋아해요? 귀엽네요.”

 

“놀리지 마요.”

 

“제가 헷갈리게 했다면 저도 미안해요.”

 

“... 알았으니까 됐어요.”

 

기광이 요섭에게 폭 안겼다. 빠른 심장 소리, 따뜻한 서로의 체온. 기광이 요섭에게 파묻혀 말했다.

 

“우리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럼 알아갈까요?”

 

“어떻게요?”

 

“지금부터 서로 질문하고 답하기. 저부터 할게요. 무슨 음식 좋아해요?”

 

“삼겹살이요. 요섭 씨는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취향과 성격에 대해 질문하고 답했다. 재미있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 서로를 다 알기에는 부족하지만 그저 침대에 누워 서로 도란도란 얘기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무슨 계절 좋아해요?”

 

“봄이요.”

 

“왜요?”

 

“유치하지만 벚꽃 보는 거 좋아해요. 벚꽃나무 자체도 예쁘고, 잎이 흩날리며 떨어지는 것도 예쁘고요. 그냥 봄의 분위기를 좋아해요.”

 

“... 그렇게 안 생겨서 되게 감성적이네요.”

 

“무슨 뜻이에요 그거.”

 

“아무 뜻도요. 전 봄 싫어해요.”

 

“왜요?”

 

“봄에 전 애인이랑 바람 나서 대차게 싸우고 헤어졌거든요. 벚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 뒤로 벚꽃만 보면 기분이 안 좋아요. 자꾸 힘들었던 그 때가 생각이 나서.”

 

“현 애인 앞에서 전 애인 얘기라...”

 

“지금은 다 지난 얘기예요. 왜요, 질투 나요?”

 

“바람난 개새끼를 질투해서 뭐해요.”

 

“욕하는 거 좀 섹시하다.”

 

기광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저랑 같이 봄 좋아하게 될걸요.”

 

“왜요?”

 

“나랑 봄에 사귀었으니까.”

 

“... 우와. 양요섭 씨 생각보다 되게 유치하네.”

 

“연애는 유치하게 하는 거예요. 누가 그런 걸 좋아해서.”

 

 

 

사실 이미 봄이 좋아졌다.

당신이 봄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토록 싫어했던 봄도 한 순간에 좋아진다.

나는 앞으로 당신과 함께 맞이할 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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