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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추억된 계절

엄마가, 명의 이전 하셨어. 요섭의 어머니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요섭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을 시점,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아주머니는 나를 따로 불러 말한 적이 있었다. 요섭이가 남자랑, 그것도 내 친구 아들이랑. 그러는 거 못 보겠다. 냉랭한 말투였다. 저에게 제 아들 앞길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떨어지라는 말에 레지던트 기간 동안은 오프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꾸역꾸역 병원에 붙어 살았는데. 그러길 몇 년, 결국 방을 따로 구해 독립까지 했건만. 공동명의는 또 무슨 소리인가. 요섭은 친자니 어떻게 보면 그 집은 요섭의 단독명의가 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왜.

 

 

 

 

 

" ... 나는, 안돼. "

 

" 응? "

 

" 그 집. 네 단독명의로 바꿔. "

 

" ... ㅎㅎ "

 

" ...? 왜 웃는 거야? "

 

 

 

 

 

아, 아니. 내가 생각한 반응이랑 너무 똑같아서. 역시 너답다싶었어. 요섭은 언제나 제 요구사항을 먼저 알아차리곤 했다. 이젠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몇 년 같이 안 살았다고 십 여년의 흔적이 없어지진 않나보다. 그래 그럼. 억지로 명의 나눠 갖자고는 안 해. 일단, 오늘은 뮤지컬 보러 온 거니까. 그 얘긴 잠시 미뤄두자. 벌써 공연시작 10분전이었다. 좋아하는 아이와 벚꽃이 만개한 대학가 길가에 서서. 20분동안 한 얘기가 부동산이라니. 진짜 무드 없다 양요섭.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꼬리가 귀에 걸린 요섭이었다. 기광은 애써 오랜만의 나들이를 즐기려했지만 아까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입술이 살짝 튀어나와있었다. 우물쭈물 손장난을 치고 있는 기광을 보며 살짝 웃어 보인 요섭이 기광에게로 다가가 손을 낚아채 공연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어... 어, 어. 요섭아아...!

 

 

 

 

 

" 너 손동운 감당 가능해? "

 

" 어...? 아, 아니... "

 

" 그럼 재밌게 보고 와야지. 안 그래? "

 

 

 

 

 

저를 위해 일부러 장난 섞인 농담을 던지는 요섭에 기광이 비로서 활짝 웃어보였다. 그래! 재밌게 보고 자랑해야지. 얼마만에 잡아보는 손인지. 기광도 오늘만큼은 이 손을 빼내고 싶지 않았다. 날이 너무 좋았고. 처음 보는 뮤지컬이 너무 좋았고. 이 완벽한 순간 함께 있는 이 아이가 너무 좋았으니까. 뮤지컬은 감동적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집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남녀가 맞는 비극적인 결말. 그러나 요섭은 뮤지컬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 옆에서 공연에 한껏 집중해 눈을 반짝이는 기광을 구경하다보니 무대 위 줄리엣은 이미 죽어버린 로미오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앞내용은 거의 안 보다시피 했는데, 절정에 다다른 장면에 요섭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진다. 사실 기광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못 본 것도 있지만, 뮤지컬의 내용이 너무나 저와 기광의 이야기 같아서,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혹시라도 우리의 결말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적이진 않을까.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결국 관람은 포기하고 기광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던 것 이었다.

 

 

 

 

 

" 아, 재밌었다. 그치? "

 

" 응. 뮤지컬은 처음 봤는데 재밌네. "

 

" 벚꽃도 이쁘구. "

 

 

 

 

 

오늘 기분 진짜 좋아. 바람이 살랑이자 기광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린다. 저를 살짝 돌아보고서 가로로 긴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는 기광에 요섭이 다시금 기광의 손을 마주잡는다. 우리, 벚꽃 보러 가자. 오늘만을 손꼽으며 기다린 이유. 한 손은 기광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손은 적당히 두꺼운 봄 코트 주머니 안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색의 이어커프를 만지작거린다. 여기서 10분만 걸어가면 가로수길 있대. 요섭과 기광 둘 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손이 어색해 볼을 붉히면서도 마주잡은 손을 놓지않았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거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분홍빛 벚꽃이 잔뜩 흩날리는 가로수길에 도착하였다. 넓은 도로 양 옆에 일자로 나란히 심어져있는 거대한 벚나무. 벚꽃이 만개할 시기인지라 구름처럼 몽실몽실 차오른 벚꽃이 아름다웠다.

 

 

 

 

 

" ... 예쁘다아. "

 

" 응. 노을 지면 더 예쁘겠다. "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에 취해 눈을 감고 거리에 가득 풍겨오는 봄내음을 한껏 들이마신 기광이 하아. 후련한 듯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숨을 푸욱 내쉰다. 눈을 감고 있는 기광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요섭이 훔쳐보는 듯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저도 거리의 풍경을 둘러본다. 금요일 오후 대학가 근처 가로수 길은 사람이 많았다. 평소에도 많은 곳이었지만 벚꽃을 보러온 커플들이 더해져 넓다 생각되던 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한참을 구경하다보니 조금 피곤해졌는지 기광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앉아있다 가자고 제안했다. 나야 좋지. 생각보다 잘 풀리는 일에 요섭이 서둘러 근처를 둘러보자 가로수길 잔디 너머로 있는 도로변에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풍경은 가로수길 안 보단 별로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람이 없어 둘만 있기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 다들 걸어왔나 봐. 사람들에 비해 차는 별로 없네. "

 

" 우리야 좋지. 풍경도 생각보다 잘 보이고. "

 

" 벤치에 나무 한 그루만 있으니까 운치 있다. 책에서나 본 것 같아. "

 

" 그러게. 사람들 딱 사진 찍기 좋아하는 장소인데. "

 

 

 

 

 

멀리서 봤을 때는 벤치 하나에 나무 한그루만 덩그러니 있길래 도대체 왜 해놓은 거지 싶었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적당히 흩날리는 벚꽃을 맞고 있는 벤치가 제법 분위기 있었다.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는 신나서 찾았는데, 막상 둘만 있으니 오늘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 서로 귀만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다.

 

 

 

 

 

" ... 요섭아. "

 

" 어, 어? "

 

 

 

 

 

오늘. 너무 고마워. 고개를 땅에 처박고 저에게 동그란 뒷통수만을 보여주는 기광의 귀가 빨갛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얀 캔버스화를 신은 발을 꼼지락 거리며 저 혼자 장난을 치던 기광이 저를 쳐다보며 발그레 웃어 보인다. 인정받은 기분이야. 지금 저를 쳐다보는 기광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왜, 눈은 울 것만 같아보일까. 요섭이 홀린 듯 제 손을 들어 기광의 눈가를 쓰다듬어주자 올망이던 큰 눈에서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 ... 울어도 돼. "

 

 

 

 

 

저들의 등 뒤에 위치한 가로수 길에는 벚꽃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했지만 그곳과 거리가 있어서인지 저와 기광이 앉아있는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잔디가 쓸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제 큰 손에 얼굴을 묻은 기광에게서 점차 들려오는 애달픈 흐느낌이 더해진다. 다정하게 제 얼굴을 매만져주는 요섭의 손을 맞잡은 기광이 자신의 얼굴만 한 요섭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부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 앞에서 무너져 서럽게 우는 기광을 보니 안쓰러웠지만, 아직 화창한 날씨 아래 간간히 떨어지는 벚꽃 잎을 맞으며 제 손을 적시는 기광의 얼굴이 너무나도 예뻤다.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저가 미우면서도 좀 더, 좀 더 이 아이를 제 품 안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 몸을 기광 쪽으로 완전히 돌린 요섭이 떨려오는 기광의 어깨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긴다. 힘없이 딸려오는 기광이 요섭의 어깨에 눈가를 부비며 안겨온다.

 

 

 

 

 

" 기광아. "

 

 

 

많이 힘들었지.

 

 

 

그 동안, 너무 외로웠지.

 

 

 

작고 여린 너에게 많이 고달팠을 길들에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 앞으로는, 함께 걸어가 보자.

 

 

 

" 이기적인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 "

 

 

 

 

 

우느라 진이 다 빠져 저에게 몸을 실고 있는 기광의 양 볼을 감싸 쥔 요섭의 입술이 도톰한 기광의 입술 위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때, 반쯤 풀려있던 기광의 눈이 크게 뜨이며 저를 밀어낸다. 갑작스런 기광의 행동에 요섭이 기광아? 라고 부르기도 전에 기광이 홀린 듯이 어디론가 튀어나간다. 기광이 달려간 곳으로 시선을 좇자, 저들이 앉아있던 벤치 바로 앞 도로 위. 가로수길 잔디에서 굴러온 듯 해 보이는 공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도로 한가운데로 종종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십 미터 뒤로, 남자아이를 향해 휘청거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보였다.

 

 

 

" 기광아! "

 

 

 

 

 

전속력으로 달려 아이를 감싼 기광이 달려오는 트럭을 피하려 하지만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트럭을 몇 초 사이에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이의 머리를 꼬옥 감싸 쥔 기광이 눈을 꾹 감는다. 요섭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꾹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대낮임에도 켜져 있는 헤드라이트가 기광을 비추며 요란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퍼억-

 

 

 

 

 

쿠당탕, 끼이익--!!! 쿵!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갑자기 훅 밀쳐진 기광의 몸이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세게 부딪혀온 단단한 바닥에 기광이 앓는 소리를 낸다. 한참을 운 탓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이미 제 몸을 가두지 못하는 트럭에 치였어야했다. 트럭에 치인 제 몸은 몇 십 미터를 날라 바닥에 처박혔어야 했다. 제발, 아까 등 뒤로 느껴진 커다란 손의 감각이. 네가 아니길 바라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 ...!! "

 

 

 

 

 

도로 위 처참하게 부서져 나동굴고 있는 트럭이 보였다. 트럭과 좀 떨어진 곳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구급차를 부르는 듯 황급히 전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중심,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요섭이 보인다.

 

 

 

 

 

" 요섭아!! "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깨진 무릎은 중요하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아이를 안고 일어나 요섭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철퍼덕.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는 기광이 순순히 앞으로 나아가게 두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쓰러져있는 저에게 사람들이 달려온다. 학생! 괜찮아요? 달려온 사람들이 제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아이를 데려갔다. 사람들의 부축으로 겨우 일으킨 몸을 억지로 끌어 다시, 요섭에게로 갔다. 또 넘어졌다. 무리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저. 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선 힘겹게 뜬 눈으로 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요섭에게로 가야만 했다.

 

 

 

 

 

" ㅇ, 요섭, 요서바아... "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려왔다. 눈물은 주체할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걷질 못하니 기어서라도 요섭에게로 향하자, 부축해주던 남자가 기광을 안아들어 요섭의 옆에 데려다주었다. 쓰러지듯 바닥으로 내려온 기광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요섭의 셔츠를 쥐었다. 엄청난 충격을 한번에 받은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저 많이 다쳤다. 정도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광은 의사였다.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살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른다. 의사의 진단으로 요섭은 위독했다. 아니, 가망이 없었다. 장비도 없는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직감하자 무력감에서 오는 좌절감이 무서울 정도로 치달았다. 무서웠다. 매일 보던 피였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벌벌 떨고만 있는 제 몸뚱이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처절한 기광의 모습에 웅성거리던 사람들마저 고요해졌다. 몇몇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아프게도 울어대는 기광의 모습에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 ...ㄱ, 기... 과, ㅇ... "

 

" 마, 말, 말 하,지마, 상처 벌, 어져, "

 

" ㅇ, 거... "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쥔 손이 기광의 무릎 위로 힘없이 떨궈졌다. 피범벅이 된 손 안, 은색의 무언가가 반짝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요섭의 손을 폈다. 고운 은빛의 이어커프 한 쌍이었다. 자그마한 금속은 요섭의 피에 아무렇게나 젖어있었다. 검붉은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은빛의 이어커프는 아름다웠다.

 

 

 

 

 

" ㅅ, 생, 일...콜럭! 커헉... "

 

" 제, 발...제발, 그만, 알, 았으, 니까. 마, 말 ㅎ, 하지, 마아... "

 

" 축, .. 하..ㅎ ... "

 

 

 

 

 

꾸역꾸역 목소리를 쥐어짜내던 목구멍이 울컥, 핏덩이를 토해낸다. 기광의 애원에 억지로 웃어보이던 요섭의 볼 위로 물줄기가 흐른다. 피를 덮어 쓴 요섭의 얼굴에 눈이 떠졌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요섭은 울고 있었다. 입 안 가득 차오른 피에 요섭이 고통스러워하자, 기광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요섭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갠다. 요섭의 얼굴을 잡고 있는 손이 안쓰럽게 떨려왔다. 그런 기광에게 입을 옅게 휜 요섭의 눈두덩이 위로 투둑, 눈물이 떨어진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요섭의 얼굴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기광이 입 안 가득 머금은 요섭의 피를 뱉어내며 눈가를 문지른다. 피를 빼내주길 몇 번, 드디어 숨통이 트였는지 요섭이 쇳소리가 섞인 숨을 힘겹게 몰아쉰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고 있는 듯했다. 나, 죽, 으... 면...

 

 

 

 

 

" 가, 갖, ㅈ... 말, 고... "

 

 

 

 

 

나, 주라. 본인도 알아차린 걸까. 정말 마지막 힘을 짜내 기어코 우리의 끝을 말하는 요섭이다. 나, 혼자 심심 할 텐데. 이거 보면서, 너 기다리고 있을게.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그냥, 잠깐, 헤어져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너도 혼자 기다리진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나한테 꼭 허락받고. 알겠지? 그만 울고. 넌 웃는 게 제일 예쁘단 말이야. 이제야 네 웃는 얼굴에 맘 놓고 예쁘다고 할 수 있었는데. 헤어지기 싫다. 그래도, 뽀뽀는 받고 가네.

 

 

 

 

 

" 바보야아... 흐윽, 흡... "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입만 달싹였지만 마주본 눈으로 요섭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은 듯한 기광이 더욱 서럽게 흐느낀다. 사랑해. 많이 못 말해줘서, 미안해. 많이, 많이 좋아해. 요섭의 위에 엎어져 애처롭게 사랑을 고백하는 기광의 위로 봄바람에 실려 온 벚꽃이 떨어졌다. 마치 오늘 본 뮤지컬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미 죽어버린 로미오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줄리엣.

 

 

 

그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둘.

 

 

 

 

 

사고가 난 지는 5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5분사이 기광과 요섭의 삶은 너무나 크게 변해있었다.

 

 

 

 

 

-

 

 

 

 

 

선홍빛의 벚꽃들이 무수히 흩날리는 아름다운 봄날, 그 사이에서 기광은 저 혼자 살갗을 찢고 들어오는 추운 겨울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긴급 콜을 받고 급히 내려온 두준이 제가 호출 받은 베드 위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너희가 여기를 와. 뮤지컬, 보러 간다며. 저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요섭의 작은 얼굴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못 알아볼 뻔 했다. 응급실로 실려 온 요섭의 손과 얼굴은 오열하느라 온 몸에 열이 오른 기광과 다르게 점점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미친 사람처럼 제발이라고만 반복하는 기광의 손은 붉은 피로 뒤덮여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아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두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는 시간은 부지런하게도 흘렀다.

 

 

 

 

 

' ... 양요섭님 20XX년 3월 29일 17시 01분 사망하셨습니다. '

 

 

 

 

 

눈꺼풀, 경동맥까지 땀이 벤 손으로 확인하는 두준의 머릿속에선 제발, 제발, 여기서 멈추라고 미친 듯이 소리친다. 남은 건 흉부, 환자의 사망을 확인하는 세 가지 절차 중 마지막 단계.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요섭의 흉부에 청진기를 가져다댄다. 아, 아... 애석하게도 고요한 물 위를 보는듯한 살가죽은 끝내 움직여주지 않았다. 목이 멘 소리로 천천히 사망선고를 하자 세상이 무너진 눈을 한 기광이 폴썩, 몸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다... 흐윽, 흐..요, 요섭, 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는 응급실 안, 저와 기광 그리고 요섭의 공간만이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을 잃었다. 시끄러운 응급실의 소리는 어째서인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잔인하게 찢어지는 기광의 울음소리만이 제 귀에 들어찼다.

 

 

 

 

 

 

요섭의 위에 엎어져 꺽꺽대는 기광의 손에는 은색의 이어커프가 소중하게 쥐어져있었다.

 

 

 

 

 

-

 

 

 

 

 

경연 프로그램에도 나오며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요섭의 일은 한동안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다. 요섭의 장례식에는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요섭의 밴드 동료, 대학 동기, 수많은 지인들이 요섭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와주었다. 그 외 정계인들도 심심찮게 왔다. 요섭의 아버지 쪽 사람들이겠지. 요섭의 아버지는 시종일관 제 손님들을 받느라 바빴고 요섭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며 오열하다 결국 탈수로 정신을 잃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동운은 갖지않아도 될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저와 요섭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동운을 보다 못한 두준이 동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기어코 니가 내 아들을 죽였냐며 고래고래 저를 저주하던 요섭의 어머니가 쓰러지고 나서야 뒤늦게 상주의 자리에 선 기광은 잠도 자지 않고 요섭의 곁을 지켰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와도 기광은 꿋꿋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절을 했다. 조문객 중에는 저와 요섭이 구해낸 아이의 부모님도 있었다.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아이의 부모님의 모습에 애먼 원망이 서려왔다. 갑자기 몰려오는 나쁜 마음에 울컥이자 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요섭의 영정사진이 그러지 말라며 저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원망하려해도 원망할 수 없었다. 결국, 한 쪽 무릎을 꿇어앉아 제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오열하는 아이의 부모님의 손을 잡아주었다.

 

 

 

 

 

" ... 그 아이는, "

 

 

 

 

평생, 이별의 아픔을 느끼지 않길 바라요.

 

 

 

멋지게 자라서,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길 바라요.

 

 

 

 

 

장례식이 끝나고, 아주머니의 고집으로 요섭은 강 상류에 위치한 절벽에 뿌려졌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제 아들이 세상구경이나 실컷 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제 친구를 떠나보낸 후 마지막 남은 아들까지 잃은 아주머니의 눈에는 이제 제 아들을 죽인 원수가 눈에 보이지 않은 듯했다. 세상이 내려앉은 표정으로 제 아들의 유골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공허하게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결국 검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다. 발인이 모두 끝난 후, 높디높은 절벽엔 기광만이 남아있었다.

 

 

 

 

 

" 요섭아. "

 

 

 

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했지.

 

 

 

" 이제서야 후회 돼. "

 

 

 

그런데, 네가 떠나가고 나서야

 

 

 

" 그때, 널 밀어내지말걸. "

 

 

 

더 일찍 사랑할걸. 이라며, 후회하는 내가.

 

 

 

" 네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줄 알았다면. "

 

 

 

너무 이기적이어서.

 

 

 

" 그럴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걸, "

 

 

 

고개를 들 수가 없어.

 

 

 

" 이런 내가 감히 널 잊을 수 있을까. "

 

 

 

 

 

한참을 중얼거린 기광이 제 검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이어커프를 꺼냈다. 고운 은빛을 뒤덮고 있던 검붉은 피는 깨끗이 닦여있었다. 제 손안에서 작게 부딪히는 한 쌍은 화사한 봄볕을 받아 예쁘게도 빛났다.

 

 

 

 

 

퐁-

 

 

 

 

 

절벽 아래로 작은 쇳덩이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산에 울려 퍼진다.

 

 

 

 

 

 

 

 

 

" 미안해. 요섭아. "

 

 

 

 

 

벚꽃이 만개해 분홍색으로 물든 숲의 절벽 끝,

 

 

 

 

기광의 오른쪽 귀엔 은빛의 이어커프가 작게 반짝인다.

 

 

 

 

 

 

 

 

 

 

 

FIN.

離 : 떠나가다.

 

 

 

 

 

" 기광아 ! "

 

 

 

 

 

너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 닿을 때면,

 

 

 

" 엄마가 부르셔! 빨리 와! "

 

 

 

괜한 착각을 하게 돼

 

 

 

" 가자니까? 또 멍 때리지. "

 

 

 

내가 사는 세상이 온통 봄이라고.

 

 

 

 

 

 

 

너로 추억된 계절

 

 

 

 

 

 

 

 

벌써 22년이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내가 절친했던 너와 가족이 된지. 우리 둘 뿐만 아니라 어머니들끼리도 뱃속에서부터 친구라고 하셨다. 부부 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제 자식만은 끔찍이 아끼시던 너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함께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 수다를 떨었다. 어머니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우리는 너의 넓은 방 안에 꼭 붙어 재잘거리다 서로를 꼭 껴안고 노을빛을 이불삼아 잠들곤했다. 창밖에는 불어오는 봄바람에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가 살랑거렸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길 바란 건, 욕심이었을까.

 

 

 

 

 

-

 

 

 

 

 

" 효정아!! "

 

 

 

 

 

효정. 우리 엄마의 이름이다. 지금 내 눈 앞에서 피갑칠을 해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날이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화목했던 우리 집에 괴한이 들이닥쳤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아빠와 티비를 보며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엄마, 그리고 그 중심에 아늑하게 안겨있던 나. 세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시덥잖은 주말극을 보던, 평화로운 주말 저녁이었다.

 

 

 

 

 

" 당신 누구야?! "

 

 

 

 

 

기광아, 이리 와. 다급한 엄마의 손길에 이끌려 방 안으로 몸을 숨긴 어린 나는 그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게 전화하는 엄마의 옷깃을 꼬옥 쥐었다. ㅈ, 저기, 경찰이죠? 저희 집, 에 괴한ㅇ... 그때였다. 쾅. 굳게 잠겨있는 문이 우습다는 듯 검은 복장의 남자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방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남자가 피범벅이 된 식칼을 툭툭 털어내자 검붉은 액체가 앳된 내 얼굴 위로 튀었다. 눈꺼풀에 떨어진 피가 흘러내려 내 시야를 가리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이 피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 ㅇ, 아ㅃ... "

 

" 아아악--!! "

 

 

 

 

 

엄마의 머리채가 붙잡혔다. 옷이 거칠게 뜯겨 침대 위로 던져졌다. 기광아! 보지 마!! 애처러운 엄마의 한마디가 방 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잔뜩 겁을 먹은 나는 덜덜 떨며 내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사실 눈물에 초점이 흐려져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남자는 거칠게 엄마를 강간하면서 엄마의 몸에 아무렇게나 칼을 꽂아 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갑칠이 되어 숨이 끊기기 직전의 엄마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남자가 충격으로 방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하, 하지, 콜럭, 마... 안, 안돼... 피를 토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고왔는데, 맨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넝마가 된 몸뚱이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억지로 말을 내뱉는 것이 흡사 좀비 같았다.

 

 

 

 

 

-쾅쾅쾅!

 

 

 

 

 

아, 경찰이 왔나보다. 방 너머로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집주인에게 마스터키를 받아왔을테니 머지않아 저 문은 열릴 것 이다. 이 남자에게 남은 시간은 10초 남짓. 난 그 안에 죽는 걸까. 서럽게도 울었다. 살려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저, 이미 나를 두고 떠나버린 엄마와 아빠를 하염없이 불렀다. 거실에서 얼굴이 난도질 된 채로 사지가 잘린 아빠를, 내 눈앞에서 범해져 온몸에 잔혹스러운 칼자국이 남은 엄마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시는, 울고있는 나를 다정하게 품어줄 수도 없었다.

 

 

 

 

 

" 꼬마야. "

 

" 흐아앙, 엄ㅁ,마아... 끕, 아, 빠아... "

 

 

 

 

 

부모따위, 있어봤자란다. 소름돋는 미소였다. 남자는 내 곱슬머리를 피가 범벅된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눈을 부릅 뜬 채로 활짝 웃는 그 얼굴에 몰려오는 공포가 내 숨통을 조여왔다. 우리 부모님을 죽인 저 식칼이 당장에라도 저에게로 꽂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내 머리만을 하염없이 쓰다듬던 그 남자는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총을 들이대자 순순히 칼을 버리고 투항했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해 제 부모를 스스로 찔러죽인 남자는 가족이라는 것에 심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정신이상자로 분류된 이력이 발견되었다. 결국 내 부모님의 목숨과 인생을 송두리째로 뽑아버린 이날의 일은 같은 빌라 주민으로 오며가며 마주친 화목한 가족에게 점차 쌓인 스트레스가 터져 발생한 묻지 마 살인사건으로 수사는 종결이 났다.

 

 

 

 

 

-

 

 

 

 

 

" 허흐윽, 흐읍... 효정, 효정아아... "

 

 

 

 

 

요섭의 어머니는 철이 없었다. 제 아들과 친구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잃었다. 떠나버린 제 친구를 추억하기 위함에서인지 나를 저의 집으로 들였다. 대우는 그저 그랬다. 나에겐 언제나 무심했고, 용돈 역시 요섭과는 배로 차이가 났다. 언제나 눈칫밥을 먹느라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속으로 삼켰고, 모든 것을 요섭에게 양보하며 살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요섭이 있었으니까. 요섭은 제가 받은 용돈을 저에게 나눠주기도 했으며 눈치가 빨라 내가 원하는 것은 말하기도 전에 선물이라며 내 방 책상 위에 올려두곤 했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않는 시절부터 함께한 우리는 어느덧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 되었다.

 

 

 

 

 

" 기광아, 넌 대학 어디 쓸거야? "

 

" 음... OO대 생각 중이야. "

 

" 뭐? 네 성적으로는 많이 남지않아? "

 

 

 

 

 

학교에서는 늘 상위권이었다. 요섭의 어머니의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 결과 꽤나 좋은 서울권 사립대학에 합격할 만한 성적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까지는 지원해주겠다는 요섭의 어머니의 말에 되려 부담을 느껴 더 높은 대학들을 포기하고 선택한 국공립학교였다. 분명 좋은 학교였지만, 요섭의 말대로 성적이 남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엄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 뭐...

 

 

 

 

" 그러지말고, 나랑 같은 대학 쓰자. "

 

 

 

 

 

XX대 의대. 내 성적으로는 딱 적정수준의 학교였다. 내가 지망하는 신경외과도 있는 학교라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만만치않은 학비에 곧바로 마음을 접었던 학교였다. 너도 여기 쓰려구? 응. 난 실음과니까. 실기는 자신 있다구. 히히. 자신있게 브이를 해보이는 요섭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그럼. 네 노래실력이면 충분하지.

 

 

 

 

 

" 그럼 나랑 같이 여기 가는거다? 무르기 없기! "

 

" 그치만... 학비가... "

 

" 그건 걱정하지말구! 넌 좀 뻔뻔해져도 괜찮아. "

 

 

 

 

 

요섭의 말대로 걱정할 것 없었나보다. 둘 다 어려움 없이 합격을 한 후, 요섭과 같은 학교로 진학하겠다 말하자 요섭의 어머니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흔쾌히 애썼구나. 라며 되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졸업 후엔, XX대학병원에서 일할거니?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래. 알겠다. 집은 학교 근처에 구해놓았어.

 

 

 

 

 

" 저, 괘, 괜찮... "

 

" 요섭이랑 같이 살아. 열심히하고. "

 

" 네... 감사합니다. "

 

 

 

 

 

뭐라 거절도 하지 못한 채 저와 요섭의 방이 위치한 이층으로 힘없이 올라간다. 이층으로 올라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싱긋 웃은 요섭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요섭의 손에 이끌려 요섭의 방에 들어오자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적이던 요섭이 가방 깊숙히 맥주 두 캔을 꺼내든다.

 

 

 

 

" 우리, 술 마시자 ! "

 

" 뭐? "

 

 

 

 

 

우리, 아직 미성년ㅈ... 더군다나 빠른 년생인 요섭과 저는 더더욱 그랬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마시고도 남았다며 대학도 합격 했겠다 자축의 의미로 딱 한 캔씩만 마시자는 요섭의 말에 결국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를 받아들었다. 자, 짠~ 합격 축하해! 너도, 축하해 요섭아.

 

 

 

 

 

" 으엑, 맛없어. "

 

" 그러게. 이걸 왜 마시는 거지... 으으. "

 

 

 

처음 마셔보는 맥주에 둘 다 으엑, 뱉는 시늉을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을 히히덕거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캔이 비워져 나가고, 둘 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오자 몸도 식히고 술도 깰 겸 잠든 어머니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 어으, 추워. "

 

" 그러게. 아직 좀 춥다. "

 

" 우리 대학 갈 때쯤엔 완전 봄이겠지? "

 

" 응. 빨리 벚꽃 보고 싶어. "

 

" 넌 의대라 바쁠 테니까. 지금 너랑 많이 놀아둬야지. "

 

" 집에서 매일 볼 텐데 뭐. 하하. "

 

 

 

 

 

의대는 집도 잘 못 들어 간대잖아. 의대 6년에 인턴, 레지까지 하면 너는 학교 한참이나 붙어있겠다. 으아, 벌써부터 까마득하네. 그러게... 상상만 해도 몸이 뻐근해진다. 너는 졸업하면, 뭐 할거야? 으음... 천천히 생각해 볼려구. 노래가 좋아서 선택한 학과니까. 조급할 필요 없을 것 같아.

 

 

 

 

 

" ... 부럽다. "

 

 

 

 

 

아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말로 나와 버렸다. 이렇게 학교 다니고, 의대를 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요섭이 어머니 덕분인데... 배부른 소리였다. 저가 말하고도 놀란 기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광보다 앞장 서 패딩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종걸음으로 걷던 요섭이 멈칫, 발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본다. 놀란 기광의 눈이 어딘가 가라앉은 요섭의 눈과 마주한다.

 

 

 

 

 

" 기광아. "

 

" ㅇ, 어...? "

 

 

 

 

 

알아. 네가 의대 가고 싶어서 가는 거 아니라는 거. 코피 쏟아가며 공부 할 만큼 큰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라는 거. 부유한 집에서 자라 부족함 없이 원하는 길로 가는 내가 부러울 수 있다는 것도. 다, 알아. 그런데 그거 알아? 나는 늘 너를 본받고 싶었어. 넌 너를 어떻게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나밖에 모르는 엄마보다도, 돈에 미쳐 가족을 져버린 아버지보지보다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어른스러운 네가 나한텐 제일 멋지고 빛나는 사람이야.

 

 

 

 

 

"술 먹고 별 소리를 다한다. 그치. "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네 얼굴이 붉어진다. 아직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발그래한 얼굴이었는데, 이젠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리고 그런 너의 이야기를 듣는 내 얼굴 역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술기운이 맞을까. 발끝부터 손끝까지 열이 고루 퍼지는 술의 느낌과는 다른 것이었다. 턱에서부터 귀 끝까지 훅 끼쳐오는 열감.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요섭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우리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감돌았다. 떨리는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던 요섭이 천천히 다가온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새벽. 요섭의 커다란 손이 제 볼에 닿아온다. 차가운 손에 어깨를 살짝 떨었지만 이내 맞닿아오는 따스한 숨결에 천천히 움추린 어깨를 내려놓는다. 고요한 새벽, 서투르게 뒤섞이던 혀는 오래 가지 못하고 떨어져나갔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걸까. 혀가 내 입 안에서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번들거리는 입술을 하고서 나를 몽롱하게 쳐다보는 네 얼굴을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아주머니에게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쫓겨나려나. 불안하게 떨리는 내 눈동자를 눈치 챈 건지 요섭이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온다. 다, 괜찮을 거야.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한 말투였다.

 

 

 

 

 

" ... 있으니까. "

 

" 응? "

 

" 네가, 있으니까. "

 

 

 

 

 

난, 다 괜찮아.

 

 

 

너와 함께 있으면 내 삶이 온통 분홍빛 봄날 같아.

 

 

 

이게 비록 언젠간 깨질 환상일지라도

 

 

 

네가 곁에 있기에, 난 다 괜찮아.

 

 

 

 

 

그렇게, 우리의 10대는 끝이 났다.

 

 

 

 

 

-

 

 

 

 

 

 

대학생활은 별 거 없었다. 그날 밤이 무색하게도 기광은 정말 하루 얼굴 보기 힘들만큼 바빴고, 요섭은 마음이 맞는 동기들을 만나 평소에는 서로에 대한 공백을 크게 느끼진 못했다. 그러나 10여 년간 유초중고 동문에 모자라 같은 집에서 살아온 세월을 무시하지는 못하는 건지 이따금씩 서로가 뭘 하고 있을지 문득 생각나곤 했다. 물론 둘의 자취방에서나 본집에 가야하는 명절에 만났을 때 역시 별다른 어색함은 없었다. 얼굴만 보지 못하는 거지 틈틈이 연락을 했었으니까.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이번에 부른 곡인데 들어봐라 등 시간이 날 때마다 사소한 근황을 주고받곤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대학생활이 흘러 기광이야 10살에 고아가 되었으니 군면제 대상이었고, 요섭은 군대를 갔다. 마음이 맞는다던 동기들과 기어코 동반입대를 한 요섭은 군 전역 후 밴드결성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7개월이 지나 전역을 한 후, 대학의 막바지인 4학년 즈음 요섭은 밴드를 만들었다. 감성적인 노래를 주로 만들던 요섭의 밴드는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덧 나름 탄탄한 매니아층을 가진 밴드가 되었다. 음원사이트에 낸 곡의 하트가 100개가 찍힐 때면 멤버들과 부둥켜안고 좋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다.

 

 

 

 

 

" 그치 기광아? "

 

" 응. 100개라면서 신나서 전화도 했었잖아. "

 

" 하하. 다 추억이지. "

 

" 요즘엔 0이 더 붙었을 뿐이지 자랑하는 건 비슷해. "

 

" 너도 레지 드디어 끝났다고 완전 신나서 전화했으면서! "

 

 

 

 

 

으윽. 그치만 그땐 정말 기뻤는걸. 자그마치 11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2년차 전문의였다. 뭐라 반박도 못하고 있을 때 흰 가운의 주머니 안 휴대폰이 웅웅 울려댄다. 두준이었다. 요섭을 제외한 거진 유일한 친구. 딱히 성격이 모난 편도 아니었으나 중학교때까진 부모를 잃은 슬픔에 젖어 요섭 이외엔 말을 잘 섞지 않았고 미래를 정한 고등학교 땐 조용히 공부만 하느라 결국 곁에 있는 건 저의 사정을 아는 요섭이었다. 이런 기광에게도 요섭 외의 친구가 생긴 건 의대 2학년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전날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결국 늦잠을 자버린 기광이 허겁지겁 전공 강의실에 도착해 두 자리가 남은 책상에 앉아있자 몇 분 뒤 저와 같은 모습으로 헉헉대며 달려와서는 저에게 사람좋게 웃어보이며 옆자리 앉아도 되지? 라며 말을 붙여왔다. 알고보니 전공이 많이 겹쳤었는지 이후 다른 전공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친화력이 좋은 두준이 먼저 말을 붙여왔고 어느새 저와 두준은 같은 병원, 같은 층에서 일하는 동료 의사가 되었다.

 

 

 

 

 

" 여보세요? "

 

- 어, 야 기광아!

 

" 응. 무슨 일이야? 나 곧 올라갈건데. "

 

- 너 지금 그, 동네친구랑 있지? "

 

" 으응. 요섭이. "

 

- 아아 맞아. 걔. 우리 수술 방금 끝나서 너 아직 밥 안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전화했지.

 

- 저희 밤샜어요 쌔애앰...

 

 

 

 

 

괜찮아? 기광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모양을 뻥긋거리자 통화내용을 얼핏 들은 요섭이 뭐 어때. 매번 얘기만 들었는데. 같이 먹자. 흔쾌히 승낙하는 요섭에 표정이 밝아진 기광이 예쁘게 웃어보였다. 그럼 내려와. 로비에서 기다릴게. 두준과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는다. 손 끝이 얼얼해질 정도로 추운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따스한 봄볕이 비추고 있는 응급실 옆 정원. 화사하게 빛나는 꽃들보다도 기광의 맑은 웃음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 ... 예쁘다. "

 

 

 

 

 

아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말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이거, 어딘가 익숙한데. 아니, 기광아. 네가 말하고 놀랐을 땐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왜 놀라는 거야. 지금은 내가 놀라야지. 13년 전, 그 추운 겨울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던 기광은, 지금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다. 너도 정말 안 늙는구나. 어쩜 놀라는 모습도 그대로야. 여전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로 멈춰있는 기광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이던 요섭이 이내 천천히 다가가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을 감싸 쥐어 내린다. 팔, 아프겠다.

 

 

 

 

 

" ...아. ㄱ,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

 

" 기광아. "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야.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요섭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던 기광이 멈춰선다. 그치만... 그치만, 나... 떨려오는 도톰한 입술이 보인다. 좀 더 시선을 멀리두니 저만큼이나 하얀 얼굴이 발그래해져있다. 우리 엄마한테, 그렇게 미안해? 그 날 이후로 종종 기광을 만날때면 친구같다가도 지금같은 분위기가 감돌곤했다. 초반엔 머뭇거리면서도 받아주던 기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요섭이 한발자국 다가서면 기광은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기광이 싫다면 포기했겠지만, 그럴때마다 발개져있는 말랑한 볼이 신경쓰였다. 이게 벌써 11년이었다. 둘 다 너무 바빴으니 사실 횟수로 따지면 몇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우리 관계는 왜 변하질 않는걸까.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평화로운 봄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이었다. 누구하나 함부로 입을 뗄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 ,,,저, "

 

" 기광아!! "

 

" 기광쌤!! "

 

 

 

 

 

한참 찾았잖아.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키 큰 남성 둘. 소란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무어라 말하려던 기광의 벌어진 입술이 천천히 다물린다. 아씨, 타이밍 진짜. 밝은 표정으로 걸어오는 흰 가운의 남자들을 한번 흘긴 요섭이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머리를 거칠게 헝클린다. 기광이라고 부른 흑발의 남자와 기광쌤 이라고 부른 연갈색 머리의 남자. 아마 기광이 말한 두준은 전자겠지. 한명은 우리보다 한 살 어리다고 했으니까. 애써 그들을 반기는 기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 수술 잘 끝난 것 같네. 수고했어. "

 

" 아아. 응. 그런데 표정이 왜 이리 안 좋아. 어디 아파? "

 

" 방금 수술 끝내고 온 저희보다 안색이 안 좋으면 어떡해요 형. "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자 호칭이 형으로 바뀌었다. 역시, 그럼 흑발이 윤두준. 옆은 손동운 이겠네. 누가 의사 아니랄까봐 기광을 붙잡고 안색을 살피는 둘에 요섭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기광의 앞을 막아선다. 안녕하세요. 가까이서 보니 저 둘도 안색이 그닥 좋진 않았다. 밤새 수술하고 왔다고 했나.

 

 

 

 

 

" 아, 요섭씨죠? 반가워요. 윤두준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

 

" 저는 손동운이예요. 얼굴 진짜 작으시네. "

 

 

 

 

 

갑자기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저나 기광이나 적응이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영 정신을 못 차리는 기광을 대신해 인사를 나누었다. 둘 다 훤칠하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네. 간단히 인사를 마친 넷은 곧바로 근처 24시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대학병원이잖아요. 이렇게 셋이나 나와도 되는 거예요?

 

 

 

 

 

" 기광이 형은 점심시간이구, 저희는 소강상태~ "

 

 

 

 

 

문득 든 생각에 의아한 듯이 묻자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을 한 동운이 허허실실 웃으며 답한다. 하긴, 지금 저들의 안색이 웬만한 환자들 얼굴보다 안 좋을 듯싶긴 하다. 무슨 과예요? 식당에 마주보며 앉아 묻자 동운이 주문하는 사이 이번엔 두준이 답한다. 정형외과요. 보통 레지랑 1, 2년차가 같은 수술실 들어가는 건 드문 일이긴 한데, 저희가 엘리트라나 뭐라나. 귀찮게 됐네요. 그러면서도 일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눈이 반짝반짝해지는 두준을 보니 아까 전 다 죽어가던 얼굴을 하던 사람이 맞나싶다.

 

 

 

 

 

" 나는 신경외과, 두준이랑 동운이는 정형외과. "

 

" 사실 둘 다 보는 부위가 비슷해서 이래저래 교류가 많아요. "

 

" 맞아요. 서로 상호보완해가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

 

" 으응. 그렇구나. 그나저나 두 분 말 편하게 하세요. 듣는 내가 다 어색하네. "

 

 

 

 

 

아, 그럴까? 요섭이라고 부르면 되지? 저는 요섭이 형! 와... 형 진짜 오랜만에 생겨봐요. 31살에 형이 생기다니. 군복무까지 합산하여 아직 레지던트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운이지만 실력이 좋아 정형외과의 엘리트인 두준과 함께 붙어다닌다고 하였다. 요섭이 너는 밴드 한다고 했지? 노래 좋더라. 내 주변 사람들은 네 밴드 다 알더라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알게 모르게 기광에게 집착하던 요섭은 기광에게 저 외의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내심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음악적인 칭찬이라면 자다가도 입꼬리가 광대에 걸렸다. 아 그래? 고마워. 한결 밝아진 표정의 요섭에 기광이 안심한 건지 기광 특유의 맑은 웃음을 보였다. 그나저나, 아까 둘이 무슨 얘기 하느라 그렇게 표정들이 죽상이었어? 내가 느끼기엔 죽상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들이 보기엔 또 아니었나보다.

 

 

 

 

 

"아아 뭐, 그냥. 집안 문제루. "

 

 

 

 

 

이번엔 기광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뭐. 집안 문제도 틀린 건 아니지.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자 반나절 넘게 한 끼도 못 먹고 온 정신을 쏟아 부어 피곤했던 모양인지 아까와 같은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둘이었다. 그 모습에 살풋 웃어 보이는 기광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는 건 덤이었다. 둘만 있었으면 아까처럼 예쁘다는 말을 육성으로 내뱉어 또 오묘한 분위기가 흘렀을 터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자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

 

" ㅎㅎ 두준이는 삼겹살도 색만 변하면 먹는 애야. 걱정 할 것 없어. "

 

' 두준쌤이 먹는 거엔 좀 진심이긴 하죠. "

 

 

 

 

 

유독 맛깔나게 먹는 두준에게 예의상 건넨 말 뒤로 한 마디씩 얹어진다. 아, 맞아 맞아. 둘이 완전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했죠? 헐. 그럼 볼 거 못 볼꺼 다 본 사이겠네. 움찔. 수면부족으로 조증 상태인 동운이 해맑게 뱉어내는 말에 요섭의 눈썹이 까딱인다. 그럼 니들은 어디까지 봤는데. 마음 속으로 욱한 말이 다행히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뭐, 그렇지. 집안 사정으로 초딩 때부터 같이 살았거든. 밥을 먹는 내내 저보다 한 발 앞서 기광을 챙겨주는 두준을 의식한 건지 요섭이 은근슬쩍 두준을 흘기며 자랑스러운 듯 말한다. 그럼, 둘이 뮤지컬 보러 갈래요? 풉, 양 볼에 가득 욱여넣은 우거지가 튀어나올 뻔 했다. 남자 둘이 뮤지컬이라니. 심지어 핑크빛 벚꽃이 흩날리는 이런 봄날에. 물론 상대가 기광이라면 로코물도 백 편은 같이 볼 의향이 있는 요섭 이었으나 생각해보니 한번도 기광과 영화 한편 보러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웬 뮤지컬? 평소 저에게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던 기광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동운을 바라본다.

 

 

 

 

 

" 아, 그게 제 아는 지인이 뮤지컬을 하셔서 표를 얻었는데 하필 그날 형만 오프더라구요. "

 

" 두준이는 뮤지컬같은 거에 별 흥미 없으니 그렇다치고 동운이 너는, 이 표 우리 줘도 괜찮은거야? "

 

" 어차피 못 가는데요 뭘. 재밌게 보고와요. "

 

 

 

 

 

내가 언제 뮤지컬에 흥미가 없었다고. 국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툴툴거리는 두준을 가볍게 무시한 동운이 저와 요섭에게 표를 한장씩 나누어준다. 요섭아 너는 이 날 괜찮아? 마침 합주도, 공연도 없는 날이었다. 저 성격을 알 수없는 놈을 이겼다는 모종의 승리감에 씨익 웃어보이며 응. 마침 완전 한가한 날. 고맙다 동운아. 언제 한번 밥 살게. 진심이었다. 이렇게 기광과의 데이트를 잡아준 동운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 요섭이 싱글벙글 웃으며 국밥을 마저 한술 뜬다. 아, 불편하다고 안 빼길 잘했다.

 

 

 

 

 

" 만나서 반가웠다. 꼬맹이. "

 

" 하아-? 말이 너무 편해진 거 아니냐? "

 

" 그러는 너도. "

 

" 뭐야 뭐야. 둘이 왜이렇게 친해졌어요? 막내 소외감 느껴. "

 

" 하하. 둘이 밥 먹는 내내 투닥거리더니 잘 맞네. "

 

 

 

 

 

매사에 느긋하고 유순한 기광은 그저 저의 친구 두명이 친해졌다는 생각에 기뻐했고 평소 눈치가 빠른 동운마저도 밤샘수술이 영 버거웠는지 둘 사이에 살벌하게 튀기던 스파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둘만의 라이벌의식을 지니게 된 요섭과 두준은 기광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채 친한듯 안 친한 사이로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 애들 어때? 둘 다 착하지? "

 

" 윤두준. 맘에 안 들어. "

 

" 으응~? 뭐야아. 밥 먹는 내내 너희 둘만 얘기했으면서. "

 

" 초면에 꼬맹아 꼬맹아 거리는 놈을 누가 맘에 들어하겠어? "

 

" 그러는 너두 한마디도 안지고 말대꾸 했으면서. "

 

 

 

 

 

으윽, 평소엔 허허실실한 기광인데. 종종 이렇게 뼈가 아릴 정도로 팩트를 꽂아 넣곤 했다. 아, 암튼! 걔 얘긴 그만하고, 뮤지컬은. 몇시에 만날래? 당장 다음주 금요일이었다. 다음 주면 아직 여유 있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남은 일주일간 기광이나 저나 눈코뜰새없이 바쁠 것이다. 타이밍이 잘 맞아 금요일에 시간이 딱 비는 것이었지 지금 요섭의 밴드는 새 앨범을 준비하느라 밤새는 것 정도는 우습게 하고 있었으니까. 나 가볼게. 몸 사려가며 일 해. 잠도 못 자고 곧바로 콜을 받은 두준과 동운을 먼저 올려 보낸 기광이 저 역시 곧 점심시간이 끝난다며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이래서 세월이 좋다는 건지. 언제 어색했냐는 듯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고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려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 ... 무슨 옷 입고 가지. "

 

 

 

 

 

-

 

 

 

 

 

" 요섭아! 여기~ "

 

 

 

 

 

3월 29일. 딱 벚꽃이 만개할 시기였다. 벚나무가 잔뜩 심어져있는 대학가는 한창 벚꽃이 흩날려 봄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생기 넘치는 분홍빛을 가득 머금은 꽃잎 사이에서 화사한 미모를 뽐내고 있는 기광이 있었다. 왜 이리 일찍 나왔어. 많이 기다렸지? 분명 5분 일찍 나왔는데, 삶에 치여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관도 잘 가지 못한 기광이 간만의 나들이에 들떴는지 저보다 훨씬 일찍 나와 있었다. 으응? 아아니. 나도 금방 왔어. 늘 보던 흰 가운이 아닌 캐주얼한 복장. 찢어진 검은 진과 흰 반팔 위에 걸친 얇은 가디건. 평소 말하는 스타일과는 상반되지만 분명히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거기다 병원에서 하고있던 단정한 기본 볼 피어싱이 아닌 달랑거리는 화려한 귀걸이까지. 오히려 너무 잘 어울려서 한동안 멈춰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요서바아~? "

 

 

 

 

 

이거 봐. 이러는데 예쁘다는 말이 안 나오겠냐고. 멍 때리는 요섭의 앞으로 종종 걸어와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기광에 살짝 놀란 요섭의 귀 끝이 붉어진다. 아, 아 미안. 배는 안 고파? 아뿔싸, 완전 맹추같이 대답해버렸다. 갑자기 배 안 고프냐니. 그게 말이냐 이 새끼야. 오늘따라 왜 이럴까. 시종일관 사람 좋게 웃어보인 요섭이지만 속으로 제 머리를 착실하게 쥐어뜯고 있었다. 응? 나 점심 가볍게 먹고 왔는데. 뭐라도 먹고 갈까? 2시 공연이니까 아직 시간 좀 있어. 애초에 전처럼 같은 집에 살았더라면 이런 대화를 할 필요도 없을 터였지만 꽤 오래전 저와 선을 그은 후 몇 년 뒤 레지기간에는 집에 거의 안 들어온다시피 하더니 아예 병원 근처로 독립한 기광이었다.

 

 

 

 

 

" 그냥 같이 살면 좋았잖아. "

 

" 아주머니한테 죄송해서 어떻게 그래. 애초에 너 살라고 해주신 집인걸. "

 

" 응? 그 집 우리 둘 공동명의야. "

 

"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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