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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주의보

가을,

 

“ㅎ, 흐...엣취!”

 

바야흐로 알러지성 비염의 계절이었다.

 

 

 

이별주의보

윤두준x이기광

 

 

 

가을은 비염인에게 가혹한 계절이다. 특히나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기광은 이 당연한 사실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어느새 제법 차가워진 바람보다 더 차가워진 윤두준과의 관계는 기광의 머릿속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놈의 비염만 아니었다면 완벽히 지워버렸을 것이 분명할 터였다.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은 안 그래도 별로인 기분을 지구 끝까지 처박아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교시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는 사실은 n년차 통학러인 기광에게도 끔찍했다. 수업 시작 30초 전 강의실에 도착해 아슬아슬하게 출석체크에 세이프한 기광이 수업 시작과 동시에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형, 좀 일어나 봐요.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요?”

 

“으응...나 비염약 때문에...”

 

수업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이인 동운이 슬쩍 깨워 준 덕에 겨우 수업을 통으로 날리는 불상사를 면한 기광은 다시 펜을 쥐었다. 정신을 차리고 교재를 보니 안 그래도 엉망인 글씨는 졸음 탓에 상형문자에 가까운 수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침은 안 흘려서 다행인가. 기광은 동운에게 최대한 애절한 눈빛으로 SOS 신호를 보냈다. 동운이 마지못해 보내준 필기 파일을 보아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본인처럼 악필은 아니었지만 알아보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글씨를 한 획씩 분석해보던 기광은 결국 해석하기를 그만두었다. 윤두준의 필기가 간절한 순간이었다.

 

윤두준은 필기의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필기를 잘했다. 오죽하면 시험 기간에 몇몇 동기들이 진심으로 필기를 팔아달라고 애원했을까. 그런 두준의 필기를 바로 받아볼 수 있는 건 애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수업 시간에 졸건, 멍 때리다 강의를 놓치건, 심지어는 자체 휴강을 한 날에도 기광은 두준의 필기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기광의 성격에 맞게 프린트본으로. 공대생답게 각종 기계를 섭렵한 두준은 기광에게도 태블릿을 사용할 것을 종용하고는 했다. 하다못해 본인이 쓰던 새것에 가까운 태블릿을 주겠다고 해도 기광은 고집스레 아날로그를 고수했다. 이런저런 기능을 선보이며 기광을 설득하는 두준에 기광은 ‘그래서 그게 육각형도 그려줘?’라며 일축할 뿐이었다. 육각형을 그리려 애쓰는 두준을 보며 손쉽게 노트에 육각형을 그려낸 기광은 거 봐-하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기광은 두준의 글씨체가 좋았다. 주인의 성격을 닮아 동글동글하면서도 단정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글씨체뿐만이 아니라 두준의 필기는 전반적으로 정갈한 감이 있었다. 많아도 4가지를 넘어가지 않는 색으로 깔끔하게 정렬한 수업 내용은 누가 봐도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그러니까 나만 두고 졸업했지.

 

이미 어느 수업을 가도 출석부 맨 위, 교수님들이 아직도 졸업을 안 했냐며 놀라는 화석을 넘어 석유에 가까운 학번이 된 처지에 두준의 졸업을 만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8월, 두준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광은 두준을 만나지 못했다. 연락을 하면 답장이 온다. 전화를 걸어도 짧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얼굴을 못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한 달이 그렇게 긴 시간이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은 없었지만 원래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사이에서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건 제법 큰 문제였다.

 

-취직하면 많이 바쁜가? 씨씨였다가 애인은 졸업해서 직장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 학교 다니고 있는데 한 달째 얼굴을 못 봤어. 전화나 문자는 하는데 이거 그냥 바빠서 그런 걸까?

 

얘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처음으로 에브리타임에 글을 올려 보기도 했다. 우르르 달리는 영양가 없는 댓글들에 그대로 다시 앱을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정말 헤어질 때가 된 걸까. 이 싱숭생숭한 기분이 가을바람 때문인지 성큼 다가온 이별의 징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두준이 없는 학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릇파릇하던 새내기 시절부터 함께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축구 동아리에서 만나 순식간에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고 그 이후로 대학 생활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생각해 보면 둘의 관계에서 기광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두준이 기광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부터 둘의 연애는 항상 기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사소하게는 식사 메뉴부터 데이트 장소까지 기광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다툰 후 먼저 사과를 하는 사람도 두준이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기광은 단 한 번도 공대 건물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준이 늘 자연대 건물로 기광을 데리러 온 탓에 기광은 애써 공대까지 두준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두준과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는 했던 라운지 테이블에 홀로 앉아 교재를 뒤적이고 있으니 맞은 편의 공백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기광은 결국 교재를 신경질적으로 가방에 대충 쑤셔 넣은 후 건물을 나섰다.

 

“동운아...자꾸 윤두준 생각이 나는데 어떡하지...나 가을 타나 봐.”

 

“형, 두준이 형이랑 헤어졌어요...?”

 

“아니, 헤어지진 않았는데 권태기라고 해야 하나...어쨌든 좀 그래.”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뭘 이렇게 청승을 떨어요. 난 또 무슨 일 있나 했네.”

 

그러니까 헤어진 것도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윤두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헤어졌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만나러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집 주소도 알잖아요. 둘이 미리 말하고 가야 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더라. 친구 중 유일한 인문대생인 요섭이 연거푸 재채기를 하는 기광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가을을 맞아 절정에 다다른 재채기는 멈출 줄을 몰랐고 윤두준에 대한 사랑 역시 그랬다. 낮이면 학교 곳곳이 두준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고 밤이면 두준과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보기에 바빴다. 다시 말해 온종일 윤두준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결국 기광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두준의 집으로 향했다. 해가 짧아진 탓에 하늘이 어두웠지만 두준의 집을 찾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길치인 기광이 미리 길을 알아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길이었으니까. 불이 켜져 있고 축구 해설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기광은 수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마침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드디어 이별주의보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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