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t and Fall
시끄럽게 울던 매미소리들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파랗던 잎들도 형형색색 물들어 갈 쯤 기광은 때 아닌 장마 속 내려치는 벼락과도 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방출이요.."
"미안하다. 그렇게 됐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한껏 구부러졌다. 뺨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은 미처 닦아내지 못 해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고, 옷깃 위로 후두둑 떨어져 마치 빗물이 튄 것 같은 자국을 내었다. 여전히 해는 쨍쨍하게 내리쬐고 뒤쪽에선 공이 네트에 맞는 소리와 방망이에 부딪히는 마찰음을 연신 내고 있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됩니까?"
"네가 그동안 혼자서 아등바등 애쓴 거 우리도 다 알아. 근데.. 아무리 잘 해도 혼자서만 잘 하면 뭐하니."
사실은 그게 아닌걸 알고 있었다. 연봉 협상 때에 구단 측에선 가능한 가장 높은 숫자를 불러 주었으나 그 역시도 원래 받아야 할 몫의 절반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방치나 다름없는 모기업과 지는 것이 익숙해져버린 팀원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지쳐버린 운영 팀과 힘없는 감독. 더 이상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저 야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공을 던져왔으나 이젠 그마저도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너무 욕심내지 않았던 탓일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시간일 뿐이었다. 기광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밀려오는 그 모든 감정들을 다시 억지로 삼켜내며 모자를 벗고서 감독에게 인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이끌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독님."
"내가 결정한건 아니고.. 구단 측에서 정한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는 실력 좋으니까, 어디든 금방 스카웃될 거야."
빳빳했던 유니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닳아버린 옷과 신발을 모두 벗어내고 길들여진 글러브를 가방에 담고 자신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라커룸에 끼워진 이름표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고 그 모든 혼자만의 작별인사를 나눈 후에 걸어 나온 야구장 밖은 햇살이 지나치게 맑아서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경기장 근처에 있는 카페와 식당들엔 제 사인이 한가득 걸려있지만 이제 그것들도 다 낡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기광은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 주머니에 넣었다. 누군가에게는 승리의 부적이 화려한 속옷이고, 테이프를 둘둘 감아둔 눈에 띄는 배트일 거고, 직접 자수를 새겨 넣은 모자일 것이다. 하지만 기광에게는 순금이 들어간 얇은 목걸이였다. 처음 프로구단에 데뷔해 부여받은 등번호가 가운데 장식으로 들어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번호는 곧 다른 이로 대체되겠지만, 적어도 기광에게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큰 의미로 남을 것이다.
[윾니콘 X끼들 빠따로 X가리 X맞았냐] 조회 1016 추천 52
울 기빛 연봉 올려줘도 모자랄 판에 방출 말이 됨? 돈이 없으면 야구를 하지 말든가 아니면 유니폼이나 더 찍어 내던가 X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유니폼 백개 사준다고 지금이라도 구단주발놈 문 앞에 가서 석고대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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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발 운영 이따위로 할 거면 걍 다른 회사에다 팔아 주발놈아
여윽시 TK유니콘즈 닉값 오졌죠~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구단 운영 선보이는 중~
아냐 X발 지금 우리 기팡이 신인인척 연봉 졸라게 후려쳐서 다시 데려 올려고 그런 거라고
⌞ 이 새X 행회 타는 냄새 우리집 안방까지 남
⌞ 걍 안쓰럽다야......
⌞ 유흐흑 니흐흑 콘흐흑ㅠ
[채소마켓에다 팡기 유니폼 되팔이 하는 플미충 박제] 조회 3204 추천 285
[사진]
이야 75000원짜리를 20만원에 파네ㅋㅋㅋㅋㅋㅋ 양심 방출된 X끼 윾니콘즈 팬도 아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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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시장 지렸다
신고하게 좌표좀
ㅅㅂ이게 다 윾니콘즈 때문이다
주발놈 어딨냐 아직도 기팡이 집 앞에서 석고대죄 안 함?
⌞ TK OTT런칭했다가 폭망해서 돈 날린거 모름? 주발놈 그거 수습하느라 바쁘대
⌞ 아이고 주발아......
⌞ 아직도 탈덕 못 한 내 잘못이지 씨X......
기광은 콧등으로 내려온 안경을 올리고서 마우스 휠을 굴려 커뮤니티에 올라온 다른 글들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구단과 모기업에 대한 욕으로 도배된 수준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현실적이고 뼈아픈 글도 있었다.
[솔직히 닭장에서 학이 살기엔 무리였음] 조회 2177 추천 76
우리가 마지막으로 코시 진출한게 언제였는지 기억나는 조랑말 있음? 12년 전임 해성전자 시절까지 포함하면 우승했던게 27년 전이고ㅇㅇ 매년 꼴지만 하는 팀인데 거기서 혼자 잘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음 솔직히 구단 입장에선 높은 연봉 감당 안 되고, 잘 하긴 하는데 혼자만 잘 하니깐 가을까지 못 갈 바엔 그냥 버리는게 낫다고 판단한 거지 6년이면 그래도 꽤 오래 데리고 있었음 어차피 기팡이 실력 좋고 여태 약물 한 번 걸린 적 없고 사고도 안치고 좋은 선수니깐 금방 다른 구단에서 스카웃제의 들어올 거임 그니깐 너무 열내지 말자 운영팀에서 다 눈팅하고 있을 텐데 이런 때 일수록 앞으로의 운영 방향이나 선수들한테 도움되는 글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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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빛한텐 미안하긴 하지만 이게 현실이고, 맞는 말이지.... 여전히 화나고 속상하지만 구단 입장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님
주변인들과 기자들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들을 무시한 채, 집과 헬스장만 반복하며 생활한 지도 이제 3개월이 되었다. 말라버린 잎을 토해내던 나무들도 어느덧 하나둘 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항간에서는 은퇴를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의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기광은 제 뒤에 따라붙는 그 모든 말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서, 은둔생활이나 다름없는 삶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감을 잃고 싶지 않아 혼자 몰래 스크린 야구장도 다녀와 봤지만 실제 훈련이나 연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어쩌다 사람들이 알아보고선 사진이나 악수를 요청할 때면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는 것도 조금씩 지쳐갔다. 그렇게 난파된 우주선속 홀로 떠내려 가는듯한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처음 보는 번호로 받은 메세지를 보았다. 이미 한 달이 지난 문자였지만, 내용을 확인한 기광은 액정에 나타난 번호에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알람을 꺼두고 지내서 연락을 너무 늦게 확인했어요. 죄송합니다. 혹시 말씀하셨던 미팅, 아직도 진행 가능할 까요?"
1960년대, 해오름 자동차로 시작해 HL모터스로 최근 상호 명을 변경한 자동차 회사의 주가가 더욱 상승하게 된 것은 비단 전기차 사업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기습적으로 구단 창단을 하겠다고 발표한 회장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구단 회의에도 참석할 만큼 큰 열의를 보였고, 제조 공장이 밀집된 지역에 있는 야구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거주민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곳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것과 전혀 다른 야구를 하게 될 테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이나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기광은 크게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적당히 몸에 맞는 정장을 갖춰 입고 창단식이 진행되는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 운동선수들답게, 다들 근처에서 쭈뼛거리거나 자리에 앉아 물컵만 홀짝거리는 게 보였다. 기광은 테이블 위에 A4용지를 삼각 모양으로 접어 만든 제 이름표와, 그 옆에 자리한 윤두준이라는 세 글자를 보았다. 아무래도 프로구단은 판이 좁은 만큼 다들 학창시절이든 대학 야구단이든 어딘가에서 한 번 쯤은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기광의 고등학교는 야구로 크게 유명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가 기억하기로 두준이 졸업했던 학교는 매년 프로 구단의 스카웃팀에서 경기를 보러 올 만큼 잘 나가는 곳이었을 거다. 그렇게 두준은 19살, 학교를 다 졸업하기도 전에 드래프트에 참가해 3년 연속 상위권에 터를 잡았던 대진 웨일즈에게 스카웃되었다. 기광 역시도 몇 번 두준이 경기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수많은 야구팬들을 탄생시켰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순간에 함께 있던 사람. 그래서 군 복무 없이 10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야구로만 가득 채울 수 있던 사람.
"와, 드디어 같은 팀에서 만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두준은 기광이 제 옆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먼저 말을 걸었고, 손 까지 내밀었다. 저가 오른손으로 내밀었음에도 기광은 왼손으로 마주잡지 않았고, 당연하다는 듯 제 오른손을 들었다가 곧바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반대쪽 손으로 바꾸었다.
"아, 죄송해요. 좌완이셔서 왼손잡이인 줄 알고."
"괜찮아요."
맞잡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굳은살과 휘어진 손가락 마디가 그간 얼마나 많은 공을 던져 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도망치듯 떠나고 나서, 회피할 곳으로 자리 잡았던 새로운 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어쩌면 조금 더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고 두준은 생각했다. 골든 글러브에 단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으면서 후보에는 꼬박꼬박 들었던 사람. 만년 꼴지팀의 유일한 에이스. 생각보다 말간 얼굴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야구선수 보다는 홍대나 강남에서 볼 법한 인상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좀처럼 집중하지 못 하던 선수들 중에는 두준도 포함되었다. 한참 훈련을 해도 모자란 시간인데 모기업은 창단을 했다는 기쁨에 취해 훈련일정 보다 행사일정을 더 빽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진행자의 말을 흘려보내던 도중, 두준은 문득 제 옆에 앉은 기광을 보았다. 이 와중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앞만 보고 있는 것이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참, 기광씨."
두준은 내내 사회자만 보던 기광을 부르며, 테이블에 올려진 그의 손등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저를 돌아보는 조금 커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두준은 의외로 속눈썹이 길다는 실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기광씨가 늦게 합류하셔서, 저희끼리 먼저 사인 정했어요. 있다가 행사 끝나면 알려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대답하는 웃는 얼굴은, 악수를 통해 고집이 센 타입인지 아닌지 떠보려 했던 스스로를 야비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포수이고, 계산적이어야 하니까. 그렇게 합리화를 끝낸 두준은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억지로 사회자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행사가 마무리 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모기업쪽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선수들은 그대로 행사장에 남아 연습경기에 관한 간단한 브리핑을 진행하였다. 정장을 빼입은 단장은 무대위로 올라와 화려한 언변으로 매끄럽게 브리핑을 이어갔는데, 그 모습은 꼭 야구단의 단장 보다는 토종꿀이나 종합 비타민 같은 것을 팔러 나온 사기꾼처럼 보였다. 두준은 상대팀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선수들의 특징을 휴대폰에 기록했다. 전날 진행했던 회의에서 듣기로 기광이 가진 변화구는 커브, 슬라이더, 팜볼 3종류였다. 커브와 슬라이더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변화구이지만 9분할에, 평균 구속 135m/h 최대 142m/h가 되기에 팜볼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4이닝 정도는 노히트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구단 버스로 향하면서 두준은 빠른 걸음으로 살짝 앞서가던 기광의 옆에 따라 붙었다.
"기광씨 변화구 커브, 슬라이더, 팜볼이었죠? 평균 구속은 135."
"네. 왜요?"
"팜볼은 몇 정도 나와요?"
"유니콘즈에 있을 때 120정도 나왔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복병이었다. 팜볼은 느리게 던지는 것이 핵심인데, 팜볼을 익히느라 미처 속도를 내리지 못 한 것 같았다. 이는 일반적인 속도보다 빠른 것이었다. 아니, 구사하는 투수가 없어 일반적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팜볼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전 까지, 결국 기댈 곳은 제구력 뿐 이었다.
"훈련장 가면 제가 받을 테니깐, 변화구 종류별로 하나씩 던져 봐요. 최대한 느리게."
"느리게요?"
"네."
"네, 뭐... 알았어요."
슬쩍 웃음을 짓고서 앞서가는 두준의 뒷모습을, 기광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싹싹하고 나쁘지 않은 인상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잘 거는 듯 했지만 대화라기보다, 두준의 일방적인 통보와도 같았다. 아직 친하지 않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강압적이고 통제하려 드는 포수는 자기 의견이 없는 포수보다 더 최악이었다.
새 유니폼을 받는 것은 울컥 한다기보다, 울렁거림에 더 가까웠다. 새로운 등번호가 새겨진 곳을 쓸어보던 두준은 고개를 돌려 제 옆에서 옷을 갈아입는 신입 중견수를 보았다. 손빨래라도 하는 마냥 새 유니폼을 열심히도 구겨대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네? 아, 이거 제 징크스예요."
"징크스?"
"네. 유니폼이 좀 낡은 느낌이 있어야 몸이 편하더라구요."
징크스라는 말에 두준은 기광을 돌아보았다. 내친김에 기광의 징크스가 뭔지 알아낼 심산이었다.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적어도 그가 예민한 편인지 아닌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기광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한참동안 보다가 그대로 수납장에 넣어 두었다. 환복을 끝마친 두준은 신발을 갈아 신고 있던 선배 1루수에게로 슬쩍 다가갔다.
"형 기광씨랑 같은 대학교 나왔죠?"
"너네 아직도 씨씨하냐? 둘이 말 편하게 해. 말을 터야 친해지지."
"아이, 말은 천천히 틀 거고. 아무튼, 기광씨 성격 어때요? 좀 활발하고 그런 편이에요?"
"왜? 까칠한 투수일 까봐 걱정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아는 게 없으니깐 궁금하잖아요."
"성격 착하고, 무던하고. 그냥 착해."
"그게 다예요?"
"그때 나도 졸업반이었고, 쟤 들어오고 얼마 안 돼서 프로 입단해서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어. 궁금하면 니가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너무 대놓고 그러면 좀 그렇잖아요."
"야, 기광아!"
"아, 진짜. 형!!"
갑작스러운 선배의 부름에 두준은 당황해서는 조금 허둥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 환복을 거의 끝마친 기광이 유니폼 단추를 채우며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부르셨어요?"
"두준이가 너랑 친해지고 싶댄다."
"네?"
"말을 왜 그렇게 해, 형! 아니, 친해지기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어쩌다 기광씨 얘기가 나와서요. 선배랑 대학 동문이라면서요!"
"네. 같은 대학 출신이에요."
"그래도 신생팀인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겠네요."
"뭐.. 그렇죠."
"짜식들이 숫기가 없어."
재미가 떨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선배는 이제 막 입단한 까마득한 후배들을 놀려먹기 위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떠났다. 라커룸 안에는 다른 선수들도 많았지만 단 둘만 남겨진 것 같은 어색함에 딴 곳만 보던 두준은 뭐라도 말을 걸어 보려다, 그대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기광의 등에 대고 뒤늦게 입술만 의미 없이 벙끗거렸다. 그다지 까칠한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야구장에 가면 그 특유의 냄새가 있다. 흙먼지와 잔디, 구멍 뚫린 경기장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 오랜만에 마운드에 선 기광은 몇 번 두준의 미트 안으로 공을 던지다 그가 보내는 사인에 맞춰 빠른 직구를 던졌다. 방출 이후 공백이 있던 탓인지, 공은 미트가 있는 위치보다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로진백을 들어 송진가루를 손에 묻힌 기광은 두준이 돌려보내는 공을 잡았고, 다시 그의 사인에 맞춰 보통 속도의 직구를 던졌다. 직전과는 정 반대의 위치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정확히 미트의 한 가운데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안착했다. 공이 미트에 닿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짜릿하다. 특히 투수가 자신의 사인에 맞춰 정확히 공을 던졌을 때에는 더더욱.
"오, 나이스!"
다시 공을 던져주며 두준이 장난스럽게 엄지를 들어 보이자 기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기광은 마운드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편은 아닌 듯 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약간은 통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시금 사인에 맞춰서 기광이 공을 던질 때, 미트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나왔다. 공백기 동안 어깨운동을 했던 건지, 아니면 혹사수준으로 뛰던 경기를 쉬어서 그런 건지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두준은 마운드로 갔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오랜만에 마운드에 서는 거라 조금 힘이 들어갔나 봐요."
"아니에요, 잘 하고 있어요! 이대로만 하면 연습 경기때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네."
"있다가 선배들이랑 같이 나가서 점심 먹기로 했는데 기광씨도 갈래요?"
"아, 죄송해요. 저 선약이 있어서."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같이 먹어요."
마운드 아래에서의 성격이 어떤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결국 시합에서 제 사인대로 공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연습경기에서 기광의 마운드 순서는 두 번째였다. 천천히 몸을 풀면서 긴장을 빼고 있으라고, 감독이 제 나름의 배려를 해준 것이다. 두준은 주전포수로 나가 선배 투수의 공을 받고 있고, 기광의 연습 상대는 드래프트에서 지명으로 데려온 신인 중견수였다. 기광의 공을 받던 어린 중견수는 공을 던져서 넘겨주지 않고, 직접 기광이 있는 곳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와, 어떻게 공이 글러브에 딱딱 들어와요? 저 이참에 포수로 전향 할 까요? 어때요? 선배랑 저랑 잘 맞을 것 같지 않아요?"
"사인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데. 너 그거 다 외우지도 못 할걸?"
"그런가요.."
"그래도 어깨 좋으니깐 웬만한 수비 포지션은 다 잘 할 거 같아."
"역시, 제가 좀 그렇죠? 부모님이 어릴 때 수영 시켜서 그래요. 중학교 2학년인가? 그때까지 수영 했거든요."
"진짜? 그런데 왜 갑자기 야구를 하게 된 거야?"
"중학교에 수영부가 없어서 학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저보고 갑자기 야구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구요."
두준은 덕아웃 근처에서 몸을 푸는 기광을 슬쩍 돌아보았다. 보통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쉽게 파악되곤 한다. 하지만 기광과는 계속해서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고, 그래서 사적인 관계형성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석에 타자가 들어와 루틴을 반복하자 다시 고개를 돌린 두준은 능숙하게 사인을 보냈고, 미트의 위치를 잡았다. 두준이 잠깐 시선을 돌렸던 탓에 감독의 사인이 있던 거라 혼동한 타자는 사이드에 들어오는 직구를 쳐내지 못 했고, 내내 그것에 대해 신경 쓰느라 결국 아웃을 당하고 이닝이 마무리되었다. 덕아웃으로 들어온 두준은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후배와 몸을 풀고 있는 기광을 보았다.
4회 말, 예상보다 일찍 선배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5회쯤에나 투입될 줄 알았던 기광은 씹고 있던 껌을 휴지로 감싸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마운드로 올랐고,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를 보며 글러브를 명치께에 대고 호흡을 3번 정도 가다듬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목 부근에 손을 얹어 목걸이를 만져보려 했으나 뒤늦게 라커룸에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마운드에서나, 타석에서나 루틴 후에 습관처럼 했던 것인데 이것마저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팀으로 왔으니,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놓았던 것인데 아직 마음 한 구석에서 유니콘즈를 다 밀어내지 못 한 것 같다. 점수 차는 1대0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번 타석만 잘 마무리하면 공격할 차례이고,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던지는 족족 타자들의 방망이에 공이 얻어맞을 일도 없을 것이다. 수학공식마냥 비슷한 사인만 줄줄 던져주는 포수도 없고, 팔꿈치 아픈 게 싫어서 안 될 것 같은 수비는 일찍이 포기해 버리는 외야수도 없다. 그저 두준의 사인대로, 자신은 공을 던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힘껏 공을 던졌다. 그리고 결과는 볼 이었다.
"저 자식 저거 왜 저래?"
유니콘즈에서 3루수로 선수생활을 하다 은퇴했었던 코치는 기광이 던진 볼을 보자마자 의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저래?'
당황한 것은 두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훈련할때 뿐이었지만 두준은 기광의 공을 받을 때 단 한 번도 미트를 움직인 적 없었다. 공백기 이후의 첫 경기라서 긴장한 탓인가, 생각한 두준은 맞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커브볼 사인을 보내고 미트를 정 가운데에 두었다. 그리고 결과는 또 볼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빠른 직구를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는 볼은 아니었지만,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와 공이 배트에 맞았다.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파울이었다. 하지만 파울이 아니었다면, 미트가 있는 곳 보다 조금 더 아래로 공이 들어왔을 것이다.
어찌저찌 4회 말을 실점 없이 잘 마무리하고서, 덕아웃으로 들어올 때 두준이 말을 걸려 했으나 코치가 더 빨랐다. 아마도 감독이 한 소리 하려는 것을 코치가 잘 얘기해 보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 위해 가까이 갔으나 코치는 기광을 데리고서 덕아웃 구석으로 가버렸다.
"너 긴장했니?"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마운드에 올라서 그래?"
"그건 아닙니다."
"또 지는 게 겁나?"
"...네."
"그래. 지는 게 무섭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어. 그래도 여긴 이제 유니콘즈 아니잖아. 동료들 믿고, 너는 너 대로 또 스스로를 믿고 공을 던지면 돼."
"네. 시정하겠습니다."
"긴장해서 헛손질 하는 건 오늘까지야. 알았어?"
"알겠습니다."
코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기광은 다른 선수들 틈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두준은 속에서 서운함이 스멀대며 올라왔다.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심적으로 걸리는 것이 있다면 충분히 자신과 상의해 던지기 어려운 구종은 배합에서 빼도 될 텐데.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무시하는 건가..."
"뭐?"
"네? 아,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그걸 또 하필이면 근처에 있던 감독이 들어 버렸고. 당황한 두준은 자신의 타석까지 2명이 남았지만 괜히 배트를 꺼내 보았다.
정신을 차린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혼자 정리를 끝낸 건지 다행스럽게도 기광은 나머지 이닝을 1실점으로 마무리 하고서 경기는 4대2로 승리를 거두었다. 처음 호흡을 맞춰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새 팀으로서의 새 출발이 시작된다. 리그 개막전을 앞두고, 사기증진을 위해 회장은 아주 큰 공약을 내세웠다. 단장은 마치 고양이에게 낚시대 장난감을 흔들어대듯 HL모터스의 출시 예정인 신형 세단 차키를 집게손가락으로 들고서 모든 선수들이 볼 수 있게 좌우로 천천히 크게 흔들어 보였다.
"선수단 여러분. 보이십니까? 여러분들의 목표입니다."
"에이, 우리가 무슨 돈 때문에 야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속물로 보는 거 아닙니까?"
"물론 야구가 좋아서 하시겠지만, 잘 해서 이런 차도 공짜로 받고 연봉도 오르고 내친김에 골든 글러브에서 상도 타면 더 좋겠죠. 하지만, 우리 회장님께서 쪼잔하게 차만 주셨을 까요? 아니죠. 가을까지 화이팅 하라는 의미로 특별히! 법인카드도 하사하셨습니다!!"
법인카드라는 말에 선수들은 더욱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마치 한 달은 굶은 사람들 마냥 소리를 질러대었다.
"근처에 있는 고기집 통으로 빌려 놨으니깐 우리 선수 분들은 걱정 없이 마음껏 드시고, 또 그 힘으로 가을까지 열심히! 야구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언제 보아도 단장의 혓바닥은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마냥 아주 거침없으면서 매끄럽게 문장을 뱉어냈다. 선수들이 배트와 글러브, 수건 등을 정리하며 연습을 마무리할 때 두준은 또 습관처럼 기광을 보았다. 기광은 감독에게로 가서 짧게 대화를 주고받더니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했고, 혼자 연습실 밖을 나갔다. 감독과 다른 선수들을 번갈아 보던 두준은 황급히 기광의 뒤를 따라 나섰다.
"기광씨!"
조금 멀리 있는 뒷모습을 보며 순간 뭐라고 부를지 고민했다. 기광아, 라고 하기엔 아직 그다지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 팀이 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어색하게 기광씨라고 부를 순 없었다.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도 아니고, 동갑이면서 한 번도 같은 팀으로 지내본 적 없으니 이보다 애매한 사이가 어디 있을까. 포수와 투수인 주제에.
"왜 벌써 가요? 오늘 회식 안 가요?"
두준의 부름에 돌아본 기광은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향해 더 다가가지도, 다가오길 기다리지도 않으며 제자리에 멈춘 채로 대답했다.
"개막 전엔 관리하느라 따로 식단을 짜서 먹어요. 습관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컨디션이 더 좋더라구요. 두준씨가 저 대신 맛있게 먹고 오세요."
"아..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네."
자신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믿었다. 먼저 말을 거는 쪽은 늘 자신이었으니까. 그저 공만 잘 던져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마운드로 오르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는지, 투구 연습은 무엇을 위주로 하는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생각을 하며 경기에 영향을 줄 정도로 속을 어지럽혔던 것은 무엇인지 모두 자신이 알아야 했다. 그는 상당히 통제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기에.
몇몇 선수들은 열의가 잔뜩 올라서 어느 팀이든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이번이 첫 리그 출전인 신입 선수들은 달랐다. 절대로 웨일즈만큼은 개막전 상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날마다 빌었더랜다. 그리고 운영팀이 대진표 추첨 결과를 들고 돌아왔을 때 모두 회장의 법인카드를 받았던 날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단 한 사람 빼고.
"야, 어떻게 걸려도 딱 유니콘즈가 걸리냐?"
"그러게. 이거 뭐 하늘이 돕는 구단 그런 건가?"
"이 자식들아. 유니콘즈 무시하지 마라. 그래도 왕년엔 꼬박꼬박 코시 진출할 정도로 잘 나갔었다고."
"에이~ 그것도 다 10년은 더 된 이야기죠."
"코치님 유니콘즈 출신이라고 막 편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러시면 저희 섭섭합니다. 이제 우리도 다 같은 유니버스 식구인데."
야구를 그만두지 않은 이상 언젠간 한 번은 맞붙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본 옛 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최약체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하는 것이 억울한가 하면 그건 아니다. KBO 프로 구단 중 제일 약하고, 못 하는 팀이라는 말은 사실이기에. 배트를 들고서 옛 팀에 대해 떠드는 동료들 쪽을 멍하니 보던 기광은, 그만 자동으로 맞춰놓은 것을 잊고서 피칭머신에서 날아오는 공에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윽..."
공이 또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야 했지만 몸이 무겁고, 빠져나간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못 했다. 그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정지 버튼을 누르는 두준이 보였다. 위잉 대며 돌아가던 기계의 모터소리는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두준은 기광을 향해 가볍게 뛰어 왔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기계에 이상이 있던 거예요? 아니면 컨디션이 안 좋아요?"
"그냥 잠깐 집중을 못 했을 뿐이에요. 정말 괜찮아요."
"넘어진 곳은 의무실에 안 가 봐도 괜찮겠어요?"
"네. 진짜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 곧 시합인데."
"고마워요."
몸 상태를 훑어보던 두준의 시선은 목에 걸린 목걸이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라커룸에 갈 때마다 벗어두던 것이 뭔가 했는데, 숫자를 장식으로 넣어둔 금이 들어간 목걸이였다. 물어보고 싶었다. 이 목걸이는 무슨 의미냐고. 어떠한 가치가 있기에 마운드로 올라올 때 마다 목 부근을 만져대는 거냐고.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던 탓인지, 두준의 시선을 인식한 기광이 목걸이 줄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아, 목걸이가 특이해서요. 보통 운동하는 사람들은 거슬려서 잘 안 하잖아요."
"아아.. 별건 아니에요. 그냥 기념으로 맞춘 거라."
괜히 코끝을 문지르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두준은 다 꺼내지 못 했던 궁금증이 잔상처럼 머리에 남았다. 무엇을 기념하기 위함일까.
개막전이 시작되자 관중석엔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유니버스의 마스코트인 우주복을 입은 별모양 캐릭터는 관중석 앞에서 유니콘즈의 마스코트와 장난을 주고받았고, 관객들은 각자 팀의 응원가를 부르며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기광은 연신 목 부근의 목걸이를 만져댔다. 그의 순서는 두 번째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손으로 경기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두준은 또 다시 습관처럼 기광을 살폈다. 긴장한 듯 보이지는 않지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꼭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같은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더셔츠의 소매로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것을 보고서, 두준은 타월을 건네었다.
"많이 더운가 봐요. 물 줄 까요?"
"네? 아뇨, 괜찮아요. 고마워요."
"오늘 선발이죠? 부럽네요. 저는 주전에서 밀려났는데."
"개막전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 경기들이 더 중요하니깐 몸 아끼라고 뺐을 거예요."
"제가 아무래도 기광씨에 대해 착각했던 것 같아요."
"네?"
"처음엔 되게 낯가림 심하고, 잘 안 맞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은근히 배려심도 있고 그러네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응?"
"아니에요. 두준씨도 남들 잘 챙겨주고, 좋은 사람 같아요."
기광은 오히려 착각하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고,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좋은 말도 아닌데 괜히 꺼내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경기는 유니버스의 선공으로, 유니콘즈가 수비를 하며 시작되었다. 펜스에 기대어 유니콘즈의 덕아웃쪽을 보니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바뀐 얼굴은 거의 없었다. 제 공을 받아주던 포수 선배는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있고, 함께 카페를 다니며 제구를 잘 하는 방법에 대해 비법이 뭐냐고 알려달라던 투수 동생은 동료들의 배웅인사를 받으며 마운드로 뛰어갔다. 화이트보드 구석에 또 이상한 낙서를 하는 좌익수도, 그런 그의 등짝을 때리며 나무라는 코치님도, 구석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감독님도 그 모든 모습들 속에는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함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친했던 옛 동료의 시선이 제 쪽으로 향하는 것 같자 기광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러고 있으니 꼭 미련이 남은 사람 같다는 생각에, 기광은 모자를 눌러 내리며 의자에 앉았다.
- 4회 초, 다시 유니버스의 공격. 타석에 5번 타자 OOO선수가 들어섭니다. 현재 2대 1의 상황.
- 유니버스에서 어떻게든 동점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인거죠.
- 네, 그렇습니다. 어깨가 아주 무거울 텐데요, 자 바깥쪽 직구!
- 쳤습니다!
- 아아. 파울이네요.
- 부담감 때문에 너무 급하게 배트를 휘두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중계 소리와 함께 경기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자신의 타석을 앞두고서 기광은 몸을 천천히 풀었다. 뒤 돌아 보자 감독이나 코치의 별 다른 지시는 없었다. 유니콘즈의 경기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4회까지는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며 초반에 점수를 미리 벌어 놓는다. 그리고 경기가 진행될수록 타자들은 점점 투수의 패턴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때부터 역전당하는 거다. 이 때문에, 초반엔 힘내서 응원하던 팬들도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지쳐가고 만다. 유니콘즈와 피닉스의 경기에서 관중석에 앉아 토익 문제집을 풀던 한 대학생의 짤은 아직도 인터넷에서 떠돈다. 얼마 전엔 토익좌의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어느 유명한 식품기업에 취직했다는 글이 올라왔었다. 그리고 댓글 창엔 유니콘즈의 팬이니 역시 보통 멘탈이 아니라며, 뭘 해도 될 사람이라고 칭찬 반 농담 반이 담긴 댓글이 달렸다.
-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 원아웃, 1루. 타석에는 7번 타자 이기광 선수가 출전합니다.
- 아, 이 선수는 유니콘즈 출신이죠?
- 그렇습니다. 친정팀과의 대결인데요.
타석에 서서 배트를 어깨에 얹고 숨을 3번 내쉬었다. 자세를 잡으며 슬쩍 포수 쪽을 보자 순간 눈이 마주쳤고, 기광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직구로 잡아내려다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변화구로 올 것이다. 자신이 늘 그런 식으로 던져왔으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배트에 맞은 공은 멀리 외야까지 뻗어 나갔고 공을 잡지 못 한 외야수는 뒤늦게 2루로 던졌으나 이미 도루에 성공한 뒤 였다. 1루수에 있던 옛 유니콘즈 동료는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기광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 뭘 슬라이딩까지 하고 그러냐. 오바하지마."
"열심히 해야지. 넌 안 그럴 거야?"
"짜식이 오랜만에 보는데 되게 무안 주네."
기광은 정말로 죽을 만큼, 최선을 다 할 작정이었다. 그래야 혹시나 자신의 손에서 경기가 끝난다 하더라도 죄책감이 덜 할 것 같아서. 타석에 8번 타자가 들어왔다. 루틴을 하고, 자세를 잡는 것을 보며 기광은 조금씩 2루로 전진했고, 공이 배트에 맞을 때 마다 도루를 시도했다. 그런 기광을 보며 유니콘즈의 1루수는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너 진짜 진심이구나?"
그런 그의 말에 기광은 대꾸하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니까.
어느새 베이스는 3루에 6번이, 2루에 기광이 섰고 8번 타자는 1루 도루에 실패하였다. 2아웃의 상황에서 9번 타자의 차례가 돌아왔다. 21살 비교적 야구경험이 적은 어린 나이지만 도루를 2초대에 끊는 선수였다. 보통 이러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만루를 걱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린 선수는 개막전에서, 생에 첫 홈런을 만들어 내었다. 관중들의 환호소리가 귀를 찢을 것 같을 때에 기광은 공이 날아간 쪽을 바라보며 느린 뜀박질로 홈 베이스에 들어왔다. 전광판 쪽으로 넘어간 공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고, 공을 가지러 가기 위해 좌석을 넘어가는 관중들이 보였다. 높고 커다란 전광판에 띄워진 숫자는 어느새 2대1에서 2대 4로 바뀌었다. 동료들의 기쁨 섞인 박수소리와, 환호소리, 첫 홈런을 낸 선수를 향해 감독이 흥분감에 찬 목소리로 잘 했다고 칭찬하는 말소리 그 모든 것들은 배경음처럼 귓가에서 멀어지며 기광의 시선은 유니콘즈의 덕아웃으로 내려왔다. 그때 눈앞에 물통이 불쑥 내밀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자 두준이 웃으며 물병을 제게 건네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아.. 고마워요."
물병을 받아든 기광 역시도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을 목 뒤로 넘겼지만 전혀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숨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타석에 올라가서도 유니콘즈의 포수를 의식했고, 1루에 가서는 유니콘즈 선수와 잡담을 주고 받더니 홈런을 친 상황에서도 우리 팀이 아니라 유니콘즈부터 확인했다. 이제 그의 공을 받는 것은 유니버스에 소속된 자신이고, 유니버스의 선수로 점수를 낸 것인데. 두준은 알고 싶었다. 그에게 유니콘즈는 어떤 의미였는지.
5회 초에 1점, 7회 초에 2점을 내서 현재 스코어는 유니버스가 7점, 유니콘즈가 3점이 되었다. 또 반복되는 상황에 유니콘즈의 관중석이 점점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7회 말, 경기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또 다시 가슴팍에 글러브를 얹고 숨을 3번 고른 후에 목걸이가 있을, 목 부근을 손으로 쓸었다. 루틴을 다시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자신은 지금 다른 팀에 속해 유니콘즈와 상대하고 있는 거구나. 로진백을 들고 손에 송진가루를 묻힌 기광은 포수가 주는 사인을 보았다. 초구는 안쪽 빠른 슬라이더였다. 아무래도 팜볼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직 팜볼은 경기에서 쓰이기기에 부족했다.
- 던집니다. 안쪽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 헛스윙이네요.
공을 던질수록 몸에서 점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인중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서 다시 공을 던졌고, 그렇게 삼진아웃을 잡아내며 7회는 마무리되었다. 삼진아웃을 잡아낸 기광에게 동료들과 감독, 코치진은 역시 마무리 투수로 제격이라며 칭찬했고 기광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글러브를 손에서 빼냈다. 그렇게 8회 초까지 삼진아웃으로 마무리했을 때 동료들은 괜히 골든 글러브의 공무원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 경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 그랬던 것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 마다 선수들의 sns에 어떤 댓글이 달리고, 팀 분위기는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8회 말, 기어이 점수 차는 8대 3이 되며 연장전까지 가는 일 없이 9회 초가 되었다. 2볼 2아웃의 상황, 3루에는 기광이 있었다. 마지막 득점기회였다. 타석에 들어온 9번 타자는 홈런을 냈던 선수이고, 유니콘즈는 물론 유니버스 양 팀 모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때 기광은 문득 바람이 다르게 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경기를 하다 보면 익숙한 상황일 때 느껴지는,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매 경기마다 같은 상황의 반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선수로서의 감이라는 게 있다는 거다. 그 순간 9번 타자가 안타를 쳐냈고 공은 외야수의 글러브 빗겨갔다. 기광은 자신이 홈베이스를 무사히 밟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긴장이 조금 풀어져 버렸다. 커지는 함성소리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고, 앞을 보자 포수가 몸을 일으키고서 태그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기광은 있는 힘껏 달리며 홈 베이스를 향해 몸을 던졌다. 눈앞에 흙먼지가 자욱했다. 고개를 들자 심판은 세이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서야 알았는데, 포수의 미트는 제 몸에 닿지도 않았다. 결국 9회 초는 기광의 득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덕아웃으로 돌아가자 코치가 곧 마운드에 오를 녀석이 왜 무리하냐고 물었다. 기광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거일 뿐 이라고 대답했지만, 아직도 순간적으로 바뀌어 버린 바람의 냄새가 코끝에 남은 듯 했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마운드로 오르자 하늘 끝까지 떠올랐던 해는 어느새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점수 차는 기어이 9대3까지 벌어졌고 유니콘즈의 팀에는 이미 패색이 드리워졌다. 펜스에 몸을 기대고서 선배가 준 귤 한 조각을 받아먹은 두준은 마운드가 뚫어질듯 기광을 보았다. 화면 전광판에 기광의 얼굴이 가득 잡히자 순간 환호성이 들려왔다. 확실히 야구선수 치고, 선수가 아니어도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사인이 끝난 듯 미트가 위치를 잡았고 기광은 양 팔과 한 쪽 무릎을 쭉 들어 올리고서 투구 폼을 취했다.
'팜볼?'
두준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멀리서 본데다 속도가 제법 있었기에 확실하지는 않았다. 상대 타자 역시도 구종을 헷갈린 건지 고개를 작게 까딱거렸다. 다시 포수의 사인이 떨어지고, 기광은 손가락 두 개를 떨어트린 채 공을 쥐었다.
"스트라이크!"
심판의 두 번째 스트라이크 판정이 떨어지고서 타자는 다시 한 번 갸웃대더니, 배트를 손에 더 꽉 쥐고서 자세를 잡았다. 포수가 돌려주는 공을 받아낸 기광은, 이번엔 커브용 그립을 쥐었다. 높은 쪽 느린 커브. 포수의 의도를 읽어낸 기광은 최대한 느린 속도로 던졌고, 이번에도 역시나 스트라이크였다. 원 아웃에 주자는 없고 점수 차는 9대 3이었다. 충분히 여유롭게 가도 되는 상황이지만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 기광은 주전포수에게 말했었다.
"끝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이기고 싶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유니콘즈에게 해줄 수 있는, 미처 다 하지 못 했던 마지막 인사이고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드디어 잔뜩 긴장한 세 번째 타자가 타석으로 올라왔고, 상황은 2스트라이크가 되었다. 기광은 마지막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담아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가 끝이 나며 마치 폭죽이 터지듯, 관중석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뿜어져 나왔다. 덕아웃에서 뛰쳐나온 선수들은 기광에게로 모두 달려와 소리를 질렀고, 유니콘즈의 마지막 타자는 축 늘어진 어깨로 타석을 떠나갔다. 그들은 마치 결승전 우승이라도 한 것 마냥 기뻐하며 서로의 몸에 물을 뿌려댔고, 이번 승리의 큰 주역인 첫 홈런을 날렸던 어린 선수를 껴안고서 들어올리기도 하였다. 양 측의 선수들이 모두 나와 서로에게 인사를 할 때 기광은 그 눈빛들을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관중석 쪽으로 가서도 인사를 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와 짐을 챙길 때 두준은 혼자 어딘가로 나가는 기광을 보았다. 아무래도, 유니콘즈를 상대로 큰 점수 차를 내서 이긴 것이 불편했던 거라 추측했다. 그를 뒤따라 나가자, 복도에 서서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준은 확실히 알려 주기로 했다. 지금 너의 소속팀이 어느 쪽인지. 하지만 막상 그 말간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내가 또 지게 만들었어요. 나 때문에 항상 지던 팀인데, 또 나 때문에 졌어요."
뱀의 머리로 사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꼬리와 몸통을 억지로 이끌고 가면서, 제 살점들이 떨어져 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바로 그 잘려나간 용의 꼬리이기에 두준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긴 거잖아, 우리. 유니콘즈를 지게 한 게 아니라, 유니버스로서 승리를 만들었잖아."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너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고, 믿을 수 있는 팀원들이 있으며, 함께 우승을 꿈꾸고 이루어 나갈 사람들이 있다고. 두준은 기광을 살며시 제 품으로 끌어당겨, 그의 등 위로 손을 얹고 가만히 토닥였다.
"앞으로 유니버스팀은 절대로 너 때문에 지는 일 없을 거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응."
잔뜩 부은 눈으로 코를 훌쩍대며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두준은, 기광에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가을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KG 드래곤즈와의 6일간 치뤄진 경기도 끝나고, 월요일 아침부터 트레이닝 룸으로 나온 두준은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을 애써 무시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그 주의 경기에 대한 짧은 소감을 sns에 올리는 것이 습관이고, 팬들과의 오랫동안 이루어진 소통 방식이었다. 웨일즈에 있던 시절엔 욕도 많았지만 유니버스에 들어온 이후로는 관심이 끊어진 건지, 이전보다 날선 댓글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스 가더니 주전도 되고 살판났네?ㅋㅋㅋ 니땜에 웨일즈 6일 연속 지던 건 기억 안 나냐
딱히 그러한 것들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웨일즈와 유니버스의 차이점은 뭘까. 뭐가 그렇게 다르기에 그때는 매번 벤치만 지키고, 지금은 주전이 될 수 있는 걸까. 자신 말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현재 팀의 주장인 선배 포수와, 신입 포수가 있기에 이유가 되지 못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남들보다 전략을 잘 짠다거나, 배팅실력이 뛰어난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닌 것 같았다. 한참 상념에 빠져 러닝머신 위를 뛰다가 작동을 멈추고 내려오니 어느새 기광이 동료 2루수와 함께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티를 내던가."
"지가 못 들어놓고 웃기는 새끼네.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데. 안 그렇냐, 기광아."
"그러게."
동료의 말에 살짝 웃는데, 예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둘만 있을 때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KBO리그의 팬들이라면 다들 가입하는, 국내 최대 야구 커뮤니티가 있다. 그 곳엔 각 구단별 게시판이 있고 보통은 그 게시판 내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며 커뮤니티를 즐긴다. 물론 잡담만 올라오지 않는다. 선수가 영입되면 고유 닉네임을 가진 응원단장이 선수의 이름을 넣어서 개사한 응원가를 올리고, 경기 중엔 실황 중계 링크가 올라오고, 구단과 선수들, 심지어는 모기업의 주식에 대한 기사까지 스크랩하기도 한다. 하지만 웨일즈의 팬 문화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게시판보다, 자체적으로 카페를 개설하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익명성을 악용하여 선수들에 대한 악플과 조롱 글이 너무 많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래서 웨일즈의 모기업인 대진그룹에서 법무팀을 분기별로 파견시켜 준다. 그리고 오늘이 그 파견 나온 날인가 보다. 두준은 아주 오랜만에 웨일즈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지난번 고소를 진행했던 악성 게시물에 대한 1차 재판 결과가 나왔다고.
- 시간 되시면 출석해주시고, 바쁘시면 꼭 안 오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항상 고생이 많으시네요."
- 아닙니다. 선수님께서 마음고생 많으셨죠. 어휴, 이 어린놈의 자식들이 뭘 보고 배운 건지... 그럼, 2차 재판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선수님도 고생하십쇼.
전화를 끊고 수납장에 올려둔 두준은 환복을 이어갔다. 최근 SNS엔 유니버스가서 주전되니 좋냐는 댓글들이 자주 보였다. 그럴 때 마다 두준은 보란 듯이 우승하고 싶었다. 원래 그는 드래프트 지명 1순위의 유망주였고, 고교리그인 청룡기에서 모교를 우승으로 이끈 주장이기까지 했으니. 잘 나가던 그의 추락은 부상 때문도 아니었다. 처음 주전이 되어 *입스가 왔을 때의 기억과 감각은 이따금 긴장을 심하게 한 날, 악몽이 되어 찾아오곤 한다.
*입스 : 불안감과 긴장감 및 압박으로 인해 가벼운 근육경련, 발한 등 신체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유니버스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아폴로의 머리만 본 따서, 작고 샛노란 모양의 열쇠고리 상품이 출시되면서 선수들 사이에 작은 유행이 생겼다. 가방이나, 클러치, 차키 등에 아폴로의 열쇠고리를 다는 것이다. 기광은 제 손에 쥔 아폴로 열쇠고리를 보며 한참이나 망설이고, 뭐라고 말을 건네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냥 밋밋하게 주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또 큰 의미가 있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플라이 아웃을 당하고 덕아웃으로 두준이 들어오자 기광은 황급히 주머니에 넣어 숨겼다.
"고생했어. 멀리까지 쳤는데 아쉽다."
"그러게. 아, 이거 도루 할 수 있었는데."
두준은 땀을 닦으며 물병을 가지러 갔고, 기광은 괜히 제 글러브만 만지작거렸다.
피닉스와의 매치는 이렇다 할 홈런도 없이 4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경기 마지막 날 까지 열쇠고리를 전해줄 타이밍을 찾지 못 했고, 퇴근길 까지 기다려준 팬들에게 사인을 끝내고서 버스에 올라탔다. 다른 선수들도 많이 지친 모양인지 돌아가는 버스 안은 조용했다. 이따금 코치님의 작게 코고는 소리만 살짝 씩 들려올 뿐이었다. 기광은 맨 뒷자리의 창가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폴로 열쇠고리네?"
"어?"
그때 두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예 잠을 안 잔건지, 그새 깬 건지 몸을 뒤로 돌려서 등받이를 짚으며 말을 걸어왔다. 두준의 말에 놀란 기광은 그제 서야 자신이 열쇠고리를 아직도 손에 쥐고 있단걸 알게 되었다.
"어어.. 다들 하나씩 달고 다니니깐."
"귀엽다."
"그러게. 저기.. 너도 하나 가질래?"
"나 준다고?"
"응."
"고마워. 가방에 달아야겠네."
그대로 손을 뻗은 두준에게 기광은 열쇠고리를 손바닥 위로 올려 주었다. 내내 주전으로 나와 경기를 뛰느라 얼굴이 조금 지쳐보였지만, 그래도 두준은 기광에게 웃어 주었다.
"귀엽네. 말랑말랑하고."
손 안에 담긴 열쇠고리를 만지작대며 말하지만 두준의 얼굴은 여전히 기광에게로 향했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부끄러워서, 기광은 부러 시선을 다시 창 밖 너머로 돌렸다.
"왜 선발명단에서 빠진 겁니까?"
두준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팀도 아니고, 무려 웨일즈와의 대결이었다. 두준의 항의에 감독은 볼펜 뒷면으로 이마를 긁었다.
"너가 이러고 있으니깐."
"제가 뭘, 말입니까?"
"지난주에도 선발 나갔던 놈이 몸 생각 안 하고, 천지분간도 못 하고 감독한테 쪼르르 와서 또 선발에 넣어 달라고 떼쓰고 있으니까요."
딱히 질책하는 어투는 아니었지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감독이 한 말 중에 틀린 것 하나 없었고, 강팀인 웨일즈와의 매치에서 이겨야 함을 생각하면 자신이 빠지는 것이 맞았다. 노련함이나, 위기 대처 능력은 확실히 자신보다 주장인 선배 포수가 더 뛰어났으니. 타율이나, 도루 속도는 다른 선수들로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었다.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연신 울려댔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꽉 물어서 턱에 힘이 들어간 게 조금 화가 나 보이기까지 했다. 가방을 챙겨 실내 연습실을 나가려던 기광은 멈춰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기광의 옆으로 온 동료 선수가 어깨에 팔을 걸치며 큰 소리로 두준을 불렀다.
"야, 너도 적당히 해 이제!"
배팅을 멈추고 돌아본 모습은 땀으로 흥건했고,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씻고 막걸리나 때리러 가자! 기광이도 간대!"
"아, 저는.."
"가야지, 인마. 나도 가고, 우리 귀여운 막둥이들도 온다는데."
갑작스러운 약속에 동료를 보던 기광은 공이 네트에 맞는 소리에 다시 두준이 있는 쪽을 보자 어느새 보호구를 벗고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기광도 모임에 끼어들게 되었다. 절대로 두준이 가니깐 자신도 가는 것이 아니다.
오전 내내 내리던 빗방울은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고 있었다. 밑이 닳고, 살짝 찌그러진 양은사발에 막걸리를 따라 작게 한 모금 마신 기광은 이전보다 더 커 진 빗소리에 창밖을 보았다. 비가 신경 쓰이는 것은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일까지 비 온다던데."
"이거 그친다 해도 땅이 다 젖어가지고 경기 할려나 모르겠다."
"그러게요. 경기 취소되는 거 아니에요?"
"취소되면 우리야 좋지. 웨일즈랑 붙기 싫었는데."
"어! 그러고 보니 내일 경기 취소될 거 같으니깐 일부러 마시자고 한 거죠?"
"어린놈이 눈치는 드럽게 빨라요."
피자마냥 조각낸 파전을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서 한 입 베어 문 기광은 맞은편에 앉은 두준을 보았다. 아까부터 안주는 별로 먹지도 않더니 연신 막걸리만 마셔 대서, 벌써 다른 이들 보다 2배는 마신 것 같았다.
"저거저거 지가 선발 아니라고 혼자 술 다 먹네."
"야, 너 취해도 우리 안 챙긴다."
"어어... 그래그래."
이미 취기가 많이 오른 듯, 동료들의 장난에도 몸을 흔들대며 대충 대꾸하기만 하였다. 결국 보다 못 한 기광은 김치전 한 조각과 동그랑땡 하나를 두준의 앞접시 위로 올려 줬으나, 그마저도 취해서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시간도 늦어지고, 슬슬 자리를 마무리할 때 가게 사장이 수줍은 얼굴로 쭈뼛쭈뼛 오더니 유니버스의 팬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 기분이 좋아진 선수들은 내친김에 함께 사진도 찍고, 취해서 엉망진창인 사인도 해줬다. 두준을 거의 들쳐 업다시피 부축하던 기광은 너도 이리 와서 사진 찍으라는 주장의 말에 그대로 동료들 옆으로 가서 섰고, 장난기 많은 후배가 두준의 팔을 들어 같이 사진 찍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은 곧바로 유니버스의 커뮤니티에 올라왔지만 기광은 제 집 침대위에 널브러진 두준을 보며, 모른 척 해 주었다. 이 사진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팬들에게 놀림거리로 떠돌아다닐지 짐작가지만 그러게, 누가 술을 그렇게 많이 먹으랬나. 기광은 한숨을 쉬고는 술 냄새가 짙게 베인 겉옷을 벗겨서 스타일러 안에 넣어 두었다.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은 것을 보니 내일 경기는 취소될 듯하다. 그때 천둥소리가 들리고, 두준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빗소리 때문에 시끄러운 것이라 생각한 기광은 암막커튼을 쳤으나 두준은 여전히 아픈 환자처럼 끙끙거렸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보니 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그때 두준의 휴대전화에서 알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쳐다보니 웨일즈 팀장님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문자였다.
[선수님 전화 왜 안 받으시나요 급한 일입니다.]
[전화 못 받으시는 상황이면 급한 대로 문자라도 남깁니다.]
[그 악플러중에 23살이던 남학생, 교도소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답니다.]
[2차 재판은 진행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 했을까. 늘상 자신을 먼저 챙겨주고, 잘 웃고, 다른 선수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기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저 잘 지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각자 저마다의 슬픔을 지고 살아간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어째서 두준에게 만은 예외로 두었는지 기광은 조금도 헤아려보지 못 했던 자신을 탓했다. 바닥에 앉아 침대 위에 턱을 괴고서 잔뜩 찌푸린 채 잠든 그 미간을 보았다. 천둥이 칠 때 마다 끙끙대는 것이 아주 나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에, 기광은 두준의 등을 몇 번 부드럽게 쓸어주다 천천히 토닥였다.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던 빗줄기는 아침이 되자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 경기는 우천상황을 고려해 2시로 미뤄졌다. 덕분에 9시가 지나서야 눈을 뜬 두준은 제일 먼저 눈앞에 엎드려 잠든 기광을 볼 수 있었다. 웨일즈와의 첫 경기 전날이라 신경 쓰였던 탓에 술을 많이 마셨고, 그 바람에 잔뜩 취해서는 기광의 집에 신세를 진 것 같았다. 두준은 눈 뜨자마자 황급히 일어나 기광을 흔들어 깨웠다.
"야, 야! 일어나! 오늘 첫 선발로 나오는 애가 이러고 자면 어떡해!"
두준은 급하게 기광의 팔이며 어깨며 주물렀고 혹시나 쥐라도 난건 아닌지 내친김에 다리까지도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어어.. 지금 몇 시야?"
"맞다. 몇 시야, 지금!"
기광의 옆구리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선 휴대폰을 확인하자 웨일즈의 법무팀 팀장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와 있었다. 문자도 여러 개 온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오늘 집합은 10시까지였고, 지금은 9시 20분이었다. 급하게 옷을 아무거나 껴입은 두준은 아직 정신을 다 못 차린 듯 보이는 기광을 데리고서 무슨 정신으로 옷을 입히고, 씻기고, 가방까지 챙겨서 구장으로 온 건지 모르겠다. 도착하고 보니 동료들은 선발도 아닌 놈이 왜 왔냐는 표정이고, 함께 술을 마셨던 이들은 머리가 엉망진창인 기광을 보며 안 봐도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흙이랑 잔디 상태 안 좋으니깐 부상 조심하고, 실내 연습장으로 모인다."
"네."
"알겠습니다."
감독의 말에 각자 저마다의 대답을 하고서 라커룸으로 향했다. 두준은 기광의 품에 그의 글러브를 안겨 주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제 가방에 넣어서 가져온 것 같았다.
"오늘 잘 하고, 안 다치게 조심해."
"응."
기광은 두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웨일즈와의 첫 경기인데 선발에 들지 못 한 것이 괜찮은지, 어제 웨일즈 법무팀 사람이 보낸 문자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괜찮은 건지. 하지만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대신, 꼭 이기겠다는 마음을 담아 두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시간이 되어가자 관중석에 가려던 두준은 노는 놈 뒀다 뭐하냐며 붙잡혀서는, 기광의 연습상대가 되어 버렸다. 미트를 들고 덕아웃 옆으로 향하며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의 등장에 근처에 있던 팬들이 인사하며 환호했다. 기광은 문득 얼마 전 유니버스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이 생각났다. 생긴거 만큼 야구하는 선수라는 제목이었는데, 물론 농담이겠지만, 댓글에 이런 유전자는 대대손손 유니버스에 이어져야 한다며 둘이 아들 낳아서 야구를 시켜야 한단다. 누가 봐도 헛소리임이 분명하지만 기광은 왜 하필이면 그걸 가볍게 넘어가지 못 하고 지금 떠올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두준이 자리를 잡고 앉아 미트를 들자 기광도 공을 던졌다. 그렇게 공을 주고받길 몇 번, 웨일즈의 관중석 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와 쳐다보니 웨일즈 선수들이 덕아웃으로 오고 있었다. 기광은 고개를 돌려 두준을 보았다.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자신만 뚫어져라 쳐다봤고, 기광은 또 다시 그 헛소리 가득한 댓글이 떠올라 별안간 귀가 새빨개졌다. 시작 시간이 다 되자 두 사람은 덕아웃으로 돌아왔고, 두준은 이왕 온 김에 관중석에서 오늘 경기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모자를 쓰고, 마운드로 올라가기 직전 기광은 두준을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두준아! 나 오늘 꼭 이길게!"
그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마운드로 향하는데, 두준은 그 모습이 꼭 팀 마스코트인 아폴로와 닮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작고, 반짝거리는 게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관중석에 앉아서 보는 경기는 직접 경기장에 오르는 것과 또 다르게 보였다. 전광판 화면으로 제 얼굴이 한가득 잡히자 두준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쌓인 알람을 확인하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사망했다는 악플러는 5년 동안 꾸준히 자신의 SNS에 욕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마냥 속이 시원하지 못 했다. 경기에 선발로 나오는 날이면 커뮤니티의 웨일즈 게시판엔 자신의 욕으로 도배되는 수준이었다. 동료들은 팀에 새로운 선수가 트레이드로 오거나, 드래프트 지명으로 신입이 올 때 마다 관례행사처럼 웨일즈 게시판은 절대로 보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고, 안 볼 수가 있겠는가. 그 악플들 때문에 결국 팀을 버리고 도망쳐 나와 유니버스로 간 것인데. 그래서 두준은 오늘 경기에 선발로 들어, 보란 듯이 이기고 싶었다.
[왜 그랬대요?]
짧게 답장을 보내고서 고개를 들었다. 플라이아웃을 당한 듯 도루를 시도하던 웨일즈의 선수는 다시 터덜거리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우울증이래요. 감옥에서 주는 밥도 맛이 없고, 인터넷도 못 하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고작 그런 이유로 우울증이 와서, 쉽게 삶을 놓아버리는 것에 화가 났다. 한참이나 경기장을 보다가, 옆에서 팬이라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말을 걸기에 두준은 다시 웃으며 익숙하게 아이가 입은 유니폼 등에 사인을 해주었다.
경기는 스코어만 놓고 본다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러지 못 했다. 연속되는 웨일즈의 안타를 겨우겨우 틀어막았고, 몰아치는 듯한 웨일즈 투수의 공에서 점수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비록 한때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야구 잘 하는 팀이란 칭호는 괜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날 많은 비가 내려 땅까지 덜 마른 터라, 2대1로 더 점수가 나지 않게 막는 것이 유니버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광은 슬슬 팔꿈치가 저려왔다. 하지만 두준에게 꼭 이기겠다고 약속했고, 이번 수비가 지나면 6회 말로 유니버스의 공격이기에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공을 던졌다. 배트를 휘두를 거라 예상했는데, 기습 번트였다. 땅볼로 날아온 공을 기광이 뛰어가 받아냈고 그대로 몸을 돌려 1루수에게 던졌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판은 아웃을 외쳤다. 아웃 판정에 유니버스의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했고 기광은 몸을 일으켜 어깨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아직 땅이 다 마르지 않아 흙 자국이 짙게 남아버렸다. 쓰리아웃으로 다시 유니버스의 공격차례가 되었고, 두준은 어깨를 주무르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기광을 보았다.
글러브를 수납장에 넣고 물을 마시는 기광에게 코치가 슬쩍 다가와 괜찮냐고 묻자 기광은 괜히 팔을 크게 돌리며 멀쩡하다고 대답했으나 사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팔꿈치가 저리던 것에, 수비하느라 어깨로 넘어졌던 것이 더해져 조금 욱신거렸다.
"그럼 6회까지만 좀 버텨줘라. 아무래도 이거 연장까지 갈 삘이다."
"네, 그럴게요."
하지만 경기 절반이 진행되었음에도 전광판의 숫자는 바뀔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흐렸던 날씨는 점차 습해지고 있어 두준은 더 걱정이 들었다. 제발 연장까지 가는 일은 없길 바랬다.
- 6회 초, 다시 웨일즈의 공격입니다. 점수는 아직 2대1인 상황.
- 둘 다 워낙에 막강한 팀이다 보니 좀처럼 점수가 잘 나지 않네요.
- 그렇습니다. 유니버스의 투수는 이기광 선수, 타석에 2번 타자가 들어옵니다.
- 아, 파울이네요. 방금 건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웨일즈 선수가 쳐내지 않았다면 볼이었을 텐데요.
휴대폰으로 중계영상을 보던 두준은 살짝 초조해졌다. 기광은 볼 사인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실수로 볼을 낸 적이 거의 없었다. 6회 초가 되었음에도 마운드는 교체되지 않았고, 한 눈에 보아도 어깨와 팔에 무리가 간 것이 느껴졌다.
- 쳤습니다!
- 아, 아웃이네요.
- 현재 원아웃 상황. 유니버스에서도 슬슬 투수를 교체해야 할 텐데요.
이제는 팔꿈치를 타고 어깨마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광은 자신이 6회를 다 채우겠다고 했다. 아직 웨일즈와는 다섯 경기가 남았고, 또 다시 경기하는 날이 오겠지만 첫 승부인 만큼 꼭 이기고 싶었다. 자신이 유니콘즈와의 첫 경기에서 이겼듯이, 두준에게도 웨일즈와의 첫 경기에서 승리를 안겨주고 싶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2번 타자는 어떻게든 아웃을 만들어 냈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다시 로진백을 들어 송진가루를 손에 묻힌 기광은 포수가 보내주는 사인을 보았다. 타자는 3번 타자였다. 4번 타자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끊어내고, 다시 공격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볼!"
하지만 기어이 볼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4볼을 만들고, 타자는 1루로 진출했다. 기광은 잠시 무릎을 짚고서 허리를 숙여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들자 타석으로 올라온 선수는 루틴을 반복하고 있었다. 숨을 크게 내뱉은 기광은, 다시 글러브를 가슴팍에 얹고 숨을 3번 내쉬었다. 두준은 초조하게 마운드에 선 기광을 보았다.
- 높은 쪽 빠른 직구, 쳤습니다!
- 이거 넘어 가나요?
한 쪽 귀에 꽂아둔 무선 이어폰으로 흥분에 찬 중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자의 배트에 맞은 공은 멀리 뻗어 나갔고, 신입 중견수는 있는 힘껏 달렸다. 관중들의 응원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심지어는 자리에 앉기 힘든지 일어서서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간 중견수는, 광고판까지 타고 올라가 팔을 뻗어서 공을 잡아내었다. 유니버스의 관중석에서 일순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나서 들뜬 응원단장이 두준의 손을 잡고 들었지만 두준의 시선은 계속해서 마운드에 머물렀다. 외야 쪽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더 버티기 힘들 정도로 어깨와 팔이 욱신거리고, 볼을 4개나 내는 실수까지 했으나 몸을 날려 4번 타자의 안타를 막아내는 동료를 보니, 이상하게도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깨를 주무르며 팔을 돌린 기광은 다시 포수의 사인에 집중했다. 낮은 쪽 팜볼이었다. 4회 초 5번 타자에게서 기습번트를 맞은 것에 신경이 쓰인 건지 팜볼을 사용하기로 한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기광은 공을 쥐고서 던졌고,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이번엔 같은 위치로 슬라이더였다. 결국 배트 한 번 휘두르지 못 하고 아웃당한 선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덕아웃에 돌아갔고, 기광은 모자를 벗고서 어깨를 주무르며 조금 느린 걸음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진짜 교체 안 해도 돼?"
"다음 선수 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요."
"기광아. 내가 볼 때 너 지금 엔돌핀 넘쳐가지고 아픈 것도 모르는 상태야. 내일 분명히 어깨 아파서 못 하겠다고 할 걸?"
"진짜 괜찮은데요.."
"안 돼, 인마. 교체야 너."
투수 코치가 상태를 봐주다가, 감독의 단호한 목소리에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아아!"
"이거 봐, 이거. 아프면서 뭐가 괜찮아."
유니콘즈 시절에는 비 오는 날 7이닝까지 뛴 적 있었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때는 야구를 한다기보다 그냥 처절한 싸움에 가까웠다. 정신력으로 내 몸이 아닌 듯 공을 던졌고, 결국 다음날 병원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어깨와 팔을 주물거리던 기광은 전광판 가득 잡힌 두준의 얼굴을 보았다.
기어이 연장전까지 돌입했을 때, 스코어는 어느새 2대2가 되었다. 10회 초, 웨일즈의 공격 기회로 경기는 이어졌다. 그리고 타석에 오른 웨일즈의 4번 타자는 기어이 홈런을 쳐내고야 말았다.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2루에 있던 선수도, 홈런을 쳐낸 타자도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두준의 불이 켜진 액정 화면에는 미안하다는 웨일즈 법무팀 실장의 문자 메세지 알람이 깜빡거렸다. 10회 말로 마운드가 교체되고, 타석에 들어온 기광은 기세가 완전히 웨일즈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맞든, 맞지 않던 계속해서 배트를 휘둘렀다. 처음에는 헛스윙이라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고, 그 다음은 파울, 그 다음번 역시도 파울이었다. 배트를 어깨에 두고 다시 숨을 3번 내쉬었다. 웨일즈의 투수가 투구 폼을 잡을 때 기광 역시도 배트 손잡이를 더욱 세게 쥐었고, 공이 날아오는 순간 번트를 대었다. 기습 번트에 땅볼로 날아간 공은 투수와 2루수 사이에 떨어졌고, 순간 중심이 앞으로 쏠려 넘어질 뻔했으나 그대로 달려가 1루 베이스에 슬라이딩했다.
"세이프!"
심판의 세이프 판정에 휴대폰을 꽉 쥐고 있던 두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2루까지는 도루에 성공했으나 다음 차례에서 병살을 당하고, 그 다음 타자는 안타를 쳤지만 플라이아웃을 당해 경기는 4대2로 끝이 났다. 이번이 첫 패배도 아니고, 앞으로 5경기가 더 남아 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흐려지던 날씨는 다 끝나고 나서야 겨우 먹구름 사이로 작은 햇살을 내밀었다. 경기장에 일렬로 선 선수들은 서로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고, 각자의 관중석 앞으로 가서도 팬들에게 인사했다. 유니버스의 팬들은 수고했다는 의미로 박수를 쳐주었다. 그때 기광이 객석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두준은 철망 사이로 걸린 그의 손가락 위에 자신의 손을 얽혀 들었다.
"미안해..."
너에게 행복한 기억만 주고 싶었다고, 함께 유니버스에서 야구하는 동안 좋은 추억만 남겨주고 싶었다고 말하려 했으나 결국 졌기에 그러지 못 했다. 아래로 떨군 두 뺨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은 흙바닥 위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기광아."
"어?"
"나, 너한테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얼기설기 엮인 손가락 사이로 아직 가라앉지 못 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기광에게로, 두준은 그리 밝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웃어 보였다. 그는 무릎을 굽혀, 저를 올려다 보던 기광과 시선을 맞추었다.
"적어도 나랑 함께 있는 동안은, 아니 유니버스에 있을 때 만큼은, 너한테 꼭 행복한 가을을 주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더 잘 할 테니깐, 올해 가을까지 열심히 하자."
"나도."
"어?"
"나도 너한테 유니버스에서 야구하는 동안 행복한 기억만 주고 싶어. 우리 가을까지 같이 가자."
한순간에 바뀌는 두 눈 속에는 아주 작은 우주가 들어 있었다. 두준은 이대로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한 걱정을 하며 마침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얽혀든 손가락과, 얇은 망을 사이에 두고 마주 닿은 손바닥 위로 서로의 쿵쿵대는 맥박이 느껴졌다.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이른 여름의 향에는 다가올 가을을 향한 기대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