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odbye Summer
나에게 있어서 여름 그 자체였던 그 애와는 다르게 요섭은 가을비 같다. 여름을 꾸역꾸역 밀어내 려 방울방울 떨어지는 가을 초입의 비. 여름을 사랑한 나는 밀려오는 가을이, 차가워 지는 공기가, 그리고 네가 버거웠다.
[섭광/두광]Goodbye Summer
날씨가 추워진다. 여름이 가고 있다.
날 힘들게 했던,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여름이 간다. 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인데 그 하 나가 사라져 내가 무너져 갈 때, 양요섭이 내 앞에 나타났다.
양요섭은 그 애가 그렇게도 반대하던 영화 오디션에서 다시 만났다. 양요섭은 그 영화의 주연으 로, 나는 조연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역할의 오디션 지원자로. 가장 밝게, 가장 활활 타오를 때 보았던 우리가, 너는 그대로인데 나 혼자 불이 꺼지고 재만 남아 초라해져 있어 오랜만에 본 네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다리를 떨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큰 소리로 연기를 연습하는 사람들 틈새에서 그 무엇도 하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나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나를 흘끔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앉아있는데, 소란스럽지만 긴장감에 가라앉았던 공기의 흐름이 조 금 들뜨는 게 느껴졌다. 대사를 중얼거리는 것과는 다른 설렘이 담긴 중얼거림이 내 귀에까지 닿 았을 때 고개를 드니 양요섭이 보였다. 단 몇 초간 복도를 가로질러 간 양요섭 때문에 밝아진 분 위기에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양요섭이 한 구석에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잠깐의 등장 만으로도 이 공간을 휘어잡는 사람. 맞아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 애, 그리고 나와 는 다르게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사람. 자신을 빛내기에 급급한 밤하늘의 별과는 달리 주위를 비 추는 태양 같은 사람. 흔한 별이라도 되고 싶어 호수 위 백조처럼 고고한 척 떠 있지만 사실은 수면 아래에서 추하게 다리를 휘젓는 우리와는 다른 타고난 사람이었다. 다시 본 요섭은 여전히 태양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간은 짧았기에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 한 작은 공간에 들어갔을 때 사라졌다. 너와 눈이 짧은 시간 스쳤을 때, 나는 네가 나를 보러 여 기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 공간에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너의 눈에는 나만이 비쳤다. 일부 러 너와 눈이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나를 뚫을 듯이 쳐다보는 너의 눈빛에 나는 속이 울렁였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눈치가 없던데 너의 눈 속의 감정이 보이는 것을 보면 역시 나는 주인공은 아닌가 보다.
나의 나이와 경력을 깎아내리는 무례한 질문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 오 디션이 끝나고, 나는 빠르게 나가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 다.
평소라면 나에게 한 질문들을 곱씹으며 상처 받았겠지만 오늘은 다른 생각에 내가 저 공간 안에 서 무슨 질문을 받았는 지 어떤 연기를 했는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는 8년 만에 만난 우리인 데 어떻게 나를 그렇게 쳐다볼 수 있었을까. 내가 왜 그의 눈을 필사적으로 피했을까. 나는 왜 그 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을까. 그러다 문득 두준이 떠올랐다. 그럼 날 바라보던 두준의 눈은 어땠지. 두준이 날 바라볼 때 나는 어땠지. 날 감싸던 묘한 설렘이 사라지고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애와 달랐나. 잘 모르겠다.
지금 당장 두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따뜻한 그의 목소리가.
-어.
“…..어 두준아. 나 이제 나왔어.”
-………
“역시 유명한 감독 작품이라 사람들 되게 많더라”
-………
“아 그리고 주연배우도 봤는데∙∙∙”
두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두준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너의 따뜻한 목소 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계속 나만 말할 뿐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생기는 공백이 오늘따라 내 숨을 조여온다. 답답해서 단추 두어 개를 풀어헤친 뒤 그래도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아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나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나가고자 했 다. 그러다가 나온 요섭에 대한 얘기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래 수고했어. 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
내가 다른 사람 얘기를 해서 화난 것인가, 내가 혹시나 말실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 어 쉴 틈 없이 말하던 입을 닫았을 때, 평소와 다름없는 무신경한 두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얘기를 듣지도 않은 것 같은 태도에 나는 못내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과한 욕심을 부린 적은 없다.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진작에 접었다. 그렇다고 뜻깊은 독립영화에 출연해서 평론가들에게 극찬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빛나고 싶다던 내 꿈은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계속 쌓아 올리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길 반복하다가 부숴져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저 너의 옆에 섰을 때 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와 나란히 가고 싶었다. 아, 이게 과한 욕심이었던 걸까.
언젠가 술을 잘 마시지 않던 두준이 취기를 빌려 나에게 연기를 그만두면 안되냐고, 내가 자꾸
상처받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두준은 내가 연기를 그만두기를 바랬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자꾸 떨어지는 모습에 질려버린 것 일까?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다지 어긋난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던 우 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사실은 나도 알아.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 나 때문에. 내가 너 무 못났기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인데. 나도 아는데. 그래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밉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는 생각에 이미 끊긴 전화를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다. 남을 원망하다가도 나를 혐오하게 되고, 나를 혐오하다가도 남을 원망하게 된다. 나를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갉아 먹히는 사람은 결국 나다. 구멍이 숭숭 뚫려 공허한 나 자신만 남게 된다.
분명 맑았었는데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건지 모를 빗줄기가 날 위로하듯이 내 얼굴을 훑고 땅
에 떨어진다.
“이기광!”
지금 내가 하는 생각들이, 내 실패를 당연하게 여기는 내가, 내가 실패하길 바라는 네가 날 비참 하게 만들어.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네가 원망스러워. 내 연기를 보는 그 애의 빛나는 눈빛 만 보지 않았다면, 그 애가 너와는 달리 날 사랑하는 사람 보듯이 보지만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거야. 지금 내 어깨를 붙잡은 사람이 그 애가 아니라 윤두준이었다면 이렇게까 지 눈물이 나오진 않았을 거야. 지금 내가 이렇게 비참한 건 다 너 때문이야.
비가 내 어깨를 감싸듯이 내린다. 내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차가운 비가. 결국 날 힘들게 하던 여 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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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을 본 후로 이주일이 흘렀다. 거의 살다시피 했던 윤두준의 집에 가지 않은 지도 이주일이 지났다.
꺼 놨기 때문에 하루 종일 변함 없이 까만 화면을 보이는 핸드폰을 바라보는 자신에 자조적인 웃
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뭘 원하고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이 조금 높아진 것도 같다. 가을비 내리던 처서가 지난 후, 낮은 여 전히 더웠지만 밤에는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춥다고 느낄 정도로 쌀쌀해졌다. 쌀쌀해진 밤공기가 살짝 열어 놓은 창 틈 사이로 넘어올 때면 그날의 양요섭이 생각난다. 차가운 비와 대비되게 내
어깨를 감싸주었던 따뜻하고 큰 손이 생각난다. 위로가 필요했던 나에게 위로를 전해준 그가 생 각난다. 그의 생각이 날수록 나는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내가 가야 할 길은 그곳이 아니니까.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커튼을 쳤다. 창밖에 소음도 들리지 않는 작은 공간 안에서 낡은 선풍기 가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고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공간에 서 나는 여름을 붙잡으며 다시 너에게 돌아갈 준비를 할 것이다.
쿵쿵쿵-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하던 공간을 깨는 소리에 나는 조금 놀라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지? 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은 없다. 설마 윤두준이 나를 찾아온 건가.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쿵쿵쿵- “∙∙ㄱ∙∙∙∙∙아”
한참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상대방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집 안으로 신호를 보낸다. 얼핏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두준인가? 긴가민가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열어볼까 싶으면서 도 마음 한 켠엔 문을 열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움이 일었다.
문고리를 잡고 고민을 한 지 몇 분이 흘렀다. 이제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멎었다. 갔나? 싶어서 문에 귀를 대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정적 이 어색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인데.
콩-콩-
“기광아”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다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은 힘이 빠진 듯 아까 보다 작게 콩콩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내가 문 앞에 있던 탓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두준이 아니었다. 밤마다 나를 찾아와 괴롭히던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문을 열었다.
“안녕”
양요섭이다. 머리카락과 옷에 물을 잔뜩 머금고 우리 집에 찾아온 양요섭. 문틈 새로 들어오는 차 가운 공기와 함께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너는 또 비와 함께 왔구나.
“나 추운데 들여보내주라”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으니 요섭이 들여보내 달라고 말한다. 다 젖어서 덜덜 떠는 주제에 웃으면 서 말하는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너네 집으로 꺼지라고 내쫓 아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문 앞을 막고 있던 몸을 비켜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입을 꾹 다물고 몸 을 비키는 나의 눈치를 보며 집 안에 완전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신발장에 서 있는 요섭을 보니 속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더 빨리 문을 열 걸 그랬다.
“야”
“어? 어 왜”
“바닥에 물 떨어지니까 씻어. 욕실은 저기.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은 문 앞에 놔둘 테니까”
짜증 내는 투로 말하는 나를 보고 요섭은 군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바로 물소리가 들린다. 보 통내가 두준의 집에 가는 편이라 누군가가 우리 집에 있는 것이 낯설었다. 일단 들여보내 주기는 했지만 다 씻고 나오면 바로 나가라고 할 생각이다. 옷가지를 다 챙기고 나니 그의 실없이 웃던 입꼬리가 추위에 떨렸던 것도 같아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던 선풍기의 전원을 끄고 난로를 꺼내왔 다. 추울까 봐 걱정된다기보다는 유명인이 우리 집에 왔다가 감기 걸려서 가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요섭을 기다리다 지쳐서 잠깐 잠들었는지 눈을 뜨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요섭이 보였다. 방금 나왔는지 뽀송뽀송한 모습을 보니 괜히 얄미워서 “뭘 봐 머리나 말려” 하고 짜증을 냈더니 웃으며 뒤돌아선다. 풉- 기분 좋아 보이는 동글동글한 뒷통수에 결국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들었겠지?
“밥 먹었어?”
머리를 말리다 갑자기 말을 거는 요섭에 본인 때문에 웃은 걸 들킨 줄 알고 놀라서 괜히 먹었으 면 어쩔 거냐며 화를 냈더니 “안 먹었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물론 안 먹은 건 맞지만.
“나 요리 잘하는데” “어쩌라고”
“나 혼자 산 지 십 년 다 되가” “아 뭐 잘나셨어요”
“주방 좀 써도 되지?”
쟤는 써도 된다는 말도 안 했는데 들어가서 냉장고부터 뒤진다. 그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요섭 때문에 나가라고 말할 타이밍도 놓쳤다. 옛날에도 저랬었나. 집 안에 라면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다. 짜고 자극적인 냄새가 나니 신기하게 도 입맛이 없어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 해도 괜찮았던 배가 고파진다. 그나저나 요리 잘한다 더니 라면이 뭐야.
“나 진짜 요리 잘한다?!”
“아 그러세요?”
“너네 집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끓인거야” “네네 그러시겠죠”
요섭도 라면을 끓인 게 민망했는지 변명하는 모습에 웃으며 앉은뱅이 식탁을 펼쳤다. 작은 애들 둘이서 먹기 딱 이네. 젓가락 가지러 주방에 들어가는데 겨우 라면 끓이면서 뜨겁다고 손을 털어 대는 요섭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니 진짜라며 웅얼거리길래 불쌍해서 믿어 주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라면을 먹었다. 대단히 요리 잘하는 사람이 끓인 라면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 냥 라면이었다. 뭐 대단히 요리 잘한다는 것도 사실 증명이 안 된 말이지만. 8년의 공백이 없었던 것처럼, 2주 전에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편안한 식사를 했다. 옛날 생각난다는 요섭의 말에 우리가 같이 라면 먹은 적이 있었나 하고 말장난을 칠 정도로.
배가 좀 부르고 나서야 요섭이 우리 집에 왜 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비를 다 맞은 상태로.
“왜 찾아왔어”
“글쎄. 왜 일 거 같아?”
“우산은 없었어?”
“있어. 근데 젖은 남자가 더 섹시하잖아.”
“허- 너 카가 작아서 젖어도 하나도 안 섹시해“ “그래도 들여보내 줬잖아?”
시중일관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계속 요섭과 대화하다가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서 이러다 그를 우리 집에서 재우기까지 할 것 같다. 이제 진짜 보내야 할 시간이다. 그가 몰고 온 가을도 함께.
“야” “어?”
너 이제 가라. 고작 이주 혼자 있었다고 외로웠는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서 말했다. 어렵게 꺼낸 말에 돌아온 싫어 라는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집주인이 가라고 했는데 싫다고 답이 나올 줄은 몰랐네. 머릿속으로 다시 요섭의 뻔뻔함의 정도 를 재정의하며 두 번째 가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었다. 다시 싫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똑같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항복을 선언한 것은 나였다.
“아니 그럼 뭐 여기서 나랑 같이 살겠다고?” “그거 좋은 생각이네.”
급격히 지쳐서 그냥 바닥 위에 드러누웠다. 얘가 진짜 왜 이럴까. 일찌감치 성공한 배우와 영화에 서 조연 하나 맡겠다고 오디션을 전전하는 배우 지망생. 둘이 있으면 당연히 내가 더 아쉬워야 하는 입장인데, 얘는 왜 자기가 아쉬운 사람처럼 가지 않을까.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나 만나는 사람 있어.” “……”
“그러니까 가라”
요섭은 대답이 없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말 없는 요섭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상처 받은 건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언제 봤다고 날.
“내가 너 그런 눈으로 보는 건 맞는데” “….”
“오늘은 꼭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물론 사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그냥 짐작만 했을 때랑 직접 귀로 들었을 때는 다르다. 갑 작스레 들어온 고백 아닌 고백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쟤는 왜 이런 데서도 뻔뻔한 거야. 한참 말 이 없길래 상처받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 니가 나온 연극 본 적 있어. ”
갑자기 무슨 소리지? 따라갈 수 없는 요섭의 대화 흐름에 당황스러워 얼굴에 몰렸던 열이 식어간 다. 내가 했던 연극이 한두개가 아니라 무슨 연극을 본 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과거이자 현재인 연극은 썩 달가운 주제는 아니다.
“90년대도 아니고 연극 같은 걸 왜 보나 했는데. 그 연극을 보고 나니까 왜 보는지 알겠더라” “조명 때문에 표정 몸짓. 뭐 하나 잘 보이는 것도 없고 무대 장치도 영화 세트보다 더 허술한데. 신기하게 배우들 하나만큼은 정말 빛나 보이더라”.
“특히 네가. 그래서 너랑 꼭 한 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어”
뭐 장황하게 얘기하긴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꺼낸 지도 잘 모르겠다. 대배우님이 날 좋게 봐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왜? 일 찍 성공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양요섭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대단히 연극을 사랑해서 도 영화를 싫어해서도 아닌 그저 나의 생계 때문에 연극을 했던 거다. 연극을 하면서 즐거웠을 때도 있지만 같이 연극하던 동기들이 하나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안 되 지 하며 좌절할 때가 더 많았다. 그니까 요섭이 저 때 나한테 반했던 실망했던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내 의견은 하나도 반영 안 된 감독님이 원한 결과야” “그게 무슨 소리∙∙”
“우리 영화 출연해줘” “뭐?”
“이주 전에 네가 오디션 본 그 영화 말이야. 감독님이 너 맘에 들어 하셨어”
뭐? 요섭이 거짓말을 하는 건가? 그가 아무리 뻔뻔하고 사람 당황시켜도 그런 거짓말을 칠 사람 은 아니다. 그럼 저게 사실이라는 건가. 비가 내리던 그 날 했던 내 연기가 어땠지? 제대로 기억 나는 것은 없어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는 명확하게 기억난다. 내가 왜? 여태까지 잘했든 못했든 모든 배역에서 떨어졌는데 갑자기 왜? 지금까지와 다른 것은 주연이 요섭이냐 아 니냐 하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시 요섭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을 수가 없겠지. 하, 그럼 내가 주연배우한테 로비라도 하고 있는건가.
“지금 표정이 잔뜩 오해하는 거 같아서 한 번 더 말하는데, 진짜 난 한마디도 안 했어”
“그럼 니가 지금 여기 왜 있는데. 감독이 니가 원한 애니까 직접 데리고 와라 이래서 온 거 아니
야?”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닌데 요섭 덕분에 배역을 따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화가 난다. 얘는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지.
“기광아. 우리 감독님 자존심 쎄기로 유명한 거 너도 알잖아. 감독님이 날 아무리 예뻐해도 나 거 기까지는 손 못 뻗는다. 그리고 감독님은 너랑 나 아는 사이인 줄도 몰라. 네가 연락 안 받아서 자존심 많이 상하셨어. 그래도 기다리신 거야 네가 맘에 드니까 다시 연락 줄때까지. 내일까지 연 락 안 오면 그 배역 자체를 없애 버리시겠대. 그거 듣고 내가 너 찾아온 거고”
빠르게 쏟아내는 요섭의 말에도 의심과 화를 완전히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달콤한 말을 덥석 물 어버리기엔 지난 몇 년이 너무 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사실 요섭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핸드폰을 켜서 연락 온 것만 확인해보면 감독이 진심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아직은 두 려워 망설이게 된다.
“왜 연락 안 받았냐고 묻지 않을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같이 하자”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요섭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흐르기 시작한 나의 시간이 더 가속화될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가져와 쥐고만 있는 나를 요섭이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내가 그 배역을 받아도 되는지 내가 잘 할 수 있는지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나는 연기하기 싫어서 핸드폰을 꺼 놨던 것은 아니다. 그렇 게 생각하니 지금 이거 하나 못 켜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눌렀다 충동적으로. 전원을 켜자마자 요란하게 울리는 알림 소리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가 열네 통, 문자가 다섯 통 와 있었다.
문자 다섯 통 중에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틀 전에 온 두준의 문자 두 통이 섞여 있었다.
-너 준비 되면 연락해.
-짐은 그때 가져가.
마치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하는 두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 또한 이런 날이 올 것이란걸 예견한 것처럼 두려워 한 것만큼 사무치게 슬프거나 배신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 저 허망할 뿐이었다.
아 끝났구나. 내가 했던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구나. 애초에 되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이었 구나.
무력감이 뱀이 옭아매듯이 나를 감쌌다. 나는 이 주 동안 다시 너를 보러 갈 준비가 아니라 너와 이별하는 준비를 했어야 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의 전부는 그인데 내가 그 없이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할 때 내 시야에 희고 커다란 손이 들어찼다.
“하자” “….”
“할거지?”
그리고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가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oo감독입니다. xx일 까지만 기다리겠습니다. 연락주세요.
그때 나는 느꼈다. 아 이게 너와 이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구나. 이 손을 잡지 않으면 나는 평 생을 너에게 얽매이고 너를 얽매면서 살겠구나. 그래서 잡았다. 요섭의 손을. 난 아직도 두렵고 네가 없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살아나갈게. 그리고 준비할게 두준아. 너의 앞에서 울지 않게 연습할게.
나는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