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일
10월 1일
띵동댕동-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다음 시간은 음악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대충 음악 교과서를 찾던 기광은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가 보이지 않자 황급히 가방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도 보이지 않는 교과서를 보며 기광은 그제야 어젯밤 되지도 않는 쪽지 시험 공부를 해보겠다고 교과서를 가지고 집에 갔던 것을 기억해냈다. 호기롭게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5분만’을 외치며 핸드폰을 만지다 그대로 잠이 든 것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기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교실을 나섰다.
1학년 1반은 기광이 있는 9반과는 달리 한 층 아래에 있었다. 1반 앞에 도착한 기광은 뒷문에 서서 눈으로 열심히 요섭을 찾았다. 왁자지껄한 교실 틈에서 요리조리 요섭을 찾던 기광은 교실 한 바퀴를 다 둘러보고 나서도 요섭이 보이지 않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구 찾아?”
그 순간 누군가 기광의 앞에 나타났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광은 처음 보는 남자가 기광의 앞에 서 있었다. 순간 훅 끼쳐오는 향긋한 냄새에 기광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향수 같지는 않았고, 섬유유연제 같은데. 단 한번도 맡아본 적 없는 기분 좋은 향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기광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남자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 찾냐구요.”
“아 요섭이. 근데 안 보이네.”
“양요섭? 앙요 아까 영어가 불러서 교무실 갔어. 방금 나가서 돌아오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고마워.”
말을 마친 기광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음악 교과서 좀 빌리려고”
“내가 빌려줄게. 잠시만.”
다소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기광이 몸을 돌려 대답했다. 그러자 기광의 앞에 있던 남자는 기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음악 교과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기광에게 건넨 교과서를 받아들며 기광은 작게 읊조렸다.
“고마워.”
그리고 뭐라 말을 덧붙일까 고민하던 순간 다시 수업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기광은 급하게 인사를 마치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왔다. 책상에 교과서를 올려놓은 기광은 교과서 오른쪽 하단에 단정하게 적혀있는 이름 글씨를 빤히 쳐다봤다. 이름도, 글씨체도, 외모도, 풍기던 향기도 모두 그 남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 *
“너 나 알지?”
3월 2일. 새로운 학년의 개학 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이제 더이상 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학생들은 개학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한 기광은 배정된 반으로 들어가 자리 배치표를 보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기광이 이제 막 짐을 풀고 의자에 앉았을 때, 기광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에 앉아있던 기광의 짝꿍이 대뜸 기광에게 물었다.
“너 나 몰라?”
누가 봐도 모른다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기광을 보며 짝꿍이 다시 한번 물었다.
“너 나 진짜 모르냐고오-.”
“너는, 날 알아?”
정말 모르겠다는 기광의 얼빠진 얼굴에 옆에 있던 남자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훅 끼쳐오는 낯설지만 익숙한 향기에 기광은 그제야 열심히 눈을 돌려 짝꿍이 달고 있는 명찰에 적혀있는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다. 윤두준. 향기만큼이나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익숙하기만 할 뿐, 두준과의 접점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을 해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두준의 시선이 곧이곧대로 느껴졌다. 괜히 민망해진 기광은 책상 옆에 잘 걸려 있는 가방만 고리에서 빼었다가 걸기를 반복했다.
“왜 내 시선 피해?”
“그러는 넌, 너는 왜 자꾸 쳐다보는데?”
“...”
정곡을 찔린 기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두준의 시선을 피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광은 고개를 돌려 두준을 바라봤다. 진지한 두준의 얼굴에 기광은 부러 장난스러운 말투로 사과를 하며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잔잔하게 걸려 있던 미소마저 지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두준의 모습에 뒤로 갈수록 기광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이제 잘 기억...”
“너 잘생겼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 기광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두준에게 향하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거두었다.
“친하게 지내보아요, 이기광씨.”
두준은 픽 웃음을 흘리며 기광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서 다 드러나는 기광을 보며 두준을 속으로 몇 번이고 웃음을 삼켜야 했다. 장난스럽게 건넨 자신의 말에 기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광의 답변까지 확인을 마친 후, 두준은 다시 샤프를 잡고 풀고 있던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기광의 시선이 느껴졌다. 두준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옆에서 느껴지는 기광의 시선을 무시하고자 노력했다.
* * *
두준과 기광은 빠르게 친해졌다. 생각보다 공유하는 관심사가 비슷한 것이 컸다고,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붙이자면 붙일 수 있었지만, 보다 정확한 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먼저 손을 내미는 윤두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윤두준의 행동들에는 다소 애매한 것들도 있어서, 기광의 짧은 18년 인생만 미루어놓고 보면 이게 과연 친구들끼리 하는 행동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았다. 가령 점심을 항상 같이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두준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는 꼭 함께 축구를 해야한다며 기광을 운동장까지 데리고 나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기광을 소개하곤 했다. 축구야 너무 좋지만, 누가 봐도 활발해 보이고 이미 친해 보이는 두준의 무리에 끼어 축구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기광이 점심시간 축구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두준에게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두준은 매우 속상해했었다. 그러자 두준은 기광에게 ‘그럼 너는 점심시간에 뭐하는데?’라고 질문하였는데, 돌아오는 기광의 대답이 ‘내 친구들이랑 축구하지’여서 두준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었다.
또, 학교가 끝나면 항상 집까지 같이 걸어가는 것이 두준과 기광의 일상이었다. 운이 좋게도 두준과 기광은 꽤나 가까운 거리에 살았는데, 학교를 기준으로 15분 거리에 두준의 집이, 두준의 집을 지나쳐 5분 정도를 더 걸어가면 기광의 집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두준은 들릴 곳이 있고, 기막힌 우연으로 가는 길에 기광의 집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하며 기광을 집까지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이야 의심 없이 수긍하던 기광이었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나니 괜히 간지러운 마음이 들어 두준에게 ‘매일 어디를 그렇게 들렀다 가는데?’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더랬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두준은 ‘어, 아니, 아니 그러니까’ 따위를 반복하며 말을 얼버무렸는데, 기광이 그런 두준을 빤히 쳐다보자 결국 두준은 ‘그냥 너 데려다주는 거야’라고 이실직고를 하기도 했다. 기광이 굳이 왜 자신을 데려다주는 거냐고 반문하려는 찰나, ‘내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야 이렇게’라고 선수를 치는 두준 때문에 기광은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때 기광이 그런 두준을 말리지 않았던 이유는 기광 역시 두준과 함께 더 걸어가는 그 5분이 너무 좋아서였다고 기억한다.
***
지각이다. 기광은 침대에 누워 눈을 뜨는 그 순간 자신이 늦잠을 잤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너무 밝은 하늘과, 평소보다 훨씬 개운하게 떠지는 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광이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재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방을 나서 거실을 지나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식탁에서 한가하게 아침밥을 다 먹어가는 이기연과 그 앞에서 기연에게 반찬을 올려주는 엄마를 보며 기광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엄마! 나도 깨워줬어야지!”
“얘가 지금 왜 엄한 데 짜증이야! 네 나이가 몇인데 스스로 일어나야지!”
“그러면서 엄마는 맨날 이기연만 챙겨주잖아! 아픈 게 뭐 대수야?!”
“이게 진짜, 이럴 시간에 씻기나 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닫혔다. 기광은 울컥울컥 치미는 속상함을 애써 삼키며 분주하게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아직 온수가 돌지 않아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가, 온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서러워졌다.
이기연. 기광의 연년생 동생이었다. 기광이 태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계획에 없이 들어선 아이였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집에서 산 시간이 반, 병원에서 산 시간이 반이었다. 그 탓에 한 살 많은 건강한 오빠라는 이유로 기광은 항상 기연의 뒤에 물러나 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따금 섭섭함이 몰려올 때가 있었다.
십 분 만에 준비를 마치고 나온 기광은, 이미 학교로 출발한 기연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지만, 기광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빠르게 거실을 지나쳐 걸었다.
“요즘 날씨 쌀쌀해! 겉옷 가져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기광은 일부러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나도 감기나 걸려서 아프지 뭐’ 하는 모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시간, 두준은 뒷문 한번 확인했다가 시계 한번 확인하고, 핸드폰을 확인해보길 반복하고 있었다. 항상 부지런히 학교에 오던 기광이 오늘은 왜인지 1교시 수업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연락해볼까 싶어 두준이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른 순간, 뒷문을 열고 기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꽤나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아침이었음에도, 기광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늦잠 잤어.”
두준이 바쁘게 숨을 고르며 수업 준비를 시작하는 기광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딘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이라 두준은 좀처럼 기광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딩동댕동-
점심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4교시 종소리가 울렸다. 두준은 책상 위에 있던 교과서를 야무지게 닫아 책상 서랍에 넣으며 기광에게 말했다.
“오늘 점심 스파게티래. 얼른 가자, 좀만 늦으면 줄 엄청 서는 거 알지?”
“아, 나 오늘은 배가 안 고파서. 얼른 가서 먹고 와.”
아침부터 기광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 두준이었지만, 돌아오는 차분한 기광의 대답에 두준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의미 없이 교과서 끝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는 기광을 보며, 두준이 고개를 살짝 숙여 기광과 시선을 맞추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과 느리게 깜빡이는 기광의 눈을 보며 두준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얼른 가서 먹고 와. 너 아까부터 배고프다며.”
두준의 시선에 기광이 고개를 돌려 두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싱긋 웃으며 말하는 기광을 보며 두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서는 두준의 모습을 끝으로, 기광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침에 엄마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온 이후,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연이 앞에서 아픈 게 대수냐고 소리 지른 것도 후회가 됐고, 미안하다는 의미로 먼저 겉옷을 챙겨주던 엄마의 손길을 못 이기는 척 받아주지 않은 것도 후회도 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건 섭섭한 거라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더 울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엎드렸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만 더 복잡해져 가는 찰나 누군가 기광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기광, 잠깐 일어나봐.”
윤두준이었다.
“이거라도 먹고 자. 아침도 안 먹었을 텐데.”
몸을 일으키자 보이는 건, 기광에게 크림빵과 우유를 건네고 있는 윤두준이었다. 기광이 아무런 움직임 없이 빵과 우유를 건네는 두준의 손만 바라보고 있자, 두준이 급하게 크림빵 비닐을 뜯어 기광의 손에 쥐여주었다.
“얼른 먹어.”
그 말이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기광은 홀린 듯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빵을 먹는데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 들어 기광이 부러 눈을 크게 뜨며 눈물을 말렸다.
“잘 먹네.”
그 말을 끝으로 두준은 기광에게 우유를 뜯어서 건네며, 기광이 빵을 다 먹는 동안 기광에게 말을 걸지도 기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빵을 다 먹고 난 이후, 기광은 다시 책상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준은 기광의 위로 자신의 카디건을 덮어주었다. 익숙한 두준의 내음이 풍기고, 곧 자신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위로를 건네는 두준의 모습에 기광은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둘, 점심을 먹고 윤두준을 보러오는 친구들이 두준에게 ‘오늘 점심 왜 안 먹었냐?’라고 물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기광은 자신 때문에 두준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러 온 친구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내 짝꿍 지금 자”라며 친구들을 조용히 시키는 두준을 보며 기광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
그 날 그 사건을 계기로 기광은 두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두준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을 상황임에도 기광은 괜히 두준에게 시답지 않은 장난을 치곤 하였다. 가령 조금만 더 고민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들을 굳이 두준에게 물어본다거나, 두준이 다음 수업을 스탠딩 책상에서 들으려고 자리를 이동하면 기광도 따라 일어나 굳이 한 시간 내내 두준 옆에 서서 수업을 듣는 다거나 하는 상황들이었다.
하루는 기광이 점심을 먹고 잠깐 화장실을 잠시 다녀온 이후 일어난 상황이었는데, 기광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두준의 옆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본 예쁜 연예인 이야기, 어제 있었던 축구 경기 이야기, 게임 이야기를 정신없이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두준은 간간이 친구들의 말에 호응하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괜히 그런 모습마저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 기광은 머쓱하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어, 윤두 짝꿍? 나 여기 잠시만 앉아도 되지?”
그리고 그런 기광을 보며, 두준의 친구 한 명이 당연하다는 듯 기광에게 물었다. 그리고 기광의 답은 처음부터 상관없다는 듯이, 기광에게서 시선을 거둔 남자는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뭐래, 네가 비켜. 여기 앉아야 하는데 못 앉고 있잖아.”
기광이 당황해 우물쭈물하자, 단호한 두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장난기 섞인 친절한 말투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묵직하게 느껴지는 단호함에 기광의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머쓱하게 기광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제 자리를 찾은 기광이 다음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를 꺼내 놓으며, 의식하지 않은 척 두준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 윤두준 너 이번 주말에 정민영 만나기로 함?”
“뭐?”
“방금 걔한테 카톡 왔는데?”
“아씨, 남의 카톡을 네가 왜 봐.”
처음으로 두준이 동조했음이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점심시간 두준의 반으로 놀러 온 A는 두준의 핸드폰에 깔려 있는 게임을 하고 싶다며 두준의 핸드폰을 빌려 갔다. 크게 사생활이라고 할 것이 없어 평소 핸드폰도 잠그지 않고 사용하기도 하거니와, 평소에도 자주 친구들에게 핸드폰을 빌려주곤 했었어서 이번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핸드폰을 넘겨주었는데. 두준이 A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 급하게 뺏어가며 황급히 문제의 카톡을 확인했다.
[선배, 우리 주말에 만나는 거 맞죠?]
하아, 두준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슬쩍 옆에 앉아있는 기광을 바라봤다. 동요 하나 없이 아까 그 자세 그대로 교과서와 유인물을 정리하고 있는 기광이 보였다.
“내가 본 게 아니고 그냥 게임하고 있는데 보인 거라고!”
“됐어, 이제 너 내 폰으로 게임하지 마.”
“그러게 핸드폰 좀 잠그지? 비번도 없이 다니니까 다 보이잖아!”
평소와 다른 두준의 반응에 민망해진 A는 괜히 툴툴거리며 두준의 눈치를 봤다. 두준 역시 방금 일어난 상황이 A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되지도 않은 투정을 부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두준은 민망한 마음에 황급히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근데 윤두준 정민영 왜 만나?”
“너 이번엔 정민영이랑 썸 타냐?”
“뭐야, 너네 몰랐어? 정민영 엄청 오랫동안 윤두준 좋아했을걸?”
“맞아, 작년 크리스마스에 고백도 하지 않았나? 아, 그건 정민영 아니고 백희진…”
“아 좀 조용히 좀 해라! 너네 그냥 반으로 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두준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따가 기광에게 이 상황을 뭐라고 해명할지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친구들의 철부지 같은 소리에 두준은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두준을 보며 친구들은 저마다 킥킥거리기 바빴다. ‘윤두준 또 부끄러워서 저런다’ 따위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두준은 아까부터 슬쩍슬쩍 곁눈질로 기광을 바라보았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미묘하게 굳어 보이는 기광의 표정에, 두준은 내심 기대를 하면서도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둘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친구들이 사라지고 나면 기광에게 말을 걸어보리라 다짐하고 있던 찰나,
“이기광!”
갑작스레 뒷문 밖에서 이기광을 부르는 양요섭의 등장에, 기광은 요섭에게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두준은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교실을 나서는 기광을 보며 손에 들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기광아 가자!”
마지막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일찌감치 가방을 다 챙긴 두준은 주인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기광이 가방을 다 챙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마지막 야자 시간까지 남아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답지 않게 조용한 학교가 낯설었다.
점심시간 이후로 냉랭해진 기광의 태도와 티가 나게 굳어있는 기광의 표정이 단단히 화가 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느낀 거지만 기광은 참으로 그 속내를 알기가 쉬운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어렵지 않게 기광의 표정을 통해 읽어낼 수가 있었다. 두준은 그런 기광이 참 좋았다. 솔직하고, 투명하고 가식 없는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 나 오늘은 혼자 갈게.”
“왜.”
“…”
“왜 혼자 가는데?”
“그냥.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말을 마친 기광은 미련 없이 두준을 지나쳐 교실을 나섰다. 두준 역시 지지 않고 기광의 옆에 따라붙었다. 두준이 옆으로 다가오자, 기광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데?”
“…”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너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바뀐 기광의 태도가, 현재 기광이 어떤 생각과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지만 두준은 부러 아무것도 모른 척 기광에게 질문했다. 감히 질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기광이 두준의 눈에는 너무나 귀여워 보였으므로.
“으앗,”
기광의 보폭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선 상태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던 기광이 순간 발을 헛디뎌, 계단 위에 있던 기광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기광의 뒤에서 기광을 따라 내려가던 두준이 잽싸게 기광의 팔을 잡아 기광의 몸을 돌려세웠다. 순간적인 힘으로 인해 기광과 두준의 얼굴이 불과 3cm 안으로 가깝게 붙었다.
“조심해.”
갑자기 고꾸라지려는 기광에 적잖이 놀란 두준의 얼굴에 미세하게 굳어있었다. 기광의 팔목을 잡고 있는 두준의 손에는 여전히 힘이 강하게 실려 있었다. 조심하라는 두준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덕분에. 고마워.”
“너 지금 얼굴 엄청 빨게.”
장난기 서린 두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두준에게 속내를 다 들키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당에, 괜히 센척하며 계단을 내려가다 휘청거린 것도 부끄러웠다. 더군다나 이렇게 두준과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 대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얼굴로 피가 몰리다 못해 눈마저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가까우니까 그렇지.”
“그래서 싫어?”
두준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얄궂게 물었다. 기광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두준은 안 그래도 가까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정민영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주말에도 안 만날 거야.”
“뭐?”
“정민영이랑 안 만날 거니까 화내지 말라고.”
“왜 안 만나는데?”
“네가 싫어하니까.”
마지막 말을 마친 두준이 한 걸음 더 가까이 기광의 앞에 다가왔다. 순간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면서 두준과 기광의 아랫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아랫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이 소름 끼칠 만큼 행복했다. 기광은 고개를 살짝 들어 두준의 눈을 바라봤다.
“얼른 가자. 늦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을까, 두준은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이제껏 잡고 있던 기광의 손목을 놓아준 두준은 기광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자각하지 못하고 세게 잡고 있던 기광의 손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목 아팠겠다. 미안, 말하지.”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준과 기광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불어보는 바람에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떨어져 낙엽이 되는 소리만이 그들 사이의 공백을 메워줄 뿐이었다. 바람과 함께 살짝씩 부딪히는 서로의 손끝이 자꾸만 마음을 간질이는 그런 금요일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기광은 어딘가 부산스러워 보이는 거실의 기척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자 정신없이 구급상자를 뒤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기연이 아픈 모양이었다.
“아이고, 해열제가 없네. 기광아 약국 가서, 아니다. 엄마가 다녀올게.”
그날 엄마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던 이후,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유야무야 넘어간 그 날을 엄마는 아직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광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다 말고, 기광의 엄마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냐. 내가 갔다 올게.”
하지만 그 날 일이 마음에 남아있는 건 기광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기광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겨울을 준비하는 듯, 쌀쌀한 아침 바람에 기광은 절로 몸을 움츠렸다.
약국에서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잉-하고 기광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 자리에 멈춰 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두준으로부터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두준의 집 근처임이 떠올랐다. 두준이 보낸 건 아파트 베란다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 이 길을 지나가는 자신을 찍은 것 같았다. 순간 또 한 번의 진동과 함께 두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너 보여.]
문자를 확인한 기광이 아파트 위를 올려다보며 두준을 찾기 위해 애썼다.
[사진 찍어줄게. 브이해봐ㅋㅋㅋ]
두준의 문자에 피식 웃음을 흘린 기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두준을 향해 손으로 브이를 해보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에 든 것이 아픈 기연의 약임을 생각하고 기광은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예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확인하자, 언제 온 것인지 조금 전 자신을 찍은 사진과 함께 두준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약 사서 가던 길이라 먼저 왔어]
[어디 아파?]
[나 말고 내 동생이]
[좋은 오빠네]
[별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탄 기광은 집에 도착해 식탁 위에 약을 올려놓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풀썩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기광이, 아까 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두준의 사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서 찍어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두준이 처음으로 찍어준 자신의 사진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기광을 설레게 했다. 거기 내가 지나가는 건 어떻게 알았담. 기광의 머릿속이 두준의 생각으로 가득한 찰나, 또 한 번의 진동과 함께 두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깐 만날 수 있어?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지금?]
[응. 뭐 지금 안되면 너 시간 될 때 언제든 좋아.]
[지금 보자.]
[지금 바로 나갈게.]
[나도.]
문자를 끝으로 기광은 다시 집 밖을 나와 천천히 두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기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두준이 보였다. 그런 두준에게 손을 흔들어준 기광은 눈앞에 보이는 나무 벤치로 걸어갔다. 기광이 의자 위에 떨어져 있던 낙엽을 다 치울 때 즈음, 가볍게 뛰어온 두준이 타이밍 좋게 도착해 있었다.
“왜 불렀어?”
나지막한 기광의 물음에 두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기광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두준의 핸드폰을 받아든 기광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두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 이제 핸드폰에 비밀번호 생겼어.”
“뭐?”
“괜히 오해 생기는 거 싫어서, 폰 잠갔다고.”
두준의 말을 들은 기광이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자, 곧 비밀번호를 해제해야 함을 알리는 창이 기광을 반겼다.
“근데 비밀번호 뭔지 맞춰볼래?”
“그걸 내가 어떻게 맞춰.”
두준의 말에 기광이 푸흐-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두준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이야.”
두준의 말에 자신 있게 0302, 개학일을 누르려던 기광을 두준의 목소리가 막아섰다.
“근데 우리 올해 처음 만난 거 아니야. 작년에 우리 만난 적 있었어.”
“작년에? 우리가 만났다고?”
두준의 말을 듣고, 기광은 문득 개학 날 두준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너 나 알지?’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 그 날 이후로 두준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아 기광은 새까맣게 잊고 있던 두준과 기광의 첫 만남은,
“음악 교과서, 왜 양요섭한테 줬어?”
“….”
“네가 교과서 돌려주러 오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 교과서 양요섭이 대신 전달해주던데.”
“아!”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기광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조용한 아파트 단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기광은 곧 그 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음악 교과서를 돌려주러 가려는 찰나.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요섭이 기광의 손에 들려 있는 두준의 책을 보고 대신 전달해주겠다며 가져갔었더라고.
“너 그날이 언제인지를 기억해? 어떻게, 아니, 왜 기억해?”
“그때부터 좋아했으니까.”
빠르게 뛰는 심장과 함께 벅차오르는 가슴이 기광의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기광의 얼이 반쯤 나가 있을 때, 훅 하고 끼쳐오는 두준의 내음과 함께 두준의 입술이 기광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두준과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기광의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날, 일 년 전 오늘이야.”
“….”
“그래서 어제도 키스하고 싶은 거 참았어.”
기광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오늘은, 해도 돼?”
두준의 말에 기광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하지만 아직은 뜨거운 가을. 10월 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