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당신에게 봄을 선물합니다

아아, 아윽. 기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어젯밤 갑자기 영감이 마구 떠오르는 바람에 새벽 내내 밤을 새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을 잔 것이 화근이었다. 책상 위로 불편하게 뻗었던 팔부터 어깨, 어설프게 의자 위에 꼬고 앉았던 다리까지 온몸이 결려왔다. 삐거덕거리는 근육을 느끼며 기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전자파를 그대로 받으며 잠을 자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두 눈 밑이 더욱 뜨거웠다. 얼마 자지 못한 탓에 눈이 뻐근하기까지 했다. 기광은 감은 눈 위로 손을 올려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본다. 잠을 더 자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다지 잠이 오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기광이 대충 세수를 마치고 나온다. 요즘 많이 피곤하긴 했나보다. 실핏줄이 터져 살짝 빨개진 제 눈을 보며 기광이 눈을 살짝 감았다 뜬다.

 

 

 

몇 개 없는 스킨로션을 얼굴에 대충 찍어 바른 기광이 부엌으로 들어가 어제 씻어놓은 텀블러에 물을 따른다.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들고, 츄리닝 주머니에 핸드폰과 이어폰을 챙겨 넣은 기광이 익숙하게 운동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선다.

 

운이 좋지 않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몸이 피곤해서 하루만 아침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지하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지지하게 고민하던 기광은 손에 들고 있던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그 순간이었다. 경쾌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2301호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부터, 매일 닦는 것인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매일 아침 이 시간이면 마주치는 얼굴인데도,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인 자신이 괜히 초라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때 즈음, 익숙한 발소리와 함께 더 익숙한 향수 냄새가 기광의 코끝을 찔렀다.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실려 온 듯한 은은한 머스크향이었다. 봄이나 여름에 써야할 것 같은 가볍고 달달한 향이었지만, 이 남자는 4계절 내내 이 향수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겨울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던 향수 냄새가, 이제야 좀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오늘도 운동가시나 봐요?”

 

어느덧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활짝 웃으며 간단히 눈인사를 했다. 기광 역시 그런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곧 활짝 열리는 문을 가리키며 기광이 요섭에게 말했다.

 

“먼저 타세요.”

“감사합니다.”

 

그 짧은 몇 마디가 끝이었다. 얼마 걸리지는 않지만, 아무 말이 오고 가지 않는 어색한 둘에게는 꽤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기광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이어폰과 핸드폰을 꺼냈다.

 

“내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하느라 정신을 팔고 있던 기광을 향해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제야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확인한 기광이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기광이 내리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남자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유유히 지하로 내려갔다. 꽉 묶여있는 신발끈을 확인한 기광이 가볍게 발목을 돌리고는 근처 공원으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어느덧 푸릇푸릇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벌써 봄이 오는 모양이었다. 기광이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길을 걸어가는 사이, 기광의 옆에 검은 세단 하나가 스윽 지나갔다.

 

 

 

**

 

 

 

항상 주차하는 곳에서 차를 찾은 요섭이 능숙하게 운전을 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공원 앞 큰길을 지나가던 요섭의 눈에 익숙한 옆모습이 들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힐끔 남자를 쳐다본 요섭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2302호. 제 옆집에 사는 남자였다.

 

7시 30분, 오피스텔 23층 엘리베이터 앞. 회사로 출근하는 요섭이 매일 같이 옆집 남자를 만나는 시간과 장소였다. 아침 운동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착장은 언제나 저 츄리닝이었다. 2년 넘게 이 오피스텔에 살면서, 옆집 남자를 마주친 매 순간 그는 저 츄리닝 차림이었다.

 

공원으로 뛰어가는 옆집 남자의 모습이 요섭의 시선에서 사라질 때 즈음, 요섭도 남자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는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항상 똑같은 목소리의 라디오 DJ가 오늘도 어김없이 청취자의 사연을 읽고 있었다.

 

“봄은 그냥 오지 않아. 계속 노력해야 해. 자주 그리워 해주고, 만나면 반가워 해주고. 그리고 자주 불러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잔잔한 뉴에이지 피아노 곡이 배경에 깔리더니, 곧 라디오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귀를 읊어주었어다.

 

“요즘 뜨고 있는 작가죠. 이기광 작가의 ‘당신에게 봄을 선물합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들은 그냥 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봄이 오지 않을까요? 아픈 가정사로 봄을 싫어하던 책의 주인공 ‘봄’이가 결국 봄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말이에요.”

 

흡입력 있는 구절에 숨을 죽이고 라디오를 경청하던 요섭이, 방금 전 DJ의 입에서 흘러나온 구절을 조용히 곱씹었다. 봄은 그냥 오지 않아. 봄은 그냥 오지 않아.

 

 

 

 

 

 

**

 

 

 

 

 

점심시간, 친한 직장 동료들과 밥을 먹고 나온 요섭이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나왔다. 건물들로 빼곡한 서울 한복판을 동료들과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느덧 회사 앞으로 도착한 요섭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앞선 회의가 일찍 끝나도 너무 일찍 끝난 탓이었다. 얼른 회사로 돌아가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겠다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동료들과 동행하려던 요섭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뭐 놓고 왔어?”

“아, 너 먼저 들어가라. 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갈게.”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요섭의 행동에 동기 한 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동기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듯 살짝 웃어 보인 요섭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뭐든지 생각난 김에 해야 한다고,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언급했던 책을 사러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입사하고 나서 업무가 바빠 당최 책을 손에 잡은 적이 없던 요섭이었다. 그래도 나름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요섭은 근처에 있는 서점을 떠올리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당신에게 봄을 선물합니다. 요섭이 속으로 책의 제목을 되뇌었다.

 

 

“혹시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소설 코너로 들어온 요섭이 부지런히 눈을 돌리며 책을 찾았다. 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 책에 검색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직원 한 명이 요섭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

 

“‘당신에게 봄을 선물합니다’ 라는 책인데 혹시 있을까요?”

“잠시만요.”

 

요섭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며 인사를 하고 사라진 직원은 정말 금세 돌아왔다. 의미 없이 눈앞에 있는 책들을 살살 넘겨보던 요섭이, 직원이 건네는 책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요즘 뜨고 있는 작가라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책 표지 위에 여러 문학상 배지가 붙어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요섭도 알만한 유명인들이 책에 대해 보낸 호평이 가득했다.

 

 

계산을 하는 카운터에는 사람이 많았다. 가장 줄이 짧은 곳을 찾아 선 요섭이 차례를 기다리며 꼼꼼히 책을 살펴보았다. 하늘색 표지가 책 제목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앞으로 4명이나 남은 줄을 바라본 요섭이 조심스럽게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에 대한 소개가 가장 먼저 요섭을 반겼다. 이기광이라는 큰 글씨 위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의 사진이 보였다.

 

“어…”

 

사진을 확인한 요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아침에도 만났던,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만날 옆집 남자였다. 남들 출근할 시간에 운동을 하러 가는 것으로 보아 프리랜서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작가일 줄이야. 그것도 한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명한 작가.

 

사진 속 기광은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품이 넓은 맨투맨에 핏이 딱 떨어지는 청바지. 지금보다 묘하게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아마 꽤 오래전에 찍은 사진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다음 손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넋을 놓고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요섭을 멈춘 건 직원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뗀 요섭이 서둘러 카드를 내밀며 책을 계산하고 서점을 나섰다. 얼굴만 알았지 이름도 직업도 모르던 옆집 남자는, 이기광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작가였다.

 

 

 

 

 

**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기광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간 기광이 수도 손잡이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당겼다. 금세 샤워기 헤드에서는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오한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금세 차가운 온도에 익숙해진 기광이 가만히 물을 맞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의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소설은 유난히도 글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기광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 열심히 써 내려간 부분을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분명 어젯밤에는 좋다고 글을 적었는데, 다시 보니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한숨이 우러나왔다.

 

“잠깐 쉬어야 하나…”

 

답답한 마음에 평소 같았으면 속으로만 생각했을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담담하고 차분하지만, 그 누구보다 진솔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묘사한다는 것. 이것이 기광의 작품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는 이유였다. 크게 굴곡이 없는 스토리 전개이지만, 등장인물의 소소한 시련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으로 유명했다. 그 정도로 기광은 감정이입의 대가였다.

 

“와… 진짜 대박이다 이거.”

 

책을 읽던 요섭이 큰 눈을 깜빡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어. 감정이입의 대가니 뭐니, 지금까지 기광에 대한 평론들을 모두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해졌다. 기광의 소설에 관해 내린 평가들은 뭐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대충 소설 분위기만 파악하겠다고 들춰보기 시작한 책은 어느새 절반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벌써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봄’이에 완벽히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요섭이였다.

 

“와, 나도 양요섭 너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요섭의 감동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광의 뒤통수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던 것이 문제였다. 화들짝 놀란 요섭이 재빨리 책을 덮고 주위를 살폈다. 그 앞에는 결제 판을 손에 들고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자신을 흘겨보는 팀장이 서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요섭이 눈에 띄게 눈치를 보며 대충 책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팀장도 혀를 끌끌 차며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팀장의 동선을 눈으로 훑던 요섭이 이내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 시작 전까지 열심히 만들고 있던 엑셀 파일이 화면 창에 떡하니 나타났다. ‘하, 봄이었으면 벌써 사표 냈을 텐데.’ 요섭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엑셀 파일로 가득 차 있는 요섭의 컴퓨터와는 달리, 기광의 모니터는 텅 비어있었다. 아, 시발. 좀처럼 욕을 쓰지 않는 기광의 입에서 거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기광은 목을 좌우로 한번 꺾은 후 지난밤을 지새워 작성했던 글들을 미련 없이 삭제해버렸다. 그리고는 컴퓨터의 휴지통까지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아무래도 슬럼프가 맞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기광이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어제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벌써 새벽 6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기광은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당분간 좀 쉬어야겠다고, 기광은 생각했다.

 

 

 

 

**

 

 

 

25분. 엘리베이터 앞에서 뻘쭘하게 서 있기를 벌써 25분째였다.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귀한 연차를 쓴 날이었지만, 요섭은 오늘도 어김없이 7시 30분에 23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할 일 없이 서성이는 중이었다. 쉬는 날 아침 댓바람부터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모든 건 바로 기광 때문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요섭은 기광을 보지 못했다.

 

매일 아침 배달오는 우유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집에 있는 건 분명한데, 항상 이 시간에 운동을 가던 기광이 일주일 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 며칠은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겼다. 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해도,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운동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래도 일주일 동안 문 열리는 소리 하나 못 들은 건 너무 심하지 않나.

 

오늘 아침은 내심 기광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요섭이었다. 그 생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문 앞에서 기광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마지막으로 5분만 더 기다리겠다는 마음으로 요섭은 엘리베이터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오늘도 안 나오면 생사 확인 차 초인종이라도 눌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기광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

“어!”

 

전자는 기광, 후자는 요섭이었다. 전자는 자신의 문 앞에 서 있는 요섭의 모습에 당황한 기광의 목소리였고, 후자는 오늘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기광을 만나 기쁜 요섭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젖어있는 머리에 편한 츄리닝 차림의 요섭을 처음 보고 놀란 기광의 목소리이자, 처음으로 격식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기광을 보고 놀란 요섭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오늘은 어디 가시나 봐요?”

“아, 오전에 미팅이 있어서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요섭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얼른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옷에 향해있는 요섭의 시선을 눈치챈 기광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출판사 미팅, 뭐 그런건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작가님이시잖아요. 꽤 유명한 작가님이시던데.”

“아, 감사합니다.”

 

너스레를 떠는 요섭의 말에 기광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기광의 인사를 끝으로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2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타세요.”

 

이번에는 요섭이 엘리베이터 문을 가리키며 기광에게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기광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 뒤로 요섭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기광은 반사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며 요섭에게 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하시나 봐요.”

“아, 오늘 그냥 쉬고 싶어서 연차 냈어요.”

 

요섭의 질문을 그대로 따라하는 기광을 말에 요섭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우리 옷이 바뀌었네요. 원래는 그쪽이 츄리닝, 제가 정장이었는데.”

“그런데 어디 가세요? 오늘 연차 내셨다면서요.”

 

기광의 질문에 재깍 대답하면 요섭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대뜸 당신을 기다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요섭조차도 자신이 30분 가까이 기광을 기다린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요섭의 머릿속이 복잡한 사이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결국 대답을 듣지 못한 기광이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 내리려는 그 순간, 요섭이 황급히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득 기광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경우에 없는 행동에 놀란 기광이 요섭을 바라보자, 요섭이 지하 1층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출판사까지 모셔다드리려고요.”

“네?”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면서요. 제가 한번 봄을 불러보려고요. 제가 자주 불러드릴 테니까, 천천히, 마음 열리면 오세요.”

 

요섭이 말을 마치자마자 지하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요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의 차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섭이 기광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익숙한 요섭의 향수 냄새가 기광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 향에 홀린 듯 요섭을 따라나선 기광이 픽 웃으며 생각했다. 요섭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2년 전 책을 구상하던 당시에, ‘봄’이라는 영감은 요섭의 향수 냄새에서 얻었다는 것을.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