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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가을을 타고

 

 

추석은 가을을 타고

 

w. 꽝아

 

양요섭X이기광


※소재 주의

 

 


어디서나 추석을 알리는 시끌벅적함이 가득했다. 몇 주 전부터 사람들은 성큼 다가온 명절에 대비하고 있었다. 역 앞의 광장에서 민속 노래를 틀고 공연을 하는 한편, 전광판이 달린 차에서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라는 기계적 음성과 함께 요즘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라며 윷놀이 하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또한 봉사 단체에서는 식혜 시음 행사를 하기도 했으며, 경복궁 근처에서는 한복을 입고 순회하며 사진을 찍거나 먹거리를 즐기며 추억을 남기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마트나 시장에서는 각종 명절 음식들과 반찬, 과일 등을 팔았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세일과 묶음 판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귀향 하는 일 없이 각자 가족들과 추석을 보낼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요즘은 옛날과는 다르게 음식을 직접 하는 일 없이 분위기만 내는 추세여서 음식들이 잘 팔렸다. 그래서 인지 시장에는 전에 없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요섭도 그런 추석을 보낼 군중 속 하나였다.

 

 


원래 귀찮아서 늘 하던 것처럼 온라인에서 사거나 반찬 몇 개 사서 대충 때울 요량이었지만 오랜만에 요섭은 장을 봐서 음식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홀로 명절을 보내는 것만큼 외로운 게 없어 판을 크게 할수록 씁쓸해져 작게 보낸 게 몇 년이었다. 올해 추석 연휴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지나가는 회사 동료의 말이 화근이었다. 이번 명절 계획을 주제로 하이톤으로 재잘거리며 휴게실을 울리는 사원들의 뒤로 구석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요섭에게 정원이 다가왔다.

 


“요섭 씨는 이번 명절 때 계획 없으세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아래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양정원. 요섭이 회사를 입사할 때 같이 들어왔던 신입 남자 동기였다. 처음부터 먼저 악수를 청하고 친근하게 다가오길래 잘 지낼 수 있나 싶었더니 틈만 나면 하소연에다 흔히 말하는 TMI,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모두 이야기 해 조금 성가신 타입이었다. 거기다 어떻게 하면 가는 길마다 그렇게 잘 마주치는지. 출근길 커피를 사러 가거나, 점심 먹으러 나갈 때도 겹쳐서 귀찮을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일부러 회사에서 조금 먼 곳까지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맞닥뜨린 뒤로 요섭은 정원을 피하길 포기했다. 그날은 심지어 배가 안 좋다며 둘러댔는데 애꿎은 요섭만 나쁜 사람이 됐었다.

 


"글쎄요, 딱히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가족들도 따로 안 만나세요?”

 

“하하,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

 


요섭은 대답하며 그와 수반된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럴까 봐 일부러 말을 짧게 한 건데 눈치 없는 정원에게 그저 요섭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결론 지었을 뿐이었다. 회사 동료와 굳이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은 요섭에게는 이럴 땐 그냥 대화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게 상책이었다. 이런 요섭의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정원은 무슨 말을 하려 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정원을 재촉했다. 왜요, 왜.

 


“그럼 저랑 캠핑 안 가실래요?”

 

 

 


“캠핑은 무슨 얼어 죽을.”

 


요섭은 욕을 하며 시장 어귀에 진열되어 있는 추석 선물용 박스 포장 된 황태 앞의 비닐에 낱개로 싸인 황태를 살폈다. 요리 하기도 간단하고 구이나 전, 국 등 할 수 있는 게 많아 인기 식품이었다. 추석 음식을 사려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제일 값싸고 눈에 띄는 DC 할인 마트에 모여 가지각색으로 명절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과일과 채소들이 매장 안에 수북하게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러니까, 조촐하게 보내려던 추석 계획이 커진 건 정원이 ‘캠핑’이라는 말을 꺼낸 탓에 공허함이 부풀려진 이유였다. 몇 년을 혼자 추석을 보내며 힘들게 삭힌 마음을 정원이 난도질 한 셈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람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니 기어코 선을 넘어버렸다. 첫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장을 보러 온 궁극적인 이유는 공허함이 섞인 원망보다는 기분 전환이었다. ‘캠핑’이라는 단어가 도리어 생각의 변화를 가져와 준 것이다.

 


“황태 얼마예요?”

 


제가 물으려던 걸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요섭이 오기 전에도 몇 명이 황태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와 구멍 숭숭 뚫린 장바구니는 그녀가 중년 여성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엄마도 저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 개 만 원.”

 

“에게- 이렇게 작은데?”

 

“다 그 정도 해요. 이것도 별로 작은 크기는 아니구먼.”

 

“하이고, 이 정도면 작은 거지-. 딱 봐도 사오천 할 양인디.”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때깔이면 평타 치는 거여-”

 

“됐고, 좀 깎아주쇼.”

 


그뒤로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시장 한복판에 한참 일어났다. 그 나이대가 말발이 세다는 건 엄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정말 어느 한쪽도 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니 괜히 민망해져 요섭은 슬그머니 황태를 내려놓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물가를 모른 채로 자신도 모르게 들뜬 마음이 대화를 듣고 나니 식어버린 이유도 있었다.

 


상 다리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많은 음식이 식탁 위에 있었다. 팔에 뜨거운 기름 튀겨가며 만든 동그랑땡과 동태전, 기름칠한 위장을 가라앉혀 줄이 없으면 섭섭한 시금치와 고사리나물, 그리고 메인 요리인 갈비찜과 소고기뭇국까지. 송편은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따로 샀다. 평소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었다. 요섭은 몇 입 먹다 얼마 못 가 젓가락을 내려놨다. 기껏 사와 열심히 만들어 놓고, 황태를 내려놓을 때부터 이어져 온 상념이 성대하게 추석을 보낼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정곡으로 찌르는 걸 모른 척 했을 뿐이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알았다. 명절에 들뜬 친구들의 추석 인사말, 단톡방의 여행 계획, 그리고 그것보다 한참 전에 온 미처 답장을 할 수 없었던 엄마의 카톡.

 

 

 


'이번 추석엔 올 거지?'

 

 


할머니 댁에 와서 좋은 건 여러 가지다. 가령, 도시에서 맡던 자동차 매연이 섞인 매캐한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것. 중국에서 넘어온 황사로 인해 노랗게 물든 하늘을 훨씬 적게 볼 수 있다는 것. 아침에 안개가 아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명절에 오면 그 모든 것과 함께 못 보던 친지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엄마를 볼 수 있다는 것.

 

 


시끄러운 소리와 정겨움이 어우러져 밖으로 새어나오는 익숙함을 맞으며 요섭은 돌벽에 기대 시골 내음을 들이쉬고 있었다. 음식을 하느라 열어둔 문을 통해 각종 전,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서는 엄마와 큰 엄마, 작은 엄마 셋이 투덕거리며 요리하고 계셨다. 지시하는 대장 큰 엄마, 익숙한 듯 묵묵히 따르는 엄마, 뭔가 마음에 안 들어 불평하는 작은 엄마. 그들의 남편 셋은 산을 타 송이버섯을 따러 갔다고 전해 들었다. 여기 올 때 가마솥 아래 화로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송이버섯과 같이 먹으면 맛이 일품이었다. 아침 일찍 도착해 요리하는 모습을 거들려 하니 엄마가 말렸다. 됐어-. 운전 했는데 쉬어. 요섭은 그게 명절에 얼굴을 안 비춘 자신이 친지들한테 둘러싸여 민망할까 봐 해준 배려라는 걸 알았다.

 


추석을 성대하게 보내자는 기분전환을 내포한 다짐은 정곡을 찔러 기어코 요섭을 여기까지 끌고 오고 말았다. 상황을 피하는 이에게 끝없이 회피 하지 말라는 자극을 주면, 그게 스트레스를 받아 되려 이왕이면 더 스트레스 받고 원인을 해결해버리자는 충동이 인다. 그래서 그날 밤 요섭은 엄마의 카톡을 읽고 새벽에 차를 끌고 출발했다. 갈게. 한 마디의 짤막한 뒤늦은 답장과 함께. 그러곤 도착하기 1시간 전쯤 8시 전화가 왔다. 웬일이야 아들-? 오랜만에 명절 때 아들 얼굴 보겠네.

 


아빠 따라 친가 가지 말고 나를 만나러 오면 안 되냐고 한 적 있었다. 물론, 정말 명절 때 엄마가 보고 싶어서 떼를 쓴 건 아니었다. 엄마는 친가 가면 미리 추석 전날 도착해 큰 엄마, 작은 엄마와 제사상을 차릴 음식을 했다. 남자들은 하는 거 없는데 엄마가 왜 굳이 가서 요리를 하는지, 왜 여자들만 꼭 요리를 하는지 불편했다. 저도 남자라 여자들이 차별 받을 때 알게 모르게 대우 받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애초에 여자가 요리하는 게 불편한 이유가 '엄마는 왜 저렇게 힘들게 살까' 에서 비롯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라서 받는 대우가 편했고 모른 척 할 때도 많아서 내가 이런 생각과 질문을 하는 게 모순 같았다. 엄마는 내 말을 다 알아들은 것처럼 늘 이렇게 말했다. 요섭아, 이게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야.

 


오랜만에 온 할머니 댁은 그동안 눈에 띄게 바뀌어있었다. 들어가는 입구 쪽에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앞의 바람을 막아주는 튼튼한 문, 창호지 문을 한 재래식 화장실에서 타일 바닥을 한 화장실, 어릴 때 자주 봤던 외양간은 소가 없어진 채 창고로 변했고, 염소가 있던 자리에는 덩그러니 호스가 달린 수도꼭지가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 주름은 예전보다 훨씬 패이셨고, 제대로 걷지 못 해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돌연 등짝을 세게 내리치시곤, '예끼 이눔아 왜 이제 오나!' 하며 반가움이 섞인 호통을 치셨다. 꽤 아팠지만 그 모습이 익숙하고 반가워서, 그리고 죄송스러워서 속으로 눈물만 삼켰다.

 


큰 엄마와 작은 엄마는 요섭을 보고 인사를 건네시더니 이어 회사는 잘 다니고 있냐, 결혼은 안 하냐 따위의 말씀을 하셨다. 보통 친지들을 만나면 대부분 하는 얘기여서 익숙했지만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 하하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몇 개 더 질문을 하시더니 금방 대화의 주체가 요섭에서 음식으로 바뀌었다. 엄마를 포함해 그들은 누렇게 뜬 늘어진 상의와 몸빼 바지를 입고 계셨다. 집 안에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차를 끌고 오면서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우동을 먹었지만 남은 길을 달렸더니 금세 배가 고파 전을 몇 개 집어먹었다. 배추전과 동태전, 동그랑땡과 산적까지. 제가 집에서 만들어 놓고 못 먹은 전을 마음껏 먹었다. 냉장고에 있을 전이 생각나긴 했지만 모른 척 했다. 그러다 생각보다 많이 먹어 할머니 집을 둘러싼 돌벽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가슴 께까지 올라오는 돌벽 너머로 서울 과는 다른 빨강, 파란색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기와집들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저녁을 먹고 날 무렵, 밤공기를 쐬러 요섭은 또 돌벽 앞에 섰다. 이곳은 기온이 낮아 밤이 되면 금방 쌀쌀해졌다. 오히려 찬 바람이 많이 먹어 더부룩한 배를 식혀줘서 마음에 들었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공기가 맑아 별이 보였다. 끝없이 하늘을 보며 고개를 쭉 빼면 저 멀리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한참 달을 보다가 고개를 내렸더니 가까운 곳에서 밝은 빛이 요섭의 얼굴을 비췄다. 빛은 요섭의 얼굴에서 돌벽으로 넘어가고, 이어 새로 설치한 할머니 댁의 문으로 옮겨졌다. 순식간에 어두운 밤에 형광등을 키듯 환해졌고, 주변이 빛을 따라 너울거렸다. 요섭의 동공이 차에서 내리는 인영과 빛에 겹쳐 일렁이고 있었다.

 

 

 


할머니 댁에 와서 좋은 건 여러 가지다. 가령, 도시에서 맡던 자동차 매연이 섞인 매캐한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것. 중국에서 넘어온 황사로 인해 노랗게 물든 하늘을 훨씬 적게 볼 수 있다는 것. 아침에 안개가 아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명절에 오면 그 모든 것과 함께 못 보던 친지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엄마를 볼 수 있다는 것.

 


나쁜 건 한 가지다.

 

"오랜만이다, 요섭아."

 

 

이기광을 보는 것.

 


기광까지 저녁을 먹고 난 밤 할머니 댁은 화기애애했다. 기광을 중심으로 친지들의 말은 끊기지 않고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추석 분위기와 걸맞게 시끄러운 분위기가 났다. 기광은 온통 둘러싸여 아까 요섭에게 했듯 질문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을 기광은 웃으며 다 답해줬다. 옛날부터 기광은 넉살이 좋았다. 설거지를 하던 큰 엄마가 할머니가 담가둔 식혜를 종지에 담아오며 가족들 사이에 끼고 계셨다. 그러게 제가 한다니까. 수고하셨어요, 형님. 엄마가 옆에 앉는 큰 엄마를 보며 속삭였다.

 


"근데, 수민이 엄마는 어쩌고 혼자 왔대요?"

 

 

이어지던 이야기가 멈추고 정적이 돌 쯤 작은 엄마가 물은 것이었다. 작은 엄마의 말에 다른 가족들도 궁금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들이 요섭은 다들 묻고 싶었지만 말을 못 꺼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마저도 못 꺼낸 거니까. 기광은 결혼을 했다. 직접 가진 못 하고 엄마한테 들었다. 기광의 왼쪽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작은 엄마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솔직하고 거침없었다. 가족들은 작은 엄마의 의도치 않은 성격에 좋아진 적도, 나빠진 적도 있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한 번 이제 여기에 없는 고모부의 이혼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눈치가 없어 분위기를 못 읽고 넓은 오지랖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때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하하, 이번에 좀 바빠서 못 왔어요. 아, 맞다. 이거 전해주라고 했는데."

 


기광은 뒤에 있던 통을 내밀었다. 큰 엄마가 받아서 열어보니 부추전이 있었다. 때깔 좋은 전이 앙증맞게 잘려 통에 담겨 있었다. 그래도 성의는 보이자고 직접 요리하신 듯싶었다. 근데 저러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 댁에서 전은 자르면 복이 날아간다며 통째로 얹어 제사상에 올렸다. 어릴 때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를 많이 봐와서 확실히 기억했다. 요섭의 예상에 알맞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이고, 다 잘라놨네-"

 

"그르게, 보기는 좋은디."

 

"이러면 제사상에 못 올린다케요."

 


오랜만에 본 기광의 얼굴은 살이 좀 붙었다. 피부가 살짝 까매지고 인중에는 수염을 깎은 흔적이 있었다. 머리 숱은 살짝 줄었고, 운동을 하는지 체격이 단단해져 있었다. 차에서 내린 눈앞의 기광이 낯설어 요섭은 대꾸도 못하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선발을 신고 나와 맞이하는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이 상황이 어색해질 뻔했다. 차에서 내려 달려가는 수민을 할머니가 안았다. 우리 강아지, 잘 지냈나. 할무니, 보고 싶었어요- 수민의 웃음소리가 캄캄한 밤 넓게 울려 퍼졌다.

 


기광의 눈이 축 처지고 아무런 대꾸도 못할 때 의외로 바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건 바로 수민이였는데, 열린 통 안의 전을 보고 달려와 집어먹은 것이었다. 수민은 아직 7살이라 흘러가는 분위기를 읽기엔 나이가 어렸다. 철이 들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부추전에 대해 말을 얹을 동안 한 마디도 못하던 어른들이 눈치를 살피고 있을 적, 수민은 입에 문 부추전을 먹으며 웃었다. 마시써! 그러자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부추전의 평가가 달라진 것이었다.

 


"그려, 수민이가 맛있으면 됐다."

 

"그래- 자르면 뭐 어떻나. 맛만 좋으면 됐지."

 

"그리고 요즘 세상이 달라져서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읎어-"

 

 

언제 그랬냐는 듯 할머니 댁은 다시 하하 호호 활기가 넘쳐흘렀다. 기광의 축 처졌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게 생기를 찾았다. 수민은 기광에게 안겨 부추전이 묻은 입가가 닦아지고 있었다. 솜씨가 꽤 능숙한 것 보니 제법 아빠 티가 났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회의감을 일으켰다. 요섭은 문을 열고 나갔다.

 

 


열기를 차단한 문을 열고 나가 올려다본 하늘은 흐릿해져 달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요즘 날씨가 이상해 시골에도 종종 영향을 끼친다는 건 요섭은 몰랐을 테다. 아까 뜬 보름달은 선명해 참 예뻤는데, 그새 자취를 감췄다. 요섭은 급작스럽게 반응하는 마음을 어디다 떨쳐낼 지 몰랐다. 요섭은 자신을 위로할 줄 몰랐다. 할 수 있는 건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대 체온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왜 나와 있어?"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는 요섭을 동요시켰다. 바뀐 중저음의 목소리는 전보다 뚜렷해졌으며, 뼈대가 살아있고 믿음직했다. 예전의 기광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가볍고 청아해 꼭 새소리를 닮았었다. 그 목소리와 함께 요섭이 같이 소리를 내면 어우러진 목소리가 푸른 하늘 높이 날아가 솜사탕처럼 퍼졌다. 함께 있던 순간이 짜릿하고도 달콤해 요섭은 늘 기광과 함께 놀았다. 같은 또래가 둘밖에 없어서 서로 더 의지가 됐던 것이었다. 할머니 집 앞의 작은 언덕에 자주 올라가기도 했었는데, 주로 명절에 쓸 밤을 빠르게 주워 먹고 달아날 때 하던 짓이었다. 지금은 언덕 앞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줄이 걸린 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냥, 좀 시끄러워서."

 

"뭐가. 어른들이?"

 

"응. 질문하는 거 피곤하지 않았냐."

 

"어, 피곤했지."

 


마음이 시끄러운 걸 중의적 표현으로 감출 수 있었다. 상황이 맞아떨어져 이럴 수 있는 경우는 보통 얼마 없었다. 요섭은 이렇게 말 할 수 있게 한 어른들에 감사하며 안도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아까 수민이 한 솔직한 행동이 요섭의 습관적인 회피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어른들은 아이의 거울이라던데 되려 아이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물 밀듯 들어오는 생각은 빠르게 뇌 속에 범접해 머릿속 전체를 출렁였다. 파도가 덮쳤다.

 


"......미안."

 

"갑자기 뭐가?"

 

"...그때, 도망쳐서."

 

"......"

 

"진짜 미안해."

 


밤의 차가운 공기는 뜨거운 몸과 닿으면 체온이 가라앉는다. 뜨거운 몸이 차가운 밤공기와 닿으면 공기는 더워질 수 있다. 그만큼 요섭의 몸이 뜨겁다는 뜻이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회피했던 걸 터트리려니 어지간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꾹 눌러왔던 마음들이 밤공기와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후회하면서 되뇐 게 현실이 되었다. 상상이 현실이 됐다. 요섭의 눈에선 과거의 모습이 일렁였다.

 


"사과하지 마."

 

"......"

 

"그때도, 지금도 넌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밖에 안 하네."

 

 

 

 

 


어른들을 피해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갔던 언덕에 오르고 나서 요섭과 기광은 숨을 골랐다. 17살 여름, 한참 장난칠 나이였던 그들은 꼬마 때 한 장난을 한 번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반항해도 시골에 끌려올 수밖에 없던 둘은 마음이 잘 맞았다. 골려줄 생각은 빠르게 행동으로 옮겨졌다. 엄마와 고모는 옆에 깎아둔 밤을 둔 채 잠시 다른 음식을 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밤을 하나씩 손에 쥐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쫓아오지 못 하게 단숨에 저 멀리 가더니, 타박 주는 어른들에 메롱을 했다. 둘 다 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숨을 고르며 둘은 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둘이 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이 동네를 자랑하는 아주 크고 튼튼한 나무였다. 주변에 그 나무를 중심으로 다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었다. 몸에서 흐르는 땀을 차가운 그늘이 막아주고 있었다. 언덕을 이루는 나무가 요섭과 기광의 등 사이에 있었다. 숨을 다 고른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크- 통쾌하다. 우리 엄마랑 너네 엄마 표정 봤어? 장난 아니던데."

 

"당연하지. 그런 표정은 난생처음 본다. 아주 스트레스가 확 가네."

 

"다음에 또 하자. 진짜 재밌다."

 

"당연한 거 아니야?"

 


둘의 열기가 하늘로 솟아올라 구름이 솜사탕처럼 퍼졌다.

 


"있잖아, 너랑 같이면 너무 좋아."

 

"나도. 너랑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럼 앞으로도 함께 하는 거야, 약속해."

 

"응, 약속."

 


바람과 함께 솜사탕을 머금은 구름이 넘실댔다. 선선한 공기가 나무 아래 앉은 둘의 심장 고동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나무가 가려 뜨끈한 해는 어느 새 뒤편으로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기광의 몸은 요섭 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요섭은 눈을 감았다.

 


그런 뒤로 요섭은 기광을 마주칠 수 없었다. 17살은 반항기를 겪는 때여서 어쩌면 솔직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한 순간에 있었던 저지른 일은 17살이 감당하기엔 아직 어렸다. 완전히 철이 들기엔 이른 나이라는 뜻이다. 요섭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 두려워서 기광을 피해 다녔다. 급기야 할머니 댁도 가지 않으려 했고, 기광과 마주칠 수 있는 모든 가족 행사도 빠지려 온 몸으로 떼를 썼다. 엄마는 요섭을 잔뜩 혼내다가 포기하나 싶더니 기어코 요섭의 데리고 할머니 댁에 앉혔다. 정확히 2년 뒤 추석 때 다시 만난 것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둘은 말이 없었다. 기광은 답답했고, 요섭은 여전히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날, 둘은 저녁을 먹고 나와 한 나무 앞에 섰다. 언덕의 입구 쪽에 심겨 있는 나무였다. 차가운 밤공기는 둘 사이를 매섭게 갈라놓고 있었다.

 


"왜, 내가 사촌이라서?"

 

"......미안."

 

"사과하지 마."

 

"......"

 

"키스한 건 난데, 왜 네가 사과해."

 

 

 


그 후 요섭은 기광을 10여년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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