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짝사랑특별전형
“식물이 잎이나 열매 따위를 탈락시키는 생리적 현상은?”
“......가을?”
“요섭아.”
“응?”
“너 왜 이과 온 거야?”
“......그래서 답이 뭔데.”
“탈리현상. 너 이번 중간고사는 어쩌려고 그래. 진짜 집에서 쫓겨나는 거 아냐?”
“그럼 너네 집 가서 살지 뭐.”
“누가 받아준대? 쫓겨나기 전에 공부나 해.”
패기 넘치던 열일곱의 겨울, 양요섭은 종이 한 장으로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차라리 음대를 준비하겠다고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음대생이 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일반고라지만 어쨌든 그 양요섭이었으니까. 보컬이면 보컬, 기타면 기타, 심지어는 작곡까지 맡아 하는 요섭은 망해가는 밴드부의 유일한 희망이요,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밴드부답게 약간의 똘끼도 갖췄다는 점에 이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그 똘끼가 이런 식으로 발산될 줄은 누구도 몰랐지만 말이다.
가정의 달 기념 백일장 금상(1위)
기악경연대회 금상(1위)
교과우수상(국어)
독서기록장 우수상 동상(3위)
예술경진대회(가창부문) 금상(1위)
영어프레젠테이션대회 은상(2위)
“국어, 영어 성적 괜찮고 수상 실적도 문과로 맞춰 놨으면서 왜 갑자기 이과로 가려고 해? 너 때문에 요즘 온 교무실이 난리야, 문과 유망주 이과에 뺏기겠다고. 다른 것보다 수학은 어쩌려고 이과를 가겠대? 교사 생활 하면서 이 성적으로 이과 갔다가 고3 돼서 울며불며 전과한 애만 몇을 봤는데...수학 선생님들은 너 이과 가겠다고 하니까 아주 질색팔색들을 하시더라. 뭘 믿고 이과 선택했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사탐이 안 맞는 것 같아서 차라리 과탐으로 돌리려고요. 수학은 공부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내가 그렇게 탐구과목으로 문이과 고르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기어이 쌤 속을 뒤집어 놓는구나. 그리고 뭐? 공부하면 어떻게든 돼? 일년내내 수학 시간에 내리 주무셔서 2반 선생님은 이번 주에서야 네 얼굴을 보셨댄다. 그래놓고 이과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겠다고?”
담임 선생님부터 시작해 줄줄이 이어진 교무실 선생님들과의 상담을 빙자한 훈계와 설득에도 요섭은 끝내 이과라는 선택을 지켜냈다. 출석부에 맞은 등이 얼얼했지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친구 따라 강남도 아니고 이과를 간다니 누가 들으면 정신 좀 차리라고 할 만한 발상이었다. 친구가 아니라 짝사랑이라고 한다면 정말 미친놈 취급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이기광만 바라보고 이과를 선택한 건 제가 봐도 미친 짓이기는 했다. 아무리 이과가 적다지만 무조건 이기광이랑 같은 반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수학은 중학생 이후로는 수업 시간에 깨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과학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과탐으로 돌리기는 개뿔, 열일곱 평생에 과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과에 가겠다고 난리를 친 건 순전히 이기광 탓이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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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섭은 음악이 좋았다. 그래서 밴드도 좋았다. 망해가는 밴드부의 유일한 신입 부원으로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쓰고 그렇게 만든 노래를 부르며 다른 악기들과 합을 맞춰 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음악보다 더 좋은 게 생겼다. 수업 시간에 이어폰으로 몰래 듣는 락보다 교과서를 읽는 그 목소리가 좋았고 학교에 남아 악기 연습을 하는 것보다 이기광과 함께 하교하는 게 좋아졌다. 단어를 읽고 문장을 읽는 음절 하나하나의 울림이 좋아서 교과서를 읽을 일이 많은 국어와 영어 시간에는 이어폰을 빼고 깨어 있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지금의 감정을 음악으로 남기고 싶어져서 공부하는 척 가사를 끄적였다. 가장 아름답고 반짝이는 말들만을 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아는 단어가 부족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백날천날 들은 게 사랑노래였어서 그런지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섭아, 그래서 축제날 오전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응. 밴드부는 저녁 공연이니까.”
“그럼 오전에 우리 부스 구경하러 올래?”
이기광의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무조건반사였다. 어떤 생각이나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은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뱉어져 나왔다. 사랑에 빠진 이에게 무슨 선택지가 있겠는가. 어떤 제안을 받더라도 답은 항상 긍정문으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무슨 부스인지 물어나 볼 걸-하는 생각이 스치는 건 기광과 작별 인사를 한 후의 일이었다. 이상하게 기광의 옆에만 가면 어쩐지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기광의 얼굴을 보느라 넋을 반쯤 빼놓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초적인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때때로는 지금처럼 생각 자체가 마비되는 듯했다. 가장 바보 같은 건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놓고도 어느새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이었다. 요섭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끌어안고 침대에 앉아 기타를 잡았다. 떠오르는 대로 코드 몇 개를 잡아보다가 간질거리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이내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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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굳은살이 생긴다. 한창 연습을 하다 손가락을 바라보면 손끝이 붉게 물들어 살짝 아릿한 감각이 온종일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그러다가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하면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순리였다. 연습을 오래 쉬면 기껏 만들어둔 굳은살이 사라진다지만 요섭은 아직까지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마음에도 굳은살이 배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짝사랑하는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기질 않는 건지, 연습이 부족한 건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짝사랑은 여전히 아리기만 했다.
“선배! 이것 좀 먹고 해요. 선배 아무것도 안 먹고 일만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옆 부스에서 사 왔어요.”
“어? 응, 그래. 이것만 다 하고 먹을게. 고마워! 다른 동아리 구경은 좀 했어?”
이런 대화나,
“저기...죄송한데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다른 학교에서 축제 놀러 온 건데 너무 잘생기셔서요...”
이런 상황들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 마냥 설레고 행복할 수만은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기광의 햇살 같은 따스함이 좋았다. 그런데 이기광은 정말 햇살 같아서 모두에게 따뜻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내게도 따스한 것이 내가 특별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저 인생의 엑스트라에게도 당연한 호의에 불과할까봐 늘 두려웠다. 이 감정을 질투라고 이름 짓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요섭은 짝사랑을 연습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마음에 굳은살이 배겨 이 아릿함이 무뎌질 수 있도록.
“요섭아, 너도 향수 만들어 볼래? 지금 하면 사람 없어서 제대로 만들어 볼 수 있겠다. 내가 설명해 줄게.”
저 해맑은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도 해가 뜬 것처럼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인류가 몇 세기 동안 써 내려간 소설이며 시를 수없이 읽어 보아도 이 감정을 나타낼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렸던 심장이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카페인 원액을 들이부은 것처럼 두근대는 걸 보니 역시 이기광 옆에서는 멍청해지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지금 뿌린 것도 오늘 만든 향수야? 향 좋다.”
“응? 나는 향 섞일까봐 향수 안 뿌렸는데...아! 섬유유연제 향인가 보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얼굴로 열이 몰려 뜨끈뜨끈 해지는 것이 제게도 느껴졌으니 말이다. 정작 기광은 별말이 없었음에도 괜히 너무 변태 같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요섭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니면서 좋은 향이 나는 기광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섬유유연제도 꼭 본인 같은 향을 쓸까. 은은하게 코끝을 맴도는 라일락 향이 달콤했다.
“무슨 향으로 만들고 싶어? 여기 있는 것 중에 메인으로 쓰고 싶은 향 골라 봐.”
“어...라일락?”
“라일락이면...자스민이랑도 괜찮고, 아니면 이 라인에 있는 것 중에 취향대로 넣어도 되겠다. 메인 향 빼고 두세 개 정도 더 넣는 게 제일 괜찮더라. 다른 향에 라일락 향 안 묻히게 양 조절 잘 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최대한 이기광의 향을 모방하기 위해 애썼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가며 향을 조합한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조잡한 키트로 어설프게 만든 것 치고는 제법 괜찮은, 이기광을 닮은 향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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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가을에 하는 것이 학사일정에서의 진리였다. 그리고 양요섭은 이 진리에 불만이 아주 많았다. 첫째, 가을밤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물론 조명이야 있다지만 관중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공연을 진행하는 건 요섭의 취향이 아니었다. 둘째, 가을은 너무 건조하다. 세상에서 이기광 다음으로 아끼는 게 본인 목인 요섭에게 가을 공연은 가혹한 처사였다. 물 먹는 하마가 된 것 같다고 불평을 하려다가도 불평하는 데 목을 쓰는 것조차 아까워 이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것이 요섭이었다. 그런 양요섭조차도 가을이 축제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말이다.
부스들이 문을 닫고 다른 모든 공연 동아리가 무대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사회자의 입에서 밴드부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기타와 마이크를 잡은 이래 이렇게까지 긴장한 공연도 처음인 듯했다. 진행도 제대로 안 듣고 애꿎은 기타 피크만 닳을 정도로 매만지고 있으니 학생회 스텝이 무대로 나가보라는 눈짓을 한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에 맞추어 무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뺨을 스치는 가을바람을 따라 계절에 맞지 않는 라일락 향이 번졌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뿌려둔 향수일 터였다. 축제의 절정, 열여덟의 가을, 청춘. 이런 말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양요섭에게는 그저 관중 사이에 이기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공연이었으니.
적막을 가르고 베이스가 첫 음을 울렸다. 바닥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이 베이스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몸은 본능처럼 코드를 잡고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코드를 제대로 잡았는지, 음정이 정확한지, 시선 처리는 잘하고 있는지. 연습의 거의 전부였던 것들은 이미 의식의 저편으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 신경 쓸 사항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요섭은 오히려 연습 때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딴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요섭이 첫 번째로 한 생각은 가을 공연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가을밤이 어두워도 이기광이 눈에 보인다면 그 외에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수많은 인파 속 이기광을 발견한 순간 쿵쿵 울리는 드럼 소리에 잠시 파트를 놓칠 뻔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쿵쿵대는 건 드럼이 아니라 심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양요섭은 그 순간 세상에서 한 사람만 컬러로 보인다든지 내 눈에는 너밖에 안 보인다는 등의 진부한 표현들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정하자면 요섭의 눈에는 두 사람이 보이기는 했다. 기광이 동아리 후배에게 몸을 붙여 귓속말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배가 아까 기광이 걱정된다며 음식을 사 왔던 학생인 것까지 알아차리고 나니 조금 전까지 잘만 뛰던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요섭의 감정과는 별개로 공연은 작은 굴곡조차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요섭 외에 다른 부원 모두가 반대했던 마지막 선곡까지도 큰 호응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고등학교 밴드부의 축제 선곡은 항상 그 해의 최신곡 중에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데 양요섭은 뜬금없이 지난해 노래도 아닌 몇십 년 전 노래를 들고 와서는 축제 때 무조건 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요섭이 동아리 탈퇴 선언까지 해가며 선곡 목록에 넣었던 노래가 실은 기광이 좋아하는 노래라는 걸 아는 밴드부원이 없다는 사실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 다행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섭은 마지막에 박수와 함성을 보내는 기광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형, 저희 오늘 공연 좀 잘한 것 같지 않아요? 다른 학교에까지 소문 난 것 같던데.”
“그래, 오늘 진짜 드럼 부서져라 치더라. 중간에 놀라서 파트 놓칠 뻔했어.”
“에이, 그건 형이 기광 선배 보느라 그런 거고요. 지금 대숲에 밴드부 보컬 누구냐, 청자켓 입으셨던 분 이름이 뭐냐 이런 글 올라와요. 이 사람들도 형이 얼마나 열렬한 짝사ㄹ...”
“우리 동운이는 가만히 있으면 다 좋은데 자꾸 매를 벌어요, 매를.”
축제에서의 밴드부는 비유하자면 불꽃놀이 같은 존재였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비로소 존재감이 생기고 화려하게 축제의 마무리를 장식한 후에는 홀로 남아 주섬주섬 뒷정리를 해야했으니까. 나쁘게 말하자면 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시간은 엄청나게 잡아먹는단 거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저들끼리 축제의 여운을 즐기러 떠난 후에도 밴드부는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했다. 밴드부의 축제는 악기와 앰프를 반납하고 나서야 끝나는 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불 꺼진 학교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연습실에 틀어박혀 노가리나 까고는 하는 것이었다.
“근데 저건 뭐냐?”
“뭐요?”
“저기 구석에 편의점 봉투. 누가 가져온 거야? 뭐 먹을 거 좀 있어?”
연습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비닐봉지를 끌어와 열어보자 과자 몇 봉지와 익숙한 초록색 유리병들이 보였다. 그 순간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던 부원들의 머리 위로 일제히 느낌표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거 누가 사 왔냐?”
“야야, 우리 우선 이거라도 먹고 있자. 안 그래도 지금 차 막혀서 수거하러 오려면 1시간 걸린대.”
“형, 근데 저희 술 마셔도 돼요? 걸리면 어떡해요?”
“쌤들 이미 다 퇴근하셨어.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마셔 보겠어, 응? 이런 게 다 추억인 거지.”
술을 마시네 마네 하는 소소한 논쟁이야 있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고작해야 열여덟인 소년들에게 알코올이라는 일탈의 유혹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하 연습실에서 한 시간을 때울 다른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술을 입에 대는 건 첫 모금이 어려웠지 그 이후로는 쉬웠다. 과학실의 알코올램프를 들이킨다면 이런 맛일까. 처음 맛본 술이 혀가 소독하는 것 같은 맛인 것과는 별개로 병은 빠르게 비워져 갔다. 거기에 가장 많이 기여한 요섭은 이미 만취한 듯했다. 괜히 이과 왔다는 한탄 섞인 주정을 견디다 못한 부원들이 쟤 좀 말려보라며 연습실 구석으로 격리해 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연습실 내부는 순식간에 혼비백산해졌다. 누구는 술에 취해 잠든 요섭을 외투로 덮어 가려버리고, 다른 사람은 술병들을 한 구석으로 밀어 넣고, 또 누구는 상황을 체크하며 서서히 문을 열었다.
“어...여기 밴드부 연습실 맞지? 창체부장 선생님이 늦어도 10시 반까지는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고 하셔서 그거 전해주러 왔어.”
부원 모두가 긴장한 채 연 문 앞에 서 있던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이 선생님이나 수위 아저씨가 아닌 이기광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분명 양요섭이 옷더미 속에서 몸을 꿈틀거리기 전까진 분명 다행인 소식이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 마냥 옷더미를 뚫고 나온 요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비틀대며 기광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요섭이 기광을 향하는 걸 본 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함께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광이다...나쁜 이기광...”
걱정보다는 무난한 첫 마디에 모두 심장을 쓸어내리며 제발 이 술주정이 무사히 넘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어 버리기를, 혹은 이렇게 이기광 이름만 부르다가 기광이 먼저 이곳을 떠나기를. 그러나 불행히도 요섭의 이어지는 발언 덕에 둘 중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아...너랑 같은 반 하고 싶어서 이과, 온 건데 너는 왜 남들한테도 다 잘해주는 건데...나한테만 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오...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어는 공연 보면서 막, 다른 애한테 귓속말이나 하고오...”
최악 중에 최악이라는 공개 고백. 거기에 만취 상태니까 취중고백이기까지. 부원들의 얼굴이 일순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년에 나랑 같은 대학 가면 씨씨 해 줄게.”
생긋 웃는 얼굴로,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고백에 답해주는 기광에 한순간에 로맨스의 방청객이 되어버린 밴드부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리고 요섭이 기광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자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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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섭이 고백에 대한 대답을,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이 고백한 사실을 인지한 건 다음 날이 된 후에서였다. 그렇게 퍼마신 탓인지 첫 음주부터 필름 끊김을 겪은 요섭은 동운을 통해서야 지난 밤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씨씨를 해준다고 했다고????? 온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동운은 처음으로 요섭의 성량이 단점으로 느껴졌다,
“형, 근데 기광 선배 지망 대학에 실음과 있어요?”
“아...니, 없지.”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요. 파이팅이에요.”
눈앞에서 떠들고 있는 동운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광과 같은 대학에 갈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수시? 정시? 수시를 파기엔 당장 이번 중간고사 성적부터가 발목을 잡았다. 요섭은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에서 담임 선생님께 진학 상담을 신청했다.
요섭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이과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뭔가에 꽂히면 반드시 끝을 보는 그 성격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격은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기광과 같은 학교에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시작한 공부는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다. 고백한 지 일 년쯤 됐을까, 수시 상담을 받을 때가 되자 기광과 같은 학교는 아니어도 그 밑 레벨 대학 정도는 써볼 수 있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상담의 요지는 어차피 정시 위주이니 수시 원서는 상향으로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수능 성적을 지금보다 높여서 기광이 지원하는 대학의 끝자락이라도 노려보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양요섭은 수시 원서 6개를 전부 실용음악과로 도배하는 기행을 펼쳤다. 기광과 같은 대학에 못 갈 바에는 차라리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해보겠다고 했다. 과연 2년 전 겨울, 학교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인물다운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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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었다.
모니터에 뜬 글자는 몇 번을 다시 읽어 보아도 파란색으로 쓰인 ‘최종합격’이었다. 양요섭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합격을 축하해주고 몇몇은 부러워하기까지 하는 와중에 요섭은 홀로 울상이었다. 반쯤 장난으로 썼던 실용음악과에 이렇게 붙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음 중 수시에 합격한 고등학생이 우울한 이유를 고르시오. 1번, 원하는 학과가 아니어서. 땡, 학과만 보면 불평의 여지 하나 없이 좋았다. 2번, 하향으로 쓴 대학만 붙어버려서. 역시 땡. 애초에 2우주상향 2그냥상향 2조금상향으로 쓴 패기 넘치는 6상향 원서였다. 게다가 지금 합격한 대학은 우주상향 중에서도 우주상향인 1지망 대학이었다. 3번, 이기광이 없어서. 정답, 양요섭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수시로 1지망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붙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른다. 이 상황의 유일한 문제점은 기광이 원서를 쓴 대학에는 실음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수시에서는 기광과 원서가 겹치는 대학이 없었다. 그런데 덜컥 붙어버리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기광이 수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축하하는 마음 반 울고 싶은 마음 반으로 교실 창가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았다. 저 잎이 떨어지면 축하해 주러 가야지, 그 옆의 잎도 떨어지면 가야지, 저 가지의 잎이 다 떨어지면 가야지. 계속 말을 바꾸어 가며 기광을 만나러 가길 미루자 보다 못한 두준이 잎새를 그려주기는커녕 뒷목을 잡아끌고 기광에게 향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두준의 너머로 기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마디를 꺼내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별거 아닌 얘기를 나누고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합격을 축하해줄 수 있었다. 어려운 건 그다음이었다. 고백이라고 해야 할지 관계라고 해야 할지, 1년 전 축제에서의 일을 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백지가 된 머리와 절박한 마음, 거기에 이기광 옆에만 가면 멍청해지는 것까지 더해져 언제나처럼 바보 같은 말을 내뱉었다.
“기광아...나 내년에 반수해서 너랑 같은 학교 가도 씨씨해줄 거야?”
평소 같았으면 옆에서 열심히 웃음을 참는 윤두준을 한 대 치고도 남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기광까지 가세해서 웃기 시작하자 요섭은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기광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긍정이나 부정의 신호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요섭아, 근데 나 같은 대학 가면 씨씨해준다고 했지 다른 대학 가면 고백 안 받아줄 거라고 한 적은 없는데?”
가을은 짝과 이별하는 계절이라고 했다.
계절을 버텨낸 잎들이 떨어지듯 마침내 오래 묵은 짝사랑도 끝이 나는 계절이었다.
짝,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