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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포기 선언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던 첫사랑이 떠나고, 별거 없던 두 번째 사랑이었음에도 나는 울었다. 흔한 노래 가사처럼 이제 다시 사랑 안 한다며 울분 짖었던 그 시절의 내가 무색하게, 얼마 못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얻은 건 견고한 내면이 아닌, 유치한 마음뿐이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너 그거 안 먹잖아. 줘. 내 음료 위에 있던 시나몬 가루를 걷어가는 너를 보며 생각했다. 이토록 별거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이었지만, 우리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에는,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어른 포기 선언

섭광

 

 

사랑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길에서 부딪혀서 시작되기도 하고,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열렬하게 싸우다가 시작되는 것이, 이상하게 사랑이었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도 그랬다. 우연하게 만난 지인의 술자리에서 닿았던 연이, 이토록 커져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모태 이성애자였던 양요섭과 모태 호모였던 이기광이 이렇게 만날 줄을.

 

 

뜨겁다가도 차갑고, 밝았다가도 어두워지는 이십 대의 화려한 사랑은 아니다.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는 감정 소모를 필요로 하는 사랑도 아니었다. 적당히 해볼 만큼 해본 연애와 데일만큼 데여본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결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뜨뜻 미지근한 온도가 편했다.

 

 

이렇게, 툭툭- 튀어나오는 다정함에서 말이다.

"아 내일 진짜 회사 가기 싫다."

넌, 내 음료에서 걷어간 시나몬 가루 묻은 크림을 빨아먹으면서 말했다.

"나도. 김 부장 꼴도 보기 싫은데."

"그 사람은, 맨날 심술만 부리니까 머리가 없는 거야."

 

 

씩- 웃는 너의 입가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고, 나는 바로 연상되는 반짝반짝한 머리를 생각하며 풋- 웃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몇 가닥 길렀더라.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요섭은 특유의 얼굴을 잔뜩 구긴 표정으로 웃었다.

 

 

가을볕에 붉은색들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과 똑같이 붉게 노을 진 하늘, 창밖에 저수지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일상 이야기를 해대는 우리는, 주말이면 때때로 외곽으로 나와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나누는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하면서, 별거 없는 일상 이야기였음에도 요섭과 기광은 서로의 차분함을 좋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수지에 물결처럼, 따스하게 밀려오는 서로의 온도가 좋았다.

 

 

어렸을 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고, 항상 사랑이 주는 강렬함에 중독된 것처럼, 자극만을 갈구했다. 짜릿하게 피워 오르는 스파크가 당연한 줄 알았고, 이 사람이 내 마지막 사람이라는 짧은 생각으로 그렇게 매달렸다. 그래서 늘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낼 것처럼 화를 냈고, 그렇게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이 슬퍼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런 사랑은 당연했고, 이렇게 감정 소모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내가 주는 만큼 상대방도 나한테 그렇게 하길 바랐지만, 상대는 내가 아니었고 나 또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개인이 가진 감정의, 또 성격의 격차를 감당하지 못했다. 항상 부딪히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급급했다. 나는 상대의 무심함의 상처를 받고, 상대는 나의 안일함을 싫어했다.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었다. 내가 겪은 이별의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맹렬하게 사랑했었다.

 

 

우습게도 나의 이십 대 사랑은 그렇게 치열했다. 상대방이 중요하지 않은, 혼자만의 뜨거운 레이스를 그렇게 지속하다 마지막 연애를 기점으로, 결국 스스로 완전히 방전된 채 꽤 오랜 시간을 홀로 보냈다. 사랑은커녕, 사람조차 싫어지는 시기를 방황하다 만난 게 양요섭이었다.

 

 

끝없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관계가 아닌, 잔잔한 호숫가의 천천히 낙하하는 나뭇잎처럼 사랑했다. 뜨겁다 못해 타 죽을 것 같이 한여름 같은 사랑을 하던 시기를 지나고, 세상이 무르익어가는, 모든 것이 정적인 가을의 연애를 하고 있을 뿐이다.

 

 

소소한 취미가 비슷했고, 커다란 취향은 엇비슷했고, 입맛은 달랐지만 맞췄다. 내가 한 발, 네가 한 발.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했다. 그게 지금 우리의 사랑이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은 것을 가져갈 만큼, 또 나의 저질 유머에 웃어줄 만큼.

 

 

"얼마나 심술을 부리는지, 머리가 반짝반짝하다니까."

"아 진짜?"

"빛 반사 때문에 눈이 나빠질 거 같아."

 

 

이마를 톡톡- 건들며 이야기하는 기광을 보며 요섭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었다. 바둑알같이 커다랗고 새카만 눈동자가 기광을 온전하게 바라본다. 이따금씩 양요섭이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올곧은 바람에, 기광은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그 안에 어떤 것들이 담겨있을지 가늠조차 안되고,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했다. 기광은 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부장이 어쩌고- 하며 투덜 걸렸지만, 귓가에선 심장소리가 쿵- 쿵- 하고 조심스럽게 뛰었다.

 

 

"그럼 내가 안경 사줄게."

"안경으로 안될걸? 선글라스는 필요해"

"태양이야? 적외선 안경 필요한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푸하하-! 결국 웃음이 터진 기광은, 요섭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가을볕과 맞물린 둘의 사랑은 다소 정적이었지만, 차분한 대화 속에서 뛰는 심장은 소란스러웠다. 기광은 요섭의 견고한 눈빛이, 요섭은 기광의 웃음이. 사무치게 좋았다,

 

 

<-

 

 

양요섭의 이상형이 이기광은 아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기광은 남자였고, 양요섭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보면 연인으로써 만날 수 없는 관계기도 했다. 애초에 애정이 어린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 요섭은 기광을 좋아하고 있었다. 제 감정을 눈치채자마자 부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기광의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 제 모습을 보며 깨달았고, 그 장소에 있던 기광을 보자마자 터질 것 같던 심장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냅다 고백부터 해버렸다. 나랑 사귀자고.

 

 

서른이 넘은 양요섭은, 대담함보다는 생각이 많고 신중한 편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어렸을 적 치기 어려 제멋대로 굴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현실에 부딪히면서 포기하는 법을 배웠고, 또 수긍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였을까 직장인이 된 요섭은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여러 번 고민하고, 늘 자신에게 되물었다. 이것저것 현실적으로 타협하며,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게 몇 날 며칠이었는데, 제 진심을 알자마자 냅다 고백을 했다. 무모함으로 똘똘 뭉쳤던 어린 시절의 양요섭도 해보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말 머리털 나고- 행동한 첫 번째 과감함이었다.

 

 

'... 내가 좋다고?'

 

 

기광은 요섭을 믿을 수 없었다. 지인과 함께 우연히 만났다던 남자는, 분명한 이성애자였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동갑의 나이, 직종은 다르고, 차분한 성격을 가진 남자와 일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종종 연락하던 게, 사적인 연락이 되고ㅡ, 사적인 연락을 매일매일 하다가, 문자가 전화로 바뀌었을 때, 기관도 알았다. 요섭보다 먼저 눈치챘었다. 난 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하지만 요섭은, 저와 다른 사람이었다. 남자를 만나본 적 없는 이를 좋아한다는 건, 나 혼자 상처받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았기에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 못 오를 나무라면,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던 속담이 있듯이 말이다. 기광은 기우는 마음을 억지로 치켜세우려 했다. 애써 평행을 맞추려 억지로 균형을 잡았다. 그럴 때마다 기광의 온 마음이 근육통처럼 아파졌지만 상관없었다. 홀로 퍼붓는 마음은 스스로에겐 독이다. 예전처럼, 누군가를 제 사람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할 힘이 없었다. 어차피 내민다고 마주칠 다른 손바닥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접어버렸다.

 

 

그런데, 되려 자신에게 고백을 해오다니. 얼마나 심장이 널뛰는지 양요섭을 아마 평생 가도 모를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광은 제 귀를 의심하며 그 마음을 부정을 해버렸다. 얘가? 나를? 왜? 그리고 혹여나, 자신이 요섭을 좋아하는 티를 낸 것이 아닌가. 그래서 착한 양요섭은 관계가 틀어지는 게 무서워 받아준 거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들이 겹치면서 머리가 복잡했다. 어지러웠다. 행복이라는 감정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오만, 후회, 착각,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그러다 서글퍼졌다. 숨겨버린 제 사랑이 초라해 보였다.

 

 

'.. 요섭아, 나는 네가 왜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

'... 나는 그런 말이 아니라ㅡ'

 

 

너는 게이 아니잖아.

내가 내뱉는 말에 내가 상처를 받는다. 같은 사랑이었어도, 감추고 숨겼던 내 사랑과 당당하게 만나자고 말하는 너의 사랑이 비교됐다. 너의 비해 나는 한없이도 비겁하고 초라한 것 같아서, 상처받기 싫어 먼저 도망친 내가 싫어서, 그래서 부러 심술을 부렸다. 단순하게 생각했어야 하는데, 꽈배기처럼 꼬여버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네가 왜 좋냐고?'

'... 응'

'... 네가 솔직하게 대답하는 거 원하는 거 같으니까, 나도 솔직히 말할게.'

 

 

단호하기 짝이 없는 요섭의 말의 기광의 심장이 또다시,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감정 조절 장치에 고장이라도 난 듯 고작 몇 분 사이에 심장이 우주에서 지구 내핵까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방금 깨달았어.'

'...'

'내 전화받고, 여기 달려오는 동안 내가 좋다고 알았어.'

 

 

그 전화 한 통에, 하던 거 다 재치고 심장 터지게 여기까지 달려오는데, 나를 지금 알았어. 내가 하루 종일 네 전화를 기다리고, 네 문자 한 통에 하루가 좋았다가, 만나자는 말에 그 전날부터 입을 옷을 고민하고, 늦으면 안 된다며 삼십분 일찍 나가 기다리고. 네가 속상하다는 연락이, 신경 쓰여서 하던 업무도 한 개도 못했어. 그리고 지금, 나ㅡ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있다가, 뛰쳐나온 거야. 오늘 보면 언제 볼지 모르는 친구들이었어. 옷 챙길 때 배신자니, 뭐니 이런 소리 들으면서 나왔어.

 

 

'그리고 여기 오는 길에, 나는 너 만날 생각에'

'... 요섭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나 부정맥인 줄 알았어.'

 

 

뜬금없는 소리에 기광은 저항 없이 웃어버렸다. 여태껏 절절한 사랑고백을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한 말은 부정맥이라니. 제멋대로 터진 웃음에 기광은 고개도 못 들고 한참이나 끅끅- 걸렸고, 요섭은 제 사랑이 정확하게 전달됐는지, 아니면 안 됐는지 알지 못한 채로 이내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 이 정도면 너한테 고백할 수 있지 않나?'

담담한 말과, 색 하나 변하지 않은 낯빛.

'... 어... 어어ㅡ.'

더듬는 말투와, 웃음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새빨갛게 변한 낯빛.

올곧은 눈빛은 그때부터였다. 요섭은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지그시 기광을 바라보며, 제 진심을 건넸고 그 진심을 받은 기광은 활짝 웃으며,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둘의 첫 시작이었다.

 

 

황급히 건넨 제 마음을 부정하려 들었던 기광의 말에, 막힘없이 쏟아낸 요섭이지만 정작 당사자도 이렇게 바다다- 하고 제 키워놨던 사랑을 내뱉을 줄 몰랐다. 나를 밀어내려 든 기광에게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곱씹을 새도 없이 무작정 말해버린 탓에, 구구절절한 사랑 호소문이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던 기광이, 저의 마지막 말에 활짝 웃는 모습에, 앞에 지껄이던 말들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온전히 세상이 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좋아해버렸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 있다면, 바로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치열하게 감정 소모를 했던 이십 대의 마지막 연인. 정말 개처럼 싸우고 개 같은 뜨거운 사랑을 했던 사람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없는 직장 협력업체로 만났다.

 

 

"... 오랜만이네"

 

 

머쓱하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그때와 비교했을 때,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까지도 똑같던 음성은, 다시 만난 지금까지도 똑같았다. 기광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불편했다. 그리고 짜증 났다. 몇 년 전 그 시절과 하나도 달라진 것 없는 얼굴과 행동, 헤어지기 전까지도 미친 듯이 좋아했던 저 인간. 내 안에 모든 것을 불 싸지를 만큼 좋아해서 끔찍하게도 싫은 사람. 기광은 미간에 내려앉은 짜증을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이기광 대리라고 합니다."

이럴 거야?라는 눈빛.

응 이럴 거야.라는 단호한 표정.

"하ㅡ,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윤두준입니다."

 

 

기광의 고집을 모를 이 없는 남자는, 포기했다는 듯 상대의 철벽에 동참했다. 우리 앞으로 선에서 넘지 말고, 여기서 끝내자.라는 선전포고였다. 두준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기광은 이를 악- 물며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여기서 이 손을 잡지 않으면 그 철벽 선언을 제가 먼저 피하는 거 같아 맞서 싸워야 했다. 아주 오랜만에 맞잡은 이 손은, 낯선 익숙함이다. 한때 매일같이 붙잡았던 손이었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요."

 

 

의례적인 인사를 끝으로, 기광은 먼저 잠시 회의실에서 나갔다. 일진이 사나울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

 

 

평일 내내 상사에 시달려, 클라이언트한테 시달려, 두준에게 신경이 곤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스트레스가 쌓인 기광은, 쉬는 주말이 되자마자 등산에 가자며 요섭을 이끌었다. 요섭은 저를 닦달하는 기광이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먼저 말해줄 때까지 되묻지는 않았다. 그저 알겠다며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따라나설 뿐이었다.

 

 

세상이 옷을 갈아입었다. 싱그럽게 푸르던 나무들은 붉은색 옷을 입으며 이번 년의 끝자락을 알렸고 사람들은 색색의 나무들이 펼쳐진 그림 같은 산과 선선한 날씨를 핑계 삼아 여기저기 놀러 나와있었다.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높고 푸르른 하늘, 바닥에 밟히는 떨어진 나뭇잎들을 사박- 사박- 밟는 동안에도 기광은 말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저들만의 이야기로 꽃피워갈 때, 기광은 묵묵하게 앞으로 나가만 갈 뿐이었다. 조금 앞서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요섭은 어깨를 으쓱- 하며 똑같이 뒤를 쫓았다.

 

 

험한 산은 아니어서 그런지, 오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워낙 운동하는 걸 좋아하던 둘이었기에, 정산까지 갔음에도 오히려 체력이 남아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막힘없이 시원하다. 수많은 건물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후련하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 마저도 뻥- 뚫리게 해주는 시원함이 온몸을 감쌌다. 난간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심호흡을 하는 기광을 보던 요섭은 찌뿌둥하던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끝낸 후 근처에 있는 평평하게 닦인 돌 위에 앉았다ㅡ, 제 앞에 보이는 연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등 뒤로 부는 바람이 상쾌했고,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들이 머리 위로 흩날렸다. 가을의 정취 앞에 서있는 풍경의 이기광은 조용했지만, 그 또한 지극히도 그 같아서 천천히 구경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풍경만 바라보던 기광은, 마음이 정리된 건지, 아님 마음의 준비가 된 건지. 요섭에게 다가왔다. 요섭은 당연하게 자리를 살짝 비켜 그의 자리를 만들어줬다. 기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

.

.

 

 

"....이번에 일 시작한 거, 협력업체 사람이 전 애인이야."

"..."

"말..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래 그랬구나. 급작스러운 기광의 고해성사 같은 말에, 요섭은 당황했지만 구태여 어떠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랬구나. 하는 간단한 말을 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뿐이었다.

 

 

"세상 참 좁다. 그치?"

".... 그러게."

 

 

전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듣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기광에겐 애증의 대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했고, 그랬기에 죽이고 싶은 만큼 미운 사람이라는 것을. 늘 무던하게 사람을 상대하던 기광이 도저히 무던하게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사람. 요섭은 기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광아ㅡ,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네 선택이 중요하니까"

"... 응."

"나는 다 괜찮아."

 

 

요섭은 높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의 하늘은 눈부시게 새파랗고, 아득할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신발에 밟히는 낙엽들마저도 생생하게 느껴지고ㅡ 나를 내리쬐는 볕마저 따뜻한, 이 가을의 중심에. 단단하게 조용한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요섭은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온 기운을 모아,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힘들지 마라, 힘들지 마라. 하고.

 

 

-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

"가을에 만났잖아."

 

 

나는 단풍 구경 왔고, 너는 그런 사람들 인터뷰하겠다고. 두준이 하하- 웃음 지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기광에게 말을 건넸다.

 

 

<-

 

 

이십 대 중반, 두준은 군대 전역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대학 동기를 따라 과 미팅을 나왔었다. 단풍 구경을 핑계 삼아 삼삼오오 모인 대학생 무리들은 하하- 호호- 거리며 저마다 속셈을 채우려 앉아있었다. 학교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소문난 복학생 두준은 같이 복학한 동기들을 따라 나오긴 했지만, 미팅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연애의 관심도 없었고, 누굴 만나기엔 제가 시간이 없다는 것도 뻔히 알았다. 두준은 자신만의 시간이 중요한 사람이라는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애인을 만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소란스러운 무리 안에서 심드렁하게 앉아, 떨어지는 나무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저렇게 후드득- 떨어지는 거 보니 겨울도 얼마 안 남았겠구나,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서.

두준은, 아주 문득 나무 아래서 종이뭉치를 들고 다니는 한 남자를 봤다. 캐주얼하게 청재킷을 입은 남자는 사람들 인터뷰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빨빨- 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스무 살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열심히 산다ㅡ.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에 맥주캔을 홀짝이다 이내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혹시 인터뷰 괜찮으실까요?'

 

 

어느 순간 제 앞에 다가온, 남자의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한 두준은 허억-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펄쩍하고 뛴 두준과 놀란 두준 때문에 더 놀란 기광은 서로 마주 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덕분에 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아- 아 죄송해요ㅡ. 이렇게 놀라실 줄 몰랐어요'

'아니에요. 저 때문에ㅡ.'

 

 

머쓱하게 사과를 하던 둘은 기광의 요청에 따라 대학 생활의 전반적인 인터뷰를 했다. 두준의 무리도 다 같이 이것저것 인터뷰를 하는 게 첫 만남이었다. 익숙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나려던 기광을 먼저 잡은 건 두준이었다. 종이를 들고 빠르게 걸어가던 기광을 쫓아가- 연락처를 되묻던 이십 대 중반의 윤두준은, 동갑이었던 이기광을 가을의 중심에서 만났다.

 

 

->

 

 

"그리고 가을에 헤어졌지."

"... 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처럼 아주 뻥- 세게 차버렸잖아."

 

 

기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두준의 촉촉한 감성팔이는 전부 거짓말이라는 듯 현실을 일깨워줬다. 기광의 말마따나 그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만난 둘은 생각보다 오래 사귀었다. 1000일을 넘게 사귀었고, 그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준과 기광은 취미도 비슷했고, 성격도 비슷했고, 취향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둘은 맨날 싸웠다. 너무 비슷한 사람끼리 붙어있으면 싸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절실하게 깨달을 정도로 싸워댔다.

 

 

가을에 만났던 두준과 기광은, 한여름의 중심처럼 연애를 했다. 미친 듯이 화창하다가도, 한순간에 먹구름으로 뒤 덥혀, 세찬 소나기를 맞았고, 폭우가 내리는 장마를 견디다가도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처럼 그렇게 사랑했다. 미워한 만큼 사랑했고, 싫어한 만큼 좋아했다. 허구한 날 싸워댔으면서도 4년을 만났다. 미련한 짓인지 멍청한 짓인지. 결국의 남은 건 승자 없는 패자들의 싸움일 뿐이었다. 두준과 기광은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하며 헤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어떡해서든 만나지 말자고,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가자고 염불을 외웠다. 뒤도는 순간이 기광이 약 삼십여 년을 살면서 가장 후련한 순간이였으리라. 다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헤어져놓고, 이렇게 만나 추억 팔이를 하는 게 우스웠다. 기광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때때로 떠오르는 두준과의 기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수많은 분노와 싸움, 또 수많은 기쁨 중에서 지금 기억나는 건 그랬었지. 하는 어렴풋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안다. 기억은 퇴색되기 마련이었기에ㅡ 추억이랍시고 생각나는 것들은, 끔찍한 이십 대 속에 극히 일부분일 것이었다. 방전될 만큼 나를 불태웠던 고통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막말로, 초행길이니까 갔지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못 갈법한, 추억일 뿐이었다.

 

 

[밥은 먹었어?]

 

 

점심시간인가. 요섭에게서 온 카톡에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기광은 곧바로 답장했다. 아직. 일이 안 끝나.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하는 기광을 보면서, 두준이 슬며시 묻는다.

 

 

"애인?"

"네."

"또 그러네."

 

 

고개를 설레 설레- 젓는 두준은,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제 노트북을 두드리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회의만 끝나면 당장 도망쳐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광은 요섭의 [헐... 미쳤다]라는 카톡을 잠시 미뤘다.

 

 

"나중에 시간 되면 소개해 줘요."

"..."

"아 이건 좀 미친 소리가?"

 

 

엑스라지만,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니어서 상관없지 않나? 두준은 특유의 시원하게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둘에겐, 어떠한 애정 관계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 단지 기광은 과거 때문에 두준에게 불쾌함을 느꼈고, 두준은 기광을 그저 전 애인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뭐, 친구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요섭을 소개해달라니. 이 미친 소리는 어디서 나온 걸까. 기광의 이마에 분노가 내려왔다.

 

 

"네. 미친 소리인 거 같네요."

"화나셨네요?"

"..."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 그만큼 너한테 무슨 감정도 없다는 소리야. 특유의 입꼬리를 씩- 올려 웃는 웃음. 우리가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리고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서로한테 악담하면서 헤어졌는데. 노트북의 시선이 고정된 두준은 제 할 일을 다 했는지 깔끔하게 말을 마치며 제 노트북을 닫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점심시간인데, 밥이나 먹고 하죠"라며 옷을 챙겨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기광은 혼자 덩그러니 앉아, 윤두준이 사라진 문만 멀뚱히- 바라봤다.

 

 

꿈뻑-

꿈뻑-

꿈뻑-.

 

 

"하ㅡ 씨발 새끼."

지랄맞은 저 능글맞은 성격. 참 싫다.

깊은 한숨 뒤에 튀어나온 진심이, 기광을 대변했다.

 

 

-

 

 

요섭은 아무렇지 않은척했지만, 완전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찌 됐던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밥은 먹었으려나ㅡ."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던 자판기 커피를 들고 복도를 걷는 요섭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만약, 기광의 상황이 저의 상황이었다면, 아마- 미치고 팔짝 뛰어버렸겠지. 그리고 이렇게 좁디좁은 세상을 원망하며 사직서를 들고 발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전 애인들을 떠올렸다. 그래. 제일 마지막이었던 사람.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던 나와,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던 상대. 그 문제로 내내 부딪히다 결국 의견 차이로 헤어졌다. 조율을 해보려고 시도를 해봤음에도 씨알도 안 먹혔는데.

 

 

우습게도, 결혼을 하고 싶어 했던 나는 결혼 따윈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지금이 좋았고, 전 애인은 작년인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소식을 들었다. 나랑은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들을 다른 사람과는 당연하게 해버린 게ㅡ,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지만 뭐 어쩌리. 그저 내 운명이 아닌가 싶은 거지.

 

 

요섭은 결단코, 스스로가 다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분했지만 다혈질이었고, 그만큼 제 속 안에 있는 것들도 늘 왔다 갔다가를 반복하며, 적절한 구간을 찾아 헤맸다. 어렸을 적, 늘 사람들은 요섭에게 너는 너무 히스테릭하다고 이야기 했었다. 이십 대 중반에는, 사람 자체가 예민해서 힘들다는 이유로 이별을 해봤다. 전 애인만 해도,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너무 까탈스러워서 싫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요섭은 달라졌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성격이 변한다. 어렸을 적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붙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포기해야 하는 방법도 알았다. 내가 그렇게 들끓어봤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을 순간, 요섭은 신중해졌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한없이 예민해져서 사람들에, 제멋대로 굴던 것들도 고쳤다. 되돌아보면, 참 못나 보였기에 고치려고 노력했다.

 

 

제 못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또는 고쳐보려 시도하느라 생긴 습관이었다. 속으로 생각하며 이게 맞냐고, 최선이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버릇이 생겼다. 그 시점에 이기광을 만난 건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나 이제 밥 먹으러 가.

 

 

갑자기 온 기광의 연락에 놀라, 커피를 놓칠 뻔했다. 아이씨! 바지에 살짝 흘린 커피를 툭툭- 털었다. 검은 바지여서 다행이지. 얼룩이라도 남을 뻔했네. 요섭은 다시 종이컵을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토록 사람을 좋아해 본 적 있었던가. 전 애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아마 없었던 거 같다. 열렬하게 원해서 사랑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다. 엑스들과의 연애는 나 혼자 들끓었었다. 사랑으로 인한 감정 소모가 아니라, 혼자만의 심경 변화 때문에 뜨거웠다. 요섭은 기본적으로 차분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들 속 안에서 뜨거운 것들을 내뱉어야 했다. 그래서 상처를 줬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도 많이 받았다. 못난 제 스스로를 싫어했다.

 

 

열기는 식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식었다. 뜨겁게 달궈주는 것들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식는다. 양요섭은 그런 상태였다. 열을 가하는 걸 억지로 차단하고, 제 스스로의 온도를 내리는 중이었다. 차분해지려 했고ㅡ 실제로도 어느정도는 잔잔해졌다. 기광과 만나는 요섭은 이젠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요섭은 휴대폰을 꺼내 답장을 했다.

 

 

[늦게 먹네. 고생한다.]

 

 

아무렇지 않은척 말이다.

 

 

-

 

 

기광은 쉴 틈 없는 업무에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평일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까지 나가서 협업해야 하는 상황이 끔찍했다. 대부분의 전화는 클라이언트 아니면, 윤두준과 소통하는 걸로 도배가 되어있었고, 끝도 없는 수정 요청 때문에 때마다 두준을 만나러 가야 했다.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냐 싶기도 했지만, 이건 기광의 승진이 달려있는 문제였다. 이 대리에서 이 과장으로, 나아가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회사에서도 이것만 잘 터지면, 크게 하나 내주겠다며 호언장담한 탓에 기광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옆구리에 태블릿 피씨를 끼고 길을 걷는 중이었다. 주말에 아주 화창한 늦가을에 말이다.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발에 챘다. 버스럭 버스럭- 방금 떨어진 낙엽들은 밟으면 큰 소리를 냈고, 떨어진지 오래된 낙엽들은 바닥에 습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기광은 퀭- 해진 눈으로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소음들이 부러웠다.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소음이 말이다.

 

 

"늦었네"

"당신이 빨리 온 거세요."

"한마디도 안 져. 아주."

 

 

두준은 온 지 꽤 시간이 됐는지, 벌써부터 물건들이 다 자리가 잡혀있었다. 절반 정도 마신 아이스커피는 표면의 얼음이 맺혀있으니.

 

 

"클라 이 새끼, 미친 새끼 아니야?"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맞는 듯."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좀만 돈 벌면, 내가 이 바닥 뜬다. 하며 입맛을 다시는 두준을 보면서 퍽이나- 하는 얼굴로 태블릿을 켰다.

 

 

서로는, 서로에게 엑스 일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기광은 두준에게 말을 놔버렸다. 냅다 반말부터 짓거리며 왜, 뭐.라며 되려 당당하게 물었고 두준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웃어버렸다. 시간이 약인지, 과거 참혹했던 감정들은 어느 정도 묻어버리기로 했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그때의 내가 그리운 거지ㅡ 그 시절 우리가 좋은 건 아니었다는 걸 알았고, 어차피 두준과 기광은 연인적으로 엮이면 안 될 사이라는 걸 서로 절실히 느꼈기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기광은 요섭이 좋았다.

 

 

"너, 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고 했었잖아."

"아ㅡ."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두준은 또다시 모르쇠 얼굴로 어깨를 들썩인다. 늘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태도에 기광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됐냐고.

 

 

"파혼했지ㅡ, 식장이랑 다 잡아놓고 빠이빠이."

"왜?"

"바람났어."

 

 

나 말고ㅡ, 상대가. 덤덤하게 말하는 거 치고는 충격적인 사실에 기광은 무심하던 태도를 멈췄다. 미친 거 아니야? 격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두준은 개의치 않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다행인 게, 혼인 신고 미리 안 해놓은 게 진짜 천만다행이야. 보통 대출 때문에 미리 혼인신고 한다잖아. 난, 굳이- 싶어서 안 했는데.

 

 

"턱시도도 못 입어보고 이혼남 될 뻔했다니까."

"... 미친"

"나 법적으로 깨끗해."

 

 

하하- 웃던, 두준이 장난 섞인 표정으로 기광에게 묻는다.

 

 

"너는?"

"나? 내가 뭐."

"지금 애인, 좋아?"

 

 

피식- 웃음이 샌다. 좋냐니. 그런 원초적이고도 1차원적인 물음을 들어본 적 없어서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기광은 대답했다. 어. 너무 좋아. 정말 좋아. 똑같이 1차원적으로 대답까지 해줬다.

 

 

"아- 그래?"

"... 뭐야 그 반응."

"아니ㅡ, 나는 뭐."

 

 

별로라고 하면ㅡ, 내가 물리쳐줄 수도 있고. 능글맞게 말하는 두준. 아무런 감정도 없으면서 이따금씩 이렇게 구는 두준을 아니꼽게 쳐다보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니가 히어로야 뭐야.라며 다른 말로 맞받아쳤다.

 

 

-

 

 

기광은, 쉴 틈 없이 바쁘다. 이번 년 이기광의 가을은 일로 가득 차있었다. 늦가을이 지나 초 겨울이 될 때까지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요섭과 있는 시간에도 일에 매달렸고, 주말이면 두준을 만나기 위해 나갔다. 남겨진 요섭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했지만 그럼에도 차오르는 외로움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보기도 했다. 이기광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질투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본적도 없는 상대에게 차오르는 질투를 느꼈다. 때때로 화가 나는 걸 애써 삭히고, 문자로 장문의 카톡을 보내려다가도 지웠다.

 

 

혼자 남겨진 주말은, 쓸쓸했다. 텅 빈 집안에 홀로 앉아 멍하니- 티브이만 바라보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싫었다. 가벼운 재킷이, 두꺼운 패딩으로 변했음에도 색색의 낙엽들이 이 매달려있던 나무가, 앙상한 가지만 남루하게 보여주고 있을 때도 기광은, 늘 바빴다.

 

 

....나쁜 이기광

 

 

-

 

 

"가지 마."

요섭이, 기광의 외투 끝자락을 붙잡았다.

"... 나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양요섭의 목소리가 떨린다.

".. 내가 붙잡으면 그럼 안 갈 거야?"

 

 

안 갈 수 있어? 붙들린 손목이 약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차마 세게 잡지는 못하고 미약하게 잡은 채로 매달리는 갑작스러운 요섭의 모습에 기광은 숨을 멈춘다.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기관 탓에 정적이 지속됐다. 숨 막히는 정적, 기광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 어른답지 못하지? 그 정적을 깨며 조심스럽게 되묻는 목소리도 평소답지 않았다. 뻔히 아무 사이 아닌 거 아는데, 그런 거 아는데 그래도 오늘만큼은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요섭은 꾹꾹- 눌러 담은 말을 내뱉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면서도 제 스스로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떼쓰면 안되는 거 알면서도,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질투심에 욱했던 자신,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요섭은 마른침을 삼켜냈다. 내가 이토록 유치했던 사람이었나.

 

 

일로 엮인 사람의 일이라면, 가야 하는 게 맞았고, 그게 기광의 승진이 달린 거라면 보내줘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깟 질투 때문에 일하러 간다는 사람을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못난 짓인지 안다. 쉬는 알 없이 열심히 일하는 녀석인데, 그렇게 사는 거 뻔히 아는데, 요섭은 구질구질하게 굴어버렸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스스로 조차 창피해, 내뱉는 말에 힘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삼십 대 중반,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양요섭은 그렇게 질투를 했다.

 

 

"... 미.. 미안해."

"...."

"그냥ㅡ, 그냥 한번 투정 부려봤어."

 

 

가. 요섭이 기광의 손목을 스르륵- 하고 놓았다. 요섭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기광을 등 떠민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부린 객기였다. 객기라고 해봤자, 일하러 간다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는 게 전부일만큼, 요섭은 기광을 사랑했다.

 

 

어디라도 맞은 것처럼, 힘없이 서있는 기광은, 요섭의 힘에 따라 현관까지 밀렸다. 신발장 앞에 다다르자, 번뜩- 정신을 차린 건지 기광은, 힘을 주어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섰다. 그리곤 휴대폰을 들어,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못 가."

단호한 기광의 말에 상대가 뭐라고 말을 했다.

"선약이야."

요섭은 기광을 말없이 바라봤다.

"응. 일보다도 중요하고,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해서."

 

 

어. 알겠어. 그럼 월요일에 다시 연락하자. 기광의 목소리를 끝으로 끊긴 전화였다. 후련하다는 듯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며 기광은 곧바로 요섭을 안아주었다. 토닥- 토닥-. 느릿느릿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사무치게 다정해서 요섭은 제 한심한 마음이 서러워졌다. 그래서 기광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애처럼 떼쓰고, 달래주니 우는 꼴이 꼭 세 살 먹은 유아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기광의 어깨에서 주룩주룩 흘렸다. 흐으-. 서러움이 북받쳐 우는 탓에 이상한 소리도 튀어나갔다. 요섭아. 다정한 목소리,

 

 

"나는 네가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야."

"..."

"나한테는 네가 제일 소중해."

 

 

너 없으면, 내 카푸치노에 올라간 시나몬 누가 먹어줘, 양요섭 없으면 부장님 때문에 눈먼 나한테 누가 안경 사줘. 누가 나를 그렇게 좋아해 줘. 누가 나한테 밥 먹으라고 이야기해줘, 누가 나를

 

 

"말도 없이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줘."

"..."

"맞지, 요섭아."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알아? 다정한 말이 주위를 맴돈다. 키가 비슷해서 좋은 점은, 서로가 서로를 정말 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일이었지만, 겪어보니 생각보다, 꽤 좋을지도. 서로를 온전하게 품어줄 수 있고, 완전하게 안아줄 수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방을 위해 생산된, 맞춤형이라는 느낌이었다.

 

 

기광은 서러움의 몸을 들썩이는 요섭을 오랫동안 안아줬다.

 

 

"난 너 없으면 안되니까, 나 버리지 마 알겠지?"

".... 내가 널 왜 버려."

"혹시나 모르잖아."

 

 

기광의 너스레에 요섭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푹 잠긴 주제에 꾸역꾸역-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웃겨 킥킥- 웃었다. 기광은 요섭이 좋았다. 여린 양요섭이 좋았다. 참고 참았다가 투정식으로 제가 티를 낸 양요섭이 좋았고, 평소에는 한없이 다정했다가도 이따금씩, 삐져나오는 어리광도 좋았다. 예민하다가도 금방 제 스스로를 억누르려 하는 것도 좋았고, 저를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것도 좋았다. 그냥 좋았다. 양요섭이어서 좋았다.

 

 

"서른 넘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ㅡ."

"..."

"어른은커녕, 유치뽕짝이다. 정말.."

 

 

부끄럽다는 듯, 퉁퉁 부은 눈을 질끈 감는 요섭이 투정을 부렸다. 어른이란 뭘까. 어른이란 다 참아주고, 이해해 주고, 그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게 어른인 걸까. 감흥 없이 질투 없이 모든 걸 다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게 어른일까. 화가 나도, 슬퍼도, 짜증 나도, 우울해도, 전부 참아야 하는 게 어른일까.

 

 

"... 참는 게 어른이면, 나 어른 안 할래."

"... 나도,"

"그냥 유치하게 이렇게 너한테 투정 부릴래."

 

 

푸하하-. 둘의 웃음소리가 현관을 가득 메운다. 삼십 중반에 시작한 연애랍시고, 차오르는 질투도 애써 눌렀던 게 바보 같았다. 서운하면 서운하다 하면 되고, 가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맘에 들어 조금이라도 뜨거울 것 같으면 회피해버리고, 차가워질 것 같으면 애써 아닌 척, 숨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애처럼 떼쓰고 싶고 싶으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떼를 쓰면 되고, 힘들면 힘들다고 응석 부리고 싶으면 하면 됐다. 마음 가는 대로, 상대를 이해해 주되,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됐다.

 

 

사랑이란 감정은 원래 유치한 거다.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사소한 거에도 기뻤다가도 짜증 나고, 슬펐다가도 함께라서 좋아한다. 과거, 사람들에게 데일만큼 데여봤기에 그건, 거짓이라며 부정하려 애썼지만,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사랑=유치뽕짝이다.

 

 

어린 시절, 각자의 엑스 연인을 만났을 태웠던 장작과는 다른 장작에 불을 지폈다. 그 시절의 온도는 섭씨 100도였다면, 지금은 사람의 온도보다 조금 뜨거운 37.5도 정도였다. 해열제를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온도, 미열인 주제에 사람 어지럽게 만드는 온도. 애매하게 따뜻하고, 미묘하게 아픈 온도에서 우린 유치한 사랑을 인정하기로 했다.

 

 

양요섭과 이기광은 한여름에 만나, 가을 같은 잔잔한 사랑을 했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 겨울로 가는 중이었다. 지금의 계절처럼, 춥기도 하고, 또 따뜻하기도 하면서도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하늘 아래서 입김이 퐁퐁- 퍼지는 그런 낭만의 계절에 서기로 했다.

 

 

"... 좋아해"

내 마지막 사람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또다시 곱씹는다.

"좋아해 정도로 돼?"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

결과가 나쁘더라도, 이젠 상처받을 준비가 된 거 같다.

"... 사"

 

 

모든 것의 너그럽지 않아도, 항상 무던하지 않아도, 매사에 차분하지 않아도. 다 괜찮은 사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ㅡ,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결과를 아파하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요섭과 기광은 어른 포기 선언을 하며, 온전한 감정으로 사랑하기로 했다. ‘척’ 하지 않지 않기로 말이다. 우리가 만나다가 결국 헤어진다고 해도, 완전히 방전된 채 이별을 맞이한다 해도, 더 이상은 두렵지 않았다. 어렸을 적, 두려워했던 마지막이라는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일 담담함이 생겼다. 우리의 끝이 어떻게 되더라도, 내가- 혹은 네가 상처받더라도 무던히 이겨나갈 힘이 생겼다. 유치한 질투를 하고, 사랑을 하고 투정을 부리고, 또다시 싸울 테지만 속마음을 숨기지 않을 것이었다. 또다시, 치열하게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우리의 끝을 모르기에, 우리가 운명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과 또한 몰랐기에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비록 신이 점지한 상대는 아니었더라도, 요섭과 기광이 치열하게 사랑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일테니까. 상관없었다.

 

 

그저, 서로에게 솔직한, 유치한 사랑을 할 뿐이었다.

 

 

 

 

어른 포기 선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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