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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의미는

 

계절의 의미는

 

양요섭 x 이기광

 

 

 

 

 

나야, 란다.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단 하나뿐인 것처럼.

 

먹먹해진 귀를 달래며 어둠에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대는 말이 없다. 눈가에 반사되는 어슴푸레한 불빛만이 전화기를 붙들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무딘 단어 하나에 이토록 날카롭게 도려내진 밤. 그래서,

 

 

“누구신데요.”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왜 받았을까. 깨운 건 진동이 맞다. 하필 오늘 선잠에 들었던가. 평소 무음으로 해 놓는데 오늘따라 잊었나. 무수한 밤중에 딱 한 번, 하필이면 그런 날이다. 그랬더라도 무시하면 됐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 전화는 끈질기게 울려대서. 우웅 우웅. 마음 옆을 집요하게 흔들어대서, 그래서.

 

 

-양요섭인데요

 

 

흔들려버린 마음이 무시하라고 시키지를 않아서.

 

 

-듣고 있어?

“……”

-이기광.

 

 

그랬다. 가을이 점점 짧고 차가워지고 있다고. 올해 가을은 유독 그럴 것이라고. 아까도, 그러니까 이제 어제가 된 뉴스 클로징 멘트에서도 그랬다. 주말에는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질 예정이니,

 

 

“듣고 있어.”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대비하셔야겠습니다, 라고.

 

 

-나 꿈꿨어.

 

 

손가락으로 다완을 쓸어내리며 옷방 구석에 걸린 봄가을 정장을 떠올렸었다. 한 번밖에 못 입었는데 아깝네. 그러다 말았다. 날씨 예보라는 게 늘 들어맞는 것도 아니니까.

 

 

-낯선 길을 걷는데 갑자기 커피향이 나는 거야. 신기하지, 꿈에서 냄새가 났어.

“그래.”

-따라가 보니까 아주 오래된듯한 건물이 있더라구, 그래서 들어갔지.

“응.”

-근데 거기 누가 있었는지 알아?

“글쎄.”

-너.

 

 

그래서 준비를 못 했다.

 

 

-커피향이 그렇게 좋은 곳에서 고작 차나 마시고 있더라니까. 이렇게 두 손으로 머그컵을 쥐고 말이야, 무슨 다례라도 하는 것처럼. 어때, 방금 나 너랑 똑같지 않았냐?

 

 

그렇게 안일했던 죄로서 나는 또 한 번 이 바람에 무방비로 휘말려야만 한다.

 

 

“용건이 뭐야.”

-너도 날 봤어.

“그래서.”

-우리, 눈이 마주쳤다니까?

“그게 뭐 어쨌…..”

-너도 같은 꿈을 꿨을 것 같아서.

 

 

떠오른다.

 

사회적 함의나 통념과 같은 정형의 틀에서 어긋난 부분을 캐어낸다면 고작 몇 개의 문장부호 정도만 남아있을 그의 평소 언행을 비추어 보자면, 더 이상 말을 늘여봐야 새벽만 길어질 뿐이다.

 

 

“아니. 전혀.”

 

 

중량이 다른 두 공기는 절대로 섞이는 법이 없으니까.

 

 

-아 뭐야, 이기광. 짜증나. 능력 없어.

 

 

가라앉는다.

 

굽실거리고 미적지근한 어른의 대화법은 그에게 통하지 않으니 힘을 주어 누른다. 솟지 않도록, 파고들지 못하도록.

 

 

“전화는.”

-잃어버렸어.

“어딘데.”

-이태원.

 

 

전화기 화면을 가득 채운 낯선 숫자들의 배열. 초면이지만 구면이 될 일도 없다. 그의 번호도 싫지만 그의 번호가 아닌 것도 싫다. 그에 관한 건 정말이지 단 한 개도 좋아지지 않는다.

 

 

-의 어느 호텔.

“응.”

-누구랑?

“그건 안 물어봤는데.”

-그러니까.

“물어봐 줘?”

 

 

피식. 요섭이 웃었다.

 

 

-됐어. 누군지 나도 몰라.

"그래."

-갈게. 내일.

“끊는다.”

-이기광. 진짜 내 꿈 안 꿨어?

“미친.”

 

 

아 이기광 진짜 재수 없어. 높아지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종료 버튼을 누른다. 전원도 꺼버렸다.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한번 베개에 깊숙이 머리를 묻는다.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한기. 새벽이라는 이유로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낯익은 얼굴이다.

 

 

「……하지만 곧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전국적으로 맑은 날씨를 되찾겠습니다. 다만 대기가 건조해질 수 있으니 산행이나 캠핑을 가신다면 불씨 관리에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또 한번 가을이 왔다.

 

 

 

 

 

 

당근은 모조리 흙바닥 신세다. 식성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아몬드만 쏙쏙 골라 앞니로 갉아대는 녀석을 내려보며 고개가 절로 갸웃거린다. 하루 이틀 곁을 내어 주다 보니 어느새 두 번의 계절이 되었다.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반지르르한 꼬리털에 보송한 미소는 덤이다.

 

 

“신데렐라야 뭐야.”

 

 

와장창 소리를 내며 틴케이스가 나뒹군다. 도망가는 와중에도 아몬드는 챙겼다.

 

 

“전화하고 오지.”

“했잖아.”

“또 해. 나 없을 수도 있잖아.”

“기다렸으면서.”

 

 

대답 없이 틴케이스를 바로 세운다.

 

 

“친구냐?”

“누가.”

“아까 다람쥐.”

 

 

녀석이 사라진 풀숲을 가리키는 쭉 뻗은 손가락 끝에 기광의 한숨이 걸렸다.

 

 

“이기광 너 외롭다고 아무나 막 친구하고 그러지 마. 특히 저런 애들.”

“…… 춥다. 들어가.”

“너랑 놀면 쟤 왕따 돼, 사람 냄새난다고. 저건 동면 준비도 안 하냐? 지 친구들은 다 자러 갔을걸? 인간이 외로워서 동물이랑 친구를 먹어?”

“말을 말자.”

 

 

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다람쥐랑 신데렐라를 찍고 싶으면 디즈니를 가. 인생이 동화냐? 니가 저 다람쥐 인생을 대신 살아 줄 거야?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이기광, 책임질 수 없는 건 붙잡지 마. 도태되게 두라고. 대체 이 산속에는 언제까지 박혀 있을 건데? 안 외롭고 버텨? 언제까지 여기서 그리워만……”

 

 

“양요섭.”

 

 

겨우 말을 끊었다. 말려들기 전에 선수를 잘 친 셈이다.

 

 

“하나, 저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위화감은 있었다. 간혹 다른 개체들도 먹이통을 찾곤 했는데 요즘은 저 녀석 뿐이었으니까. 그저 녀석이 서열 싸움에서 이긴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둘, 나 안 외로워.”

 

 

마음으로 빈약한 항변을 한다. 볕이 따갑던 날 작은 점처럼 까마귀에게 노려지던 것을 그늘 아래서 찬 물을 먹였다. 자주 찾아와도 부르는 호칭 하나가 없었다. 제 발치를 뛰놀아도 손 한 번을 뻗은 적이 없다. 그저 배곯지 말라고 먹이를 채운 틴케이스를 놓아둔 것. 그리고 그것을 멀찍이서 지켜본 것. 다만 그뿐이었다.

 

 

“셋.”

 

 

요섭 앞에 바짝 다가갔다.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좀 전까지 신나게 떠들어댄 건 대체 누구였는지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까만 눈동자.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건, 오히려 이쪽이다. 짧은 한숨 끝에 망가진 캐리어 하나를 집었다. 바퀴는 빠져있지만 그나마 손잡이가 있어 들어 올릴 수는 있었다. 요섭의 다리 옆에 붙어있는 건 핑크색 노끈으로 수박처럼 동여맸다. 그것마저 끊어지기 직전이다. 갈 때에는 새것이었는데 이렇게나 낡았다. 1년이라는 형태는 꼭 이만큼의 시간이다.

 

 

“신데렐라가 아니고 백설공주야.”

“아, 맞다.”

 

 

그러네. 신데렐라는 그거잖아 왕자님의 키스로 긴 잠에서 깨어나는 거.

 

 

“그게 백설공주라고.”

“뭐야. 둘이 뭐해. 명의도용이야?”

“신고해, 그럼.”

 

 

덜커덕 덜커덕. 캐리어를 질질 끌며 기광이 앞섰다.

 

“이기광.”

“왜.”

“그거 이리 내. 넌 글 쓰는 사람이라 무거운 거 들면 안 돼.”

“글을 힘으로 쓰냐.”

“너 맨날 손목 아프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이기광.”

“또 왜.”

“근데 방금 우리 키스할 분위기 아니었어?”

“미친.”

 

 

 

 

 

 

기광의 작업실은 사방을 산으로 품고 있다. ㅡ1년 중 360일 정도를 기거하지만 ‘집’이라고 칭하는 공간은 따로 있으므로 그곳은 작업실이다ㅡ 푸른 안개가 산등성을 치감을 때면 그대로 파묻혀서 발 딛는 자리가 하늘인지 땅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이다.

 

 

“커피 맛있다. 잔이 좋아서 그런가?”

“아뇨. 커피가 좋아서 그래요.”

“야 이거 비싼 거야. 장인이 물레를 한 발 한 발 차서……”

 

 

락그룹의 로고가 그려진 검은 후드티에 무릎이 나오는 찢어진 청바지 입었다. 맨발이고, 머리칼은 밝은 다갈색이다. 저가 만든 다완에 쿠바산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는, 차를 싫어하는 찻사발 명인. 언제 보아도 참 신선한 광경이다.

 

 

“……역시 좀 큰가.”

“뭐가.”

“아니야. 이기광. 내가 만든 찻사발에 마시는 차가 제일 맛있지?”

“응. 본인이라 감사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다완에 커피는 어림도 없어.”

“뭐야, 다른 사람 누구.”

 

 

나 말고 누가 이 깊은 산골까지 오는데.

 

영이한 기운답게 본디 이곳에는 한 여승이 있었다고 했다. 덧없는 삶에 쫓겨 암거하였으나 끝내는 속세와의 인연을 씻어내지 못해 무진한 번뇌의 속박으로 절망했다고 했던가. 어느 날 곱게 갠 승의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를 두고 혹자는 속인이 되었을 거라 했고 혹자는 망인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엉겁결에 따랐던 요섭의 도요에서 벌어진 막걸리내나는 실랑이 속에서 만났다. 올려다본 암자는 서글픈 윤곽을 띄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요섭에게 주소만 물어 혼자 왔다. 산주는 스러져가던 폐암자를 값까지 쳐서 받으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며 모텔을 지을 거냐 펜션을 지을 거냐 물어왔다. 아는 철거상을 소개해 주겠다고도 했다. 꽃무늬 양은 밥상에서 도장을 찍었다. 암자는 여전히 외로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광이 말했다. 아는 목수나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하고.

 

 

“주소 괜히 알려줬어.”

“네이버에 ‘백화도요’ 치면 어차피 나와.”

“난 여기 싫어.”

“난 여기 좋아.”

“작가들 감성은 당최 모르겠다니까.”

“문학이니까.”

“서재에 박혀서 평생 글씨만 보는 운명이라니.”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있을 건데.”

 

 

내년에 상수연을 앞두고 있는 백화도요는 일 년에 딱 한 번, 가을에 불을 피운다. 현대를 사는 장작가마는 반은 민원, 반은 장작값 때문에 전시품으로 몰락한다지만, 이곳 사람들은 태생이 도기요 사몰이 자기인지라 도요의 주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날마다 연기를 올릴 수 있다.

 

……만, 백화도요의 주인이 가을에만 도요를 찾는 탓이다.

 

 

“왜 물어봐.”

“너 당장 오늘부터 어디서 잘 건데.”

“여기.”

“그러니까.”

“그게 다야?”

 

 

이기광은 거짓말쟁이네. 찻잔을 닦는 기광의 등 뒤로 뜨끈한 체온이 덥힌다.

 

 

“’보고 싶었어’ 해봐.”

“떨어져. 명장이 만든 찻사발을 떨어트릴 것 같네.”

“나 심장 엄청 빨리 뛰어. 느껴져?”

“이게 많이 비싼 가봐?”

“오랜만에 이기광 냄새 맡아서 그래.”

“걱정 마. 네 심장은 세상의 모든 남자한테 그래.”

“아니야 이기광이라서 그래.”

“헛소리 그만하고 대장님께 인사나 드려. 아직 안들렀지.”

“그럴 거야. 가마 먼저 갔다가.”

 

 

쪽. 목덜미에 가볍게 입울 맞추고는 허리께를 감쌌던 팔을 풀어낸다.

 

 

“야!”

“왜. 부족해?”

“하…… 그래서 얼마나 있을 거냐고.”

“물어보고 올게. 도요가 있으라면 있고, 가라면 가고.”

“그래. 가마님 침수에 드시기 전에 가라, 해질라.”

“아니. 작업장 먼저 갈래. 흙냄새가 들려.”

“문법이 엉망이네.”

“뭐야. 시인이 시를 모르네.”

 

 

그래도 나는 누구 말대로 문법은 몰라도 누구처럼 거짓말은 안 하거든요. 반쯤 열린 현관에서 찬바람이 새어들었다.

 

 

“보고 싶었어. 이기광”

 

 

문이 닫힌다.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아래가 소란하다. 그새 소문이 났는지 방송국에서 취재를 온 모양이었다. 일전에 길목마다 세워둔 사유지 출입 금지 팻말이 제 몫을 한 모양. 다행히 기광의 작업실까지는 들이닥치지 않았다. 엊저녁에는 최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35년 불대장 인생에도 처음 보는 기가 막힌 홍송이 도착해 있다며, 요섭에게 전하라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 그때 요섭은 김씨 아저씨가 찾아냈다는 ‘기가 막힌 흙’을 주무르며 작은 작업장에 박혀있었다. 그게 벌써 사흘째였다.

 

작은 작업장은 기광의 작업실 옆에 선 요섭의 간이 작업장이다. 언제부턴가 요섭은 작은 작업장에서만 물레질을 한다. 가마 옆에 번듯한 작업장을 두고도 굳이 기광의 작업실에서 옆에 천막이라도 치겠다며 떼를 쓰기에 못 이기는 척 허락을 했더니, 곧장 사람을 불러 이틀 만에 구조를 세웠다. 커다란 개암나무를 사이에 두고, 기광의 그것과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톡. 톡. 톡.

 

 

“좀 평범하게 부를 수는 없어?”

 

 

두드리는 소리에 창을 열었더니 하얀 민소매를 입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요섭이 있었다. 왼손에는 개암나무 열매를 한 움큼 쥐고서.

 

 

“없을까 봐.”

“서재에 박혀 글씨만 보는 운명이라.”

“박복하네.”

“용건.”

“커피 한 잔 주면 안 잡아먹지.”

 

 

어흥.

 

 

하나, 둘. 대충 헤아려봐도 100개가 넘는다. 고작 며칠 만에 성형품이 선반을 가득 채웠다. 죄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모두 찻사발이다.

 

 

“기광아.”

 

 

선반을 훑어보는 기광에게 두 팔을 벌려 보인다. 다가가 커피를 내밀었다.

 

 

“그렇게 큰 잔은 없어.”

“나 안아줘.”

“커피 주면 안 잡아먹는 거 아니었어?”

 

 

마시기나 해.

 

실은 급했던 모양인지 그것까지는 받아치지 않았다. 눈 깜박일 힘도 없는지 눈을 감고 들이킨다. 박스째로 사 놓았던 초콜렛은 벌써 바닥이 보인다. 냉장고에 채워놓았던 에너지 드링크도 빈 캔이 되어 쓰레기통 속을 뒹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봐.”

 

 

요섭이 제 오른쪽 손바닥을 쫙 펴더니 기광의 눈앞에 내민다. 요섭의 오랜 습관이다. 몇 날 밤을 지새며 물레질을 한 정신에게는 그냥 맞춰 주는 것이 상책이니, 기광도 왼손을 펴 보였다. 유독 손이 큰 양요섭과 유독 손이 작은 이기광은 꼭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차이가 난다.

 

 

“작다.”

 

 

왜 찻사발만 만들어 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이런 순간이다. 어려워, 어려워. 그러니까 뭐가 어렵다는 건데. 요섭의 작품 전시회에는 주전자도 있고 화병도 있고 그릇도 장식품도 있었는데 요즘의 그는 왜 다완만 만들까. 그걸로 명인 칭호를 받아서, 라고 하기엔 양요섭은 본인의 직업에 대한 목적의식은 크게 없는 사람이다. ㅡ본인에게 확인한 바다ㅡ 나는 저래서 예술을 못하나 보다. 절대로 같은 글을 쓰면 안되는 작가에게 똑같은 것만 만들어야 하는 예술이란, 참 어렵다.

 

 

“되게 예쁘게 만든 거 있어. 굽이 특히 예뻐. 그거 너 줄게.”

 

 

왼쪽 발로 물레를 차는 시늉을 한다. 고무신 뒤축이 다 닳아있다.

 

 

“응. 고마워.”

“아. 하고 싶다.”

 

 

아 배고파, 아 졸려, 같이 가볍게 말을 해서 뭐를, 하고 되물을 뻔했다. 이런 수치를 모르는 인간. 여기 온 지도 일주일이 되었으니, 그만큼 안 한 셈이다. 그래. 양요섭 치고는 오래 참았다.

 

 

“해.”

“너랑 하고 싶다고.”

“이거 호랑이가 아니라 사기꾼이었네.”

“겸업합니다. 호랑이도 하고 사기도 쳐요.”

“어쨌든 그런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이 아니니까.”

 

 

명색이 시인인데, 저런 눈빛에는 이을 말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빼앗듯 빈 잔을 받아들고,

 

 

“아직도 못 잊었어?”

 

 

대답 없이 문을 나섰다.

 

 

 

 

 

 

 

「이기광.」

 

 

같은 대학을 다녔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기광은 졸업을 앞두고 막 등단한 참이었고, 요섭은 이미 장인 칭호를 듣는 유명 도예가였다는 점이었다. 시의 세상에서 살면 세간 사정에 어두워도 살아질 것 같아 시인의 길을 택했더니, 등단 이후로 쏟아지는 관심이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섭과 함께 있으면 좋았다. ‘촉망받는 작가’란 ‘천재’에 비할 길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해봐.」

 

 

만날 때마다 하는 짓이다. 성장은 멈추었으니 달라질 수치도 없는데 매번 손바닥을 벌려왔다. 번거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직접 말은 않았다.

 

 

「양요섭. 너 그거 하지 마. 울애기 손 닳아.」

 

 

요섭은 그의 친구였으니까, 뭐랄까. 나름대로 잘 보이고 싶었던 거라 생각한다.

 

그는 따뜻하게 손깍지를 끼어오는 사람이었다. 규모 있는 백일장의 시상식에서 만났다. 기광은 수상자였고, 그는 그 백일장의 후원자 측이었다. 팬입니다, 저희 학교도 같은데 어쩌면 친구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땐 역할도, 목적도, 장소도 잊어버렸다. 꽤 큰 상을 받았는데 그날의 다른 기억들은 흐리다. 그에게 반했습니다. 그것만 남아서.

 

사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요섭을 알았다. 계획적인 건 아니었고 어쩌다 지나는 길에 요섭이 있었다. 그의 소개사는 이러했다. 세상에서 저가 알고 있는 가장 가벼운 인간이지만 예술계 인맥으로 두기에는 꽤 괜찮은 놈. 듣는 귀가 무안해서 그런 말이 어디 있냐며 타박을 했더니 장본인이 나서서 「맞는 말이야」 랬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기광이는 내꺼니까 둘이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 소개는 저가 시켜놓고 요섭의 눈 앞에 몇 번씩 손깍지를 흔들어 보였다.

 

열심히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를 짓고 싶었지만 시로는 잘 되지가 않아서 겁도 없이 소설도 썼다. 늘상 저와 소설은 연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글을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니 어떻게 써졌다. 밤이나 낮이나 안이나 밖이나 온통 그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붙였다. 차마 꼭 같이는 할 수가 없어서 그의 이름에서 딱 한 자를 빌려 왔다.

 

출간일만 기다렸다. 처음으로 태어난 기광의 소설을 처음이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선물하고 싶어서.

 

 

[ 우리 그냥 다시 친구 하자. 너, 너무 무겁다. ]

 

 

그런데 잘 안됐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도착한 건 그가 아닌 그의 문자였다. 익숙한 사람 대신, 낯선 글씨만 보내왔다. 대꾸할 말을 찾다 또 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결국 마무리하지 못한 문장인 채로 2년의 사랑에 온점을 찍었다. 그는 틀렸다. 그와는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처음부터 사랑이었으니, 돌아가도 사랑이었다. 그는 기광에게 단 한순간도 친구였던 적은 없다.

 

주인을 뺏긴 아이스커피 잔에 방울방울 눈물이 졌다. 해가 가고 달이 올 적까지 붙박이로 앉아서 그것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얼음은 녹고, 쉴 새 없이 흐르고, 고인 물이 소설책 한 권을 적시려는 찰나,

 

 

「나이스 캐치.」

 

 

요섭이 나타났다.

 

손에 쥔 책을 잠시 살피더니 표지에 살짝 묻어있던 물기를 제 티셔츠에 닦아냈다. 여기저기 흙물이 배어있는 옷에는 그 정도의 물방은 티도 안 났다. 요섭에 손에 이끌려 카페를 나섰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조수석에 앉히더니 곧장 액셀을 밟았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캄캄한 산길을 달려 한옥으로 된 건물에 도착했다.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누군가 급히 제 몸만 빠져나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요섭은 빈 공간을 뒤흔들던 굉음의 락음악을 끄더니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대충 바닥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물레에 앉았다. 딱히 말은 없었지만 저 앉으라고 치워준 자리인 것 같아 기광도 따라서 소파에 앉았다. 하얗게 말라버린 흙을 내리고 새 흙덩이를 가져오더니 곧장 발길질을 시작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했다가.

아 맞다, 나 지금 이별했구나, 했다.

 

괜찮았다가, 슬펐다가, 화가 났다가, 자조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눈물을 닦았다가, 했다.

 

이별한 세상에는 심장이 산산조각 나거나 슬픔에 멸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별한 세상이란, 그저 그랬다. 이별한 세상이란.

 

 

 

 

 

 

 

장업장이 이틀 동안 비어있었다.

 

신새벽에 모르는 번호로 몇 번씩 부재중이 찍혀있지 않았더라면 몰랐을걸, 그 망할 술버릇 때문에 양요섭은 완전범죄도 못한다. 이틀 모두 다른 번호였다. 다 큰 어른이니 저가 어디서 무얼 하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일이고, 요섭과 하등 이해관계가 없는 기광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절대로.

 

하지만 눈에 보이니 무시가 안된다. 해가 중천임에도 소파에 웅크려 잠을 자고 있는 몸뚱이. 그 옆으로는 뚜껑 열린 숙취해소제와 벗어놓은 양말이 굴러다니고 있다. 머리맡의 저 랩탑은 언제부터 켜져 있었던 건지.

 

 

“아 씨. 봤어?”

 

 

한시적 사랑의 통증이란 부산물은 완치 판정을 기대할 수 없는 기억이란 고통을 선물한다. 화면 속에 아는 얼굴이 있다. 차 안에서 예비신부라는 사람과 사진을 찍었다. 웨딩 촬영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또 하나 낯익은 건, 사진 구석에 잡혀 일부가 잘려있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가방. 생일 선물로 가방을 사 달라 했었다, 날마다 함께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곁들여서. 고르고 고르다 누구나 알 만한 브랜드에서 검은색 가죽 서류 가방을 샀다. 제일 비싼 걸로 했다. 어떻게든 증명을 하고 싶었던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가치를 어떤 수치 같은 것으로. 평생 간직하겠다 약속을 하더니, 일단 그 약속 하나는 지킨 셈이다.

 

 

“응. 보여서.”

 

 

요섭이 인상을 찌푸리며 뒷목을 긁적인다. 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다. 피드에 우연히 뜬 그의 사진을 보았다가 크게 혼이 났다. 제멋대로 랩탑을 닫아버리고, 돌아오라고 고사라도 지내냐며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게 뻔하니 인스타를 당장 탈퇴하라고 어깃장까지 놓는 꼴을 보니 우습다 못해 화가 났다. 나름 천천히 감정의 정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제3자가 그러면 안 됐다. 제3자가. 그래서 기광도 목소리가 커졌다.

 

 

「너 몇 살이야? 사람이 왜 그렇게 무신경해. 그리고 니가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 우리가 굉장히 이상한 관계라는 거, 자각은 하고 있냐?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여전히 우리가 친구라는 게 말이 돼? 실은 그쪽에는 날 조롱하고, 여기서는 날 동정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한 번도 마음에 담아본 적 없는 말을 쏟아내는 자신에 저가 놀라서, 멈추려는 시도조차 못 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그 사람보다 나와의 우정이 소중해졌어? 그럼 어디 그 사람이랑 절교라도 하고 오지 그래.」

「그럴게.」

 

 

늘 그런 식이었다. 생각하는 척도 않고 어린아이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들켜버린 다섯살짜리 꼬마가, 더는 혼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도망가려고, 마음에 없이 던지는 말.

 

 

「지겹다. 너 가벼운 거 진짜 지겨워. 뭐든 그렇게 다 쉽지.」

「그런 거 아니라고.」

「아까부터 계속 뭐가 아니라는 건데.」

「좋아해.」

「……뭐?」

 

「미안해.」

 

 

고백인지 사과인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치기 어려워 가스불을 꺼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도망가려고, 없는 말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마무리된 그날의 실랑이는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못하고 봉인되었다. 딱히 변한 것도 없었다. 그들의 만남이란 언제나 한 해 살이뿐이었고, 요섭은 언제나 혼자이지 않았으며, 기광은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저 가방 훔쳐 올게.”

“진심으로 들리니까 그러지 마.”

“아님 결혼식 가서 깽판 칠까?”

“식은 언제래.”

“진짜 가게? 이기광씨 무서운 사람이네.”

 

 

가슴이 뻐근한 듯하다가 이내 괜찮아졌다. 말하자면, 어떤 홀가분함도 있었다. 결혼은 안되지. 유부남을 마음에 둘 수 있을 만큼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다. 혹시라도 주인도 모르는 새 남아있던 미련의 조각이 있다면, 일말이라도 찾아내 뽑아버릴 요량이었다. 이렇게 과거와 완벽히 인사할 수 있겠구나, 드디어.

 

 

“너, 잘 다녀오라고.”

“안 가. 청첩장도 못 받았고,”

 

 

가만 보면 그 사람도 은근히 꼬였다. 분명 둘이 잘 지내는 게 못마땅한 거다. 집안이 문화·예술 활동에 관련된 일을 하는데 아주 잘 하는 짓이다, 도예명장과 척을 지고. 그럼 어느 편이 손해일지는 자명하지 않나. 쪼잔한 인간. 양요섭은 숙이고 들어가지 않을 테니 분명 후회하는 건 당신일 걸.

 

 

“그때쯤이면 나는 프랑스에 있어.”

 

 

생각이 멈췄다. 이번엔 프랑스인가. 다양한 흙을 만지고 새로운 안료를 접해보겠다며 전 세계를 떠도는 양요섭. ㅡ현지처는 덤이라고 제 입으로 그랬다ㅡ 가끔 뉴스에서 듣는 소식도 있으니 완전 핑계는 아닌 것 같다만, 뿌리를 내리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다른 명장들과는 달리 부초처럼 떠도는 통에 된서리를 맞기도 한다. 슬슬 정착하면 좋을 텐데. 혼자 하는 말이지만. 그런데 멀리도 간다. 시차가 얼마더라.

 

 

“거기서는 다른 사람 전화기로 새벽에 전화하지 마.”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어제도 엊그제도, 외박하고 전화했잖아.”

 

 

발끈했다. 시차에 배려 없이 전화를 하는 양요섭이 나쁘다. 밤잠을 설치게 하고, 다시 잠들기까지 괜히 생각하게 하고, 몽롱한 다음날에도 또 생각하게 하고. 아무튼. 그러니까.

 

 

“나 외박했어?”

“설마 기억이 안 나냐.”

“여기. 우리 집이야?”

 

 

입꼬리로 비죽비죽 웃는다.

 

 

“……그건 아니지.”

“아하. 집 두고 밖에서 잤다고 나 혼나는 거구나.”

 

 

자기야. 와락 달겨들어 그 몸을 꽉 껴안고 이리저리 흔든다. 요섭이 흔들 때마다, 기광은 흔들린다. 장작도 패고 흙도 나르고 커다란 항아리도 뚝딱 만들어내는 손아귀에게 방구석에서 글만 쓰는 신세는 당해낼 겨를이 없다.

 

 

“아 그냥 말이 그렇다고,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르잖아.”

“몹쓸 작가네.”

“놔, 숨 막혀.”

“다른 사람 전화기로 전화하지 마, 새벽에 전화하지 마? 뭐가 더 싫어?”

“둘 다 싫어 둘 다.”

“이기광. 질투해?”

 

 

퍽. 사력을 다 해서 밀쳐냈더니만 겨우 한 뼘 밀려났다.

 

 

“니 현지처들한테 내 개인정보 주기 싫어서 그런다. 통화목록이나 잘 지워, 바보야”

 

 

덥다. 앞뜰로 나와 손부채로 열을 식힌다. 아래에서는 도요가 북적이고 있다. 오늘은 다례제가 있는 날이다. 일기예보대로 맑고 건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으니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이다. 제례가 끝나면 봉통에 불을 피운다.

 

질투는 무슨.

 

그리고 가마가 꺼지면 양요섭은 떠난다.

 

 

 

 

 

 

“원고 잘 받았습니다.”

 

 

세권의 책을 함께하는 친분의 시간에도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황 편집자는 늘 기광을 찾아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 원고를 넣어간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묘한 조합이다. 무엇보다 통찰력이 뛰어나서 작가를 읽는 일도, 독자를 만나는 일도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출판사의 주역이다. 등산객이 길목으로 들기 쉽겠다며 작품에 몰두하는 환경을 위해 사유지 출입 금지 팻말을 권한 것도 그녀였다.

 

 

“어떻게 사랑에 해설을 써주실 생각을 하셨어요?”

“시가 좋아서 그다지 할 것도 없었어요.”

“박시인도 그랬어요. 해설 덕분에 자신의 시가 다시 태어났다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하죠.”

 

 

해설이라는 것이 글이 글에게 하는 덕담 같은 거라지만, 결국 글이란 사람 손이 내는 일인지라 시인과 시인으로 마주 서게 되는 것 같아 편치가 않았다. 들어오는 부탁도 사랑을 부르는 서정시가 많아 감상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계절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건지. 요섭이 작업실에 머무는 계절이 되면 기광은 어쩐지 제 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가을이란 기광이 평소에 않는 짧은 기고나 수필을 쓰는, 혹은 타인의 언어를 듣는 계절이 된다. 이번에도 이것저것 들추다 보니 좋은 사랑의 노래를 만났다. 어쨌든 덕분에 해설을 쓰게 된 셈이니, 이것도 덕이라면 덕이다.

 

 

“작가님. 요즘 좋은 일 있으시죠.”

“무슨 좋은 일이요?”

“예를 들어, 만나는 분이 있으시다든지.”

“그런 ‘좋은 일’은 없는데요.”

“정말요? 편집팀에서 소소하게 그런 말이 돌아요. 이기광 시인 사랑을 한다더라, 이 핑크빛 코멘트는 경험이라더라.”

 

 

하긴, 원래 작가님은 가을에 쓰시는 글이 가장 온도가 높긴 했네요. 서류를 가지런히 한 후 플래시 드라이브와 함께 가방에 넣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이것 좀 봐 주세요.”

 

 

오늘 그녀의 방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편집자로서, 하나는 다례 친구로서이다. 기광이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반은 요섭이지만 반은 그녀로, 그 본가는 다원을 한다고 했다. 좋은 차를 고르는 법, 보관하는 법, 마시는 법. 모두 그녀에게 배웠다.

 

찻사발 한 점이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오른다.

 

 

“멋지네요.”

 

 

김철호 사기장님의 작품이에요. 쥐었을 때 손이 참 좋아요. 양손으로 사발을 쥐고 차를 마시는 시늉을 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조금 둥근 형태로 굽에 매화피가 자잘하게 피어 있었다.

 

 

“저 양요섭 명인의 작품을 노리고 있거든요. 살짝 알려주세요, 이번엔 몇 점이나 내놓을 것 같으세요?”

“재임때 살짝 봤는데, 작년과 비슷할 것 같아요.”

”정말요? 그럼 경쟁이 치열하겠네요.”

 

 

요섭이 다작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두 점만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귀해지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많은 찻사발들이 요출 되기가 무섭게 그 망치에 깨어진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나마 살아남는다 한 들 세상 구경도 전에 기광의 장식장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족족 선물이라고 내미는 걸 ‘나는 됐으니까 팔아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기광도 난감할 때가 있다.

 

 

“작가님이 제일 부러워요. 명인이 찻사발도 손수 만들어 주시고. 그것도 세상에 하나뿐인.”

“도자기는 원래 같은 게 없다고 하니까요.”

 

 

도자기는 요변(窯變)이 정하는 것이라 가마에 백 개를 넣으면 그중 겨우 서너 개를 건지고, 한 사람이 한 날한시에 만들었다 하더라도 똑같은 도자기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어머, 저는 분명히 ‘의도된 다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일을 하다, 기광에게 훈수를 둘 때의 표정이다. 그럴 때에는 대부분 황 편집자의 말이 맞았다.

 

 

“작가님이 가지고 계시는 찻사발은 양요섭 명인이 만드는 여타 것들에 비해 전의 두께가 조금 얇고 바깥으로 기울어진 각도도 덜해요. 그리고 여기, 제가 가져온 찻사발을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기광이 두 손으로 그녀의 새 다완을 감싸들었다.

 

 

“어떠세요.”

“음, 그게……”

“아무 느낌. 없으시죠.”

 

 

 

 

 

 

심란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낮에 들은 편집자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쉬이 내려가질 않는다. 요섭은 가마를 지키러 갔다. 우웅 우웅. 바람에 방 안이 술렁인다. 밖으로는 풀벌레가 울고 있다. 지는 가을은 이렇게나 슬프다.

 

그날도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물레 한 발에 벌레 한 울음.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물레 소리가 멈추면 찻사발이 한 개다. 방금 전까지 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간격을 맞춰 판에 세우고 다시 물레를 찬다. 흙을 올리고 흙을 내린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그게 열 번쯤 반복되었을 때, 제목만 써 놓은 시가 생각났었다.

 

나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하고 있었다.

내가 두고 온, 사랑하는 것이었다.

 

 

「양요섭. 그거 알아?」

「뭔지는 몰라도, 모를걸.」

「문인들 중에 시인만 시인이다? 소설가도 수필가도 대본가도 ‘집 가(家)’를 쓰는데, 시인만 ‘사람인(人)’을 써서 시인.」

「오.」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 그게 연인(戀人)인 것처럼. 시를 하면 시가 된 사람이라, 시의 사람이라서, 시인.」

「멋있다. 근데 너 시인이잖아.」

「그렇네. 나 시인이네.」

「응. 그러면 시 써, 시.」

「그래. 시나 쓰자.」

 

「이기광. 이렇게 해봐.」

「미친. 이 와중에.」

 

 

겁도 없이 그 소설에는 속편이 있었다. ‘있었다’는 건, 현재는 없다는 말이다. 어디를 갔냐고 물으면, 가마의 주인이 부추겨 백화도요에 처넣었다고 말하겠다. 그 사람은 틀렸다. 내 사랑은 무겁다더니 한없이 가볍게도 날아갔다. 부추긴 놈이 더 신나서 요섭은 가마 속에 고구마를 던져 넣었다.

 

그래서, 이별했던 세상이란, 이별했던 세상이란…… 고구마. 고구마 맛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망했다.

 

그 때, 내가 웃었던가.

 

 

 

 

 

 

 

“어? 이기광이네?”

 

 

니가 가마에는 웬일이야. 제 앞에 선 기광을 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일단 크죠. 참고로 이것도 작은 축에 속해요. 제가 손이 작아서 작은 다완을 선호하거든요. 그래도 커요. 왜냐면 실제로 크거든요. 양요섭 명장의 다른 작품들도 이작가님의 소장품보다 크기가 커요.」

 

 

“양요섭.”

“응.”

“너 내 손 크기는 왜 재는 거야.”

“그래야 맞는 찻사발을 만들지.”

“그걸. 왜 이제 말해.”

“해야돼?”

 

 

「좀 무겁다고 느끼신다면 그것도 맞아요. 작가님의 소장품들은 아주 가벼워요. 찻사발은 가벼울수록 가치가 높답니다. 아주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만 실현되는 일이니까요.」

 

 

“나는. 나는 왜 도태되게 안 둬.”

“내가 책임지려고.”

“어떻게.”

“나 능력 있으니까.”

 

 

「모두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무진한 정성을 들여서 만든 작품이에요. 신중하고 중후한 장인 정신이 깃들어진.」

 

 

“내가 못 잊으면 어쩌려고.”

“기다리면 되지. 기다리는 게 내 일인데.”

 

 

그게 뭐야. 어떻게 그런 말을 이렇게도 쉽게 해. 그건 너무,

 

 

“……무겁다고.”

“누구 무게 감당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서 감당할 수 있다고.”

“시켜보고 말해.”

 

 

「명인에게 작가님은 평생을 두고 볼 친우이신가 봐요. 그 정도의 사이는 되어야 납득이 될 것 같은데요?」

 

 

“너무 늦어서 미안.”

“그러니까. 이게 뭐야, 5년이나 걸렸잖아.”

“분위기 좋았는데 산통 깨지마. 매일 잠자리 상대가 바뀌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음……질투 유발?”

“미친.”

 

 

「좋은 찻사발을 고르는 기준은 ‘느낌’이래요. 그래서 다완은 자신이 선택해요, 내 느낌은 나만 알 수 있으니까요.」

 

 

“나랑 프랑스 가자.”

“현지처는 어쩌고.”

“바보냐?”

“뭐? 바보한테 그런 말 듣기 싫거든?”

“바아보.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냐.”

 

 

못 믿겠으면 이참에 나랑 여기저기 다니면서 색출해 보시든가. 양요섭이 다가온다. 목장갑을 툭툭 벗어던지고는 남은 먼지는 바지춤에 털어냈다. 손을 마주 잡더니 손깍지를 끼어 왔다. 나도 이거 되게 해보고 싶었어. 한 걸음의 간격이, 이렇게나 간지럽다.

 

 

“마담, 저와 함께 프랑스에 가요.”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마.”

“우리 결혼해요.”

“좀 생각을 한 다음에 말을 하라고.”

“알겠어. 그럼.”

 

 

「그런데, 내 느낌을 아는 사람이 있대요. 우리는 보통 그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사랑해요.”

“……제가 졌습니다.”

“같이 가는 거지?”

“만년필 사주면.”

 

 

그녀의 말처럼 이것을 운명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손이, 이 눈빛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제까지 달랐었던 너와 나의 중량은 내일도 다른 숫자를 가리킬 것이다. 어쩌면 서로가 같은 온도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유(浮遊) 하던 너와 나의 입자가 한곳에서 만나 결정(結晶)이 된다는 것. 이 계절에 의미는 그것이면 되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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